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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탄생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장혜경 옮김 / 반비 / 2015년 11월
평점 :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우리는 이미 괴물일지 모른다]
[★★★★]
[2016. 5. 23 ~ 2016. 6. 8 완독]
악은 인간에게 낯설지 않다.
p7
악은 평범한 현실이다. (책의 내용을 살짝 비틈)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든다.
암암리에 인정받고 있는 몇가지 도시 전설(?). 자신이 속한 집단에 꼭 또라이 한명씩은 있다는 또라이 보존의 법칙, 사람이 평생 떨 지랄은 정해져 있으니 가면 쳐 냅둬야 한다는 지랄 총량의 법칙. 두가지 법칙이 가리키는 인간의 특성은 '세상에 미친X이 많다는 것이다.' (주변에 없으면 제.발. 그것이 본인임을 인식하기를...).
그리고 뉴스에서 드러나는 정신나간 범죄 행위가 하루를 거르지 않고 터져나오는 세태를 보면 우리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로 방향을 잡고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뉴스에서 드러나지 않는 범죄는 또 얼마나 많을까?)
좋은 규범과 올바른 가치가 실종 되었다고 모두가 혀를 차며 자신은 이성적이고 법없이도 살아가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사람에게 묻고 싶다. 정말 당신은 그러한가? (특히 내가 그렇지 않아서 더욱 그렇다.)
나는 욕망을 거세하면서까지 도덕적 군자로 살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욕망이 다가 온다면 충분히 타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설 <가토의 검> 中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는 가정은 극도로 의문스럽다.
p17
"세상 참 좋아졌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 등의 말을 손쉽게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봐서는 세상은 크게든 작게든 항상 새롭게 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2016년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의 환경과는 다른 삶의 형태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환경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왜 우리가 괴물이나 또라이, 미친X으로 불려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새로운 환경. 이는 사람의 모든 부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환경과 함께 가치관, 성향, 정체성 등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 방향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각종 미디어에 등장하는 이민자/ 망명자를 배척하는 민족주의 집단의 득세와 주공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차별하는 (대놓고) 인간의 등급화 등은 새로운 환경에 대한 의구심을 키워가기에 충분한 단초라 생각한다.
우리의 외면, 내적 경험, 태도 등은 우리가 수신하는 메시지들에 의해 결정된다.
p30
지식은 윤리에 종속된다. 가지가 없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덧. 존재해서도 안되고..)
p80
특히 환경이 중요한 이유는 있는 그대로 습득을 한다는 다음 세대(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그 '문화(환경)에 길러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족, 사회, 문화로 아이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에 큰 비중을 두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정체성의 형성이 '사람의 존재가 그렇게 태어난다'라기 보다는 '성장에 더 밀접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아(自我)'라는 이데올로기는 환경과 문화, 규범과 가치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른 천차만별의 형태를 띄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개인은 '편견 덩어리'라는 말이 어느 정도는 옳으며 그 편견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가장 큰 인생의 목표가 아닐까 싶거든...
모두가 자신의 규정을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이데올로기는 원시적이고 낡았고 타락했다고 생각한다.
p37
어쨌든 역사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종교는 도덕적 힘을 잃었고 이제 과학이 방향타를 잡았다. (인간은 악하고 죄가 있다는 종교적 관점이 변화 할 수 있다는 관점의 등장으로 인해서 큰 변화를 맞이 하였지요. 그 중 하나가 과학인데.. 만능 과학주의는 또 다른 문제점)
p65
'자연도태'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개인을 노린다. 다른 남자들과 여자들을 희생시켜 성공을 일구어내는 자가 가장 강한 남성 혹은 가장 강한 여성이다. 판단의 기준은 성공이다.
p87
이러한 새로운 규범/ 가치의 등장으로 인한 시대 관념의 변화는 좋은 수도 혹은 나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그 변화의 고삐를 개인이 어느 방향으로 잡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 즉 문화/ 시대상/ 환경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결코 긍정적인 지표를 보이지는 않는다.
사회의 해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공동체 의식은 희미해지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으며, '돈과 권력'을 많이 가진자가 가장 성공적이며 가장 윤리적인 사람에 가깝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흑백논리가 판을 치고, 인터넷 자경대가 자신의 말이 곧 진리임을 전파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각종 프레임/충(蟲)/헬(hell)조선 싸움으로 번졌는데, 아무리 새로운 문제가 새로운 시대에 등장한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닌데.' 싶은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옛날 때가 좋았지" 류의 발언.
이런 식의 구호들이 잘 팔린다.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나에겐 이런 현상이 인간의 이성이란 불안한 직관을 덮은 얇은 칠에 불과하다는 증거로 밖에는 안보인다. p125
옛날이 더 좋았어! 이런 생각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 가슴이 아프다.
p127
무언가. 새로운 것을 낳고 있는데, 내가 그 새로운 것을 좋아 할지는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나는 여기에 없어서 그걸 못볼테고, 너는 보겠지. 형이나 나같은 사람들은 폐물이 되었고 세상을 떠나야 하지만, 이 사회의 의미있는 것들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야.
소설 <파수꾼> 中
옛날이 무조건 좋다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만들어 나가야할 의무가 있으니까 말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교훈으로 삼아야지 곱씹을 거리는 아니라고 보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신자유주의. 누가 뭐래도 우리는 많은 학자가 규정한 '신자유주의'라는 틀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출발은 의외로 단순하다. 인간은 스스로의 이익을 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한히 경쟁해 쉬지 않는 성장으로 최고의 결과를 배출해낼 수 있다는 것. 그러니 결과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개인탓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과게에는 경제가 종교, 윤리, 사회의 조직들로 이루어진 전체 조직에 끼어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에선 그렇지가 않다. 윤리와 사회가 '시장'에 복종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경제 이론으로 그치지 않는, 훨씬 더 포관적인 이데올로기이다.
p130
정통 자유주의는 국가와 사회의 엄격한 분리를 추구하지만 신자유주의는 국가를 소위 자유 시장에 복종시키려고 한다.
p130
경제적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지적 업적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적자생존(適者生存)을 깔고가는 능력주의와 결합해 "우리나라는 사람이 자원이다."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엄청난 능률(?)와 효율(?)을 발생시켜 한강의 기적이 되었다. (긍정적인 측면만 기술한다.) 이렇게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는 지금 어떻게 평가되고 있나.
'경제적인 가치를 생성하는 것' 이외는 모든 것이 등한시 되어 오랜 기간 지켜온 좋은 전통과 문화는 사라지기 일보직전이고, 올바른 사람을 길러내기 위한 철학같은 위대한 질문은 사람을 현혹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좋은 문구로 전락했다. 인문의 가치는 개인이 죽을 때까지 생각하고 훌륭한 인성을 길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요즘 보면 '힐링'같은 '트랜드', '유행'의 일종이지 지속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소위 '성공'으로 대변되는 소수의 인원은 새로운 엘리트 계급으로 성장하여 다시 과거와 같은 학벌, 돈, 권력과 같은 폐쇠적인 사회를 만들어 내고 있으며, 모두가 리더(Leader)가 될 수 없음에도 '당신도 리더가 될 수 있다!'라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대학은 취업, 인풋/아웃풋으로만 존재하지 고등 학문/ 지적인 성장을 위한 곳이라는 말은 사라진지 오래다.
성공이 새로운 도덕의 기준이라면 새로운 비도덕적 인간은 실패자이다.
p182
"노인들은 살인적인 등록금에 관심없고, 젊은이들은 세계 최고 수준인 노인들의 빈곤과 자살에 관심이 없다."
책 <분노 사회> 中
공익을먼저 생각하는 공동체 윤리가 실종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도덕적 기준은 수수 공리주의 성격을 띤다. 모든 것은 생산, 성장, 이윤의 개념으로 측정된다.
p188
우리를 지탱해왔던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성장이 멈춰버린 지금, 성장때문에 묵인되어 왔던 문제들이 물밀듯이 터져나오면서 사람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괜찮은가?" 변화해 왔던 사회의 자화상, 우리의 정체성. 새로운 규범의 이름은 효율이고 목표는 물질적 이익이며 단 하나의 덕목은 소유욕이 되어버린 시대에게 말이다. (p194)
'성공'이라는 이름은 모든 것을 규정하고 판단 기준이 되어 세상을 재단(裁斷)해왔다. 이윽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게 되었다. 공동체 의식의 부재는 극단적 이기주의를 불러와 결국 사회 자체를 무너뜨리게 되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는 타인의 존재 유무이다.) (사회는 동일성과 차이, 공동체와 개인의 균형이 유지될때 제 기능을 다한다.)
위기가 세상을 잠식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말한다. "이대로는 안된다!"
경제 위기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었다. 사방에서 변화해야 한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중략) 모두가 똑같은 확신을 품고 있다. 어쨌든 내 탓은 아냐. 나는 피해자일 뿐이야.
p249
청소년이나 청년들만 신자유주의적정체성을 키운 것이 아니다. 부모들 역시 이런 방향으로 힘껏 떠밀려 왔다.
p250
그러나 우리가 행동은 그렇게 하고 있을까? 올바르게 고쳐 나가고 있는가? 역시나 스스로의 이익이 아니라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 말은 누가 못하겠는가? 나조차 이러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무겁게 마음을 짓누른다.
(하지만) 그렇다. 이러한 정체성을 기성 세대에, 아니면 청년 세대에, 그것도 아니라면 청소년 세대에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제 기능을 다하는 이상적인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잘못하고 있는 것은 고쳐야 한다. 세상을 바꾸려면 우리 스스로가 노력해야 함을 알것이다. 당신이 아니고 나, 자신.
'어떻게 고치자'라는 해법보다는 우리가 괴물이 된 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심도있게 파악을 해왔던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그런데 우리는 이미 괴물일지 모른다.
인간은 때때로 운명의 주인이 된다네.
우리가 아랫것 노릇하는 잘못을... 브루투스,
별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니까.
p264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Kommunist.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Als sie mich holten,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en konnte.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First they came>
- 마르틴 뉘묄러 -
<책 속의 책>
<멋진 신세계> - 헉슬리
<능력 주의의 등장> - 마이클 영
<덕의 상실> - 매킨 타이어
<에덴의 동쪽> - 존 스타인 벡
영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책임의 압박감, 왜 부모는 죄책감을 느끼나> - 카트 샤무브로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