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구루이 13
야마구치 타카유키 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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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아가면서 어떻게는 선택을 해야만하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선택이란 근본적으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지만 이유는 구구절절하다. 어쨋든 현대인들의 모든 선택은 자기만족이다. 삼성폰을 산다거나, 명품을 산다거나. 어쨋든 자기만족은 소비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하나의 의식코드같다는 생각을 한다. 봉건시대를 사는 사람들도 있다. 엄격한 상하질서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따라 하루하루를 보낸다. 현대인의 눈에는 노예로 보일 것이다. 봉건시대가 과거에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권력에의 예종이란 속성은 현대인이라고 해서 자유롭지는 않다. 

이라코라는 인물은 봉건질서 속에서 신분을 부정하고 자신도 그 최상위에 오르려고 발버둥친다. 이것을 봉건사회의 초극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자기 스스로 또하나의 봉건사회를 만드는 것인가는 논외로 치겠다. 하여간 동양적 새디즘의 극치인 일본 봉건사회 속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인간과 올라 오는 것을 막는 인간들의 전쟁터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급 인물들은 모두 특이하다. 육손이, 외팔이, 맹인, 절름발이.  이들은 이러한 사회적 개인적 헨디켑을 갖고서 위로 오르려 발버둥친다. 하지만 모두 실패한 사람들이다. 검의 대부 코간은 면접 때 손가락 6개를 수치스러워 하다가 떨어졌다. 창녀의 자식으로 검을 통해 신분을 넘어 위로 오르고 싶어하는 이라코 역시 오르다 떨어진다. 그리고 욕망이란 하나도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겐노스케, 그 역시  겐노스케는 이러한 자신의 욕구를 또 다른 형식으로 발산한다.  

겐노스케의 위로의 욕망은 아래를 누르는 권력 속에 있으면서 자신과 체제를 동화시킴으로써 체제의 경찰로써 살아가면서 살아간다. 그는 단지 오르는 자를 누르면서 만족해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깨닫지 못한 우둔한 인간. 전통적 봉건 사회에 가장 적합하게 적응해서 살아가는 모습.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있는 상태다. 그는 이라코가 자신의 자리를 빼았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덕분에 살아 움직이게 되는 케릭터다. 

이라코 역시 체제를 햝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의 분노는 체제 속에 거부된 자신의 모습 때문에 표출되는 것이다. 그의 절제할 수 없는 욕망은 어떠한 체제 속에서도 곱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그는 정점에 오르지 않는 한 멈출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겁법이 된 것도 그의 인생을 반영하는 것이다.  

코간의 검법은 타격 범위를 극한으로 벌리는 검법이다. 어디 블로그에선가 그의 검술을 가까워질 수 없는 봉건신분제를 상징한다는 말을 보았다. 그리고 겐노스케의 검법의 뿌리는 항상 코간류의 검법이다. 스승의 검법을 연구해 자기것으로 만들면서, 체제속에서 성장한 그의 검법. 하지만 아무리 그의 검법이 정심해 지더라도 이라코의 변칙적 공격에 번번히 패배하고 만다. 하지만 그가 가문을 벗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부터 그의 검법역시 한계를 극복한다. 또 다른 차원의 출발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근거 잃어버린 그가 다다르고자 하는 것은 세이겐의 죽음. 그리고 세이겐의 죽음 뒤에는 그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 

 굴절된 인간상의 모습. 그리고 비정상적 인간들의 향연.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 까. 인간의 자유를 짓밟는 봉건사회가 그 잘못인가, 아니면 인간의 심성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인가.세계는 개인의 원한을 떠나 큰 틀에서 돌아가고, 그 속에서 갈길 몰라 방화하며 서로 살을 섞으며 칼을 뽑아대는 하루살이 인간들의 향연이다. 하루살이 인간들이 하루 동안 그토록 처절하게 이루어 내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무사는 3분간의 시합을 위해 인생을 건다. 하루살이 무사의 꿈은 세계보다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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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팔부 세트 - 전10권
김용 지음, 박영창 옮김 / 중원문화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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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천룡팔부는 세명의 주인공이 나타난다. 그 중에 소봉의 카리스마는 압권이다. 소봉의 모습은 사내다움이다. 술을 말로 마시고, 호기롭게 주변을 제압하는 모습. 어쩌면 수호지에서 주먹으로 호랑이 잡던 인간을 모티브로 삼았던 것 같다. 중원의 거러지 패거리 왕초로써 무술은 소림무술을 배웠던 일류 엘리트. 하지만 자기 출신성분과 가족 피살의 원한관계는 자신의 길을 새로운 길로 인도한다.

자신의 친구였던 중원의 인물들이 모두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의 종족인 거란족을 위해 다시 정신개조를 해야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자라왔던 환경으로 인해 등을 돌리지 못한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은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은거도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과 당대의 정치집단 및 무림집단의 혼란한 소용돌이와 맞물리면서 자신의 길을 더욱 비장하게 만들어 버린다.

수 백명의 군웅들의 향연, 그리고 제목이 의미하는 천룡팔부라는 불교적 색체,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분위기와 뛰어난 상상력을 바탕으로한 화려한 무공들은 이 소설의 분위기를 이백의 당시와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 버린다. 초반의 느낌은 이렇다.

젠장 하지만 소봉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3류로 바뀐다. 결정적으로 소봉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면서 자살하는 단계로 오면 결국 중국 이라는 모티브로 완전히 융합된다. 중화적 봉건적 질서체제 속에 이민족의 영웅은 죽어야한다. 소봉의 갈등 역시 중심 뿌리는 충효의 탈을 쓴 중화제국주의다.

제목은 천룡팔부지만 불교적 이미지는 희박하다. 스토리 라인을 보면 소림사와 개방을 중심으로 거기다 소요파가 들어가는데, 이는 불, 유, 도를 아우르려는 시도가 있는것 같다. 그러나 주인공의 삶에서 불교적 색체를 읽어내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저 단예가 집안이 불교, 허죽이 소림사 까까중, 소봉의 무공 뿌리가 소림사이고, 이 책의 최고 고수 소림사 헌책방 주인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껍데기만 불교다. 기본적으로 흐르는 관점은 중국 통속문학의 흐름이 존재할 뿐이다. 이 소설에서 소림 무술은 중원을 상징한다고 봐도 된다. 소림 무술을 빼앗기 위해 수많은 이민족 세력들이 침입하고, 주인공들은 이를 하나하나 통쾌하게 이겨낸다. 특히 소림사 도서관 사서가 나타나 설법을 통해 중화적 가치를 주장하는 부분은 김용 소설의 전반에 걸친 기본적 뼈대다.

김용의 천룡팔부는 지겨운 중화적 가치, 필요없는 군더더기 스토리, 그리고 진행 될 수록 스토리의 질이 쓰래기화 된다는 데 있다.

김용 무협의 성공한 부분은 현란한 무공의 질서체계가 분명하며, 각 무공의 특징을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으며, 적당히 통속적 가치를 드라마틱 하게 꾸며내는 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김용의 소설을 만화방에서 구해봐야 했던 것도 어쩌면 우리정서에는 이런 중국 통속 소설의 가치가 만화방에 있었기 때문에 보석처럼 빛날 수 있지 않았을가 한다. 이 소설이 다른 문학소설과 함께 있었다면 엄청 꾸지리했을 것이다.  

 정직하게 물어본다. 이 책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배울 수 있는가? 없다. 잼이 있는가? 잼있다. 읽고 나면 기분이 좋은가? 별로 않좋다. 왜냐하면 중학교 고등학교시절 용돈 털어 책을 빌려보거나 사보면서 공부를 땡땡이 깠다는 불안감. 그리고 밀려드는 공부의 압박감. 그리고 시험지를 받았을 때 어제 왜 내가 이 소설을 봤을 까 하는 짜증이 덥쳐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시 이 책을 잡게 되는 이유는 잼이있고 신나기 때문이다. 보는 동안은 엄청 달아오르지만 보고나면 힘이 빠져버린다. 왜 봤을까. 그러나 다시 찾게된다. 통속 무협 소설이란 야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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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집전 -상 동양고전국역총서 6
성백효 / 전통문화연구회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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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서경이라는 단어는 나중에 생겼다. 唐代까지 《尚書》라는 명칭이 사용되다가 宋代에 이르러 《書》 혹은 《書經》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宋·元 시기의 정식 문건에는 《書經》이라고 명명하지 않았다. 蔡沈의 《書經集傳》의 정식 명칭은 《書集傳》이었고, 누가 ‘經’字를 첨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明代에도 胡廣이 《五經大全》 가운데 《書傳大全》 10권을 만들었으나 “傳”이라고 하였지 《書經》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書傳》이라는 명칭 대신 《書經》이라는 명칭을 明代의 학자들이 빈번하게 사용하였고, 淸代에 비로소 국가에서 편찬한 《尚書》관련 저작에 《書經》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걸 통해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이렇게 불렸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梁啓超의 《中國近三百年學術史》의 〈辨僞書〉 조목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어떠한 학문을 하든지 간에, 모두 진위를 분별하는 것을 반드시 기본적인 작업으로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근거한 자료가 허위자료일 경우에는, 연구를 통해 이루어낸 성과 또한 이에 따라 허위적 결론이 되기 때문에, 연구에 쏟은 노력 또한 헛된 것이 될 뿐이다. 중국의 전통적 학문은 열에 아홉이 고적을 통한 학문이었는데, 중국의 위서 또한 대단히 많았다. 그래서 위서를 변별하는 것은 전통 학문을 정리하는 것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이다.(無論做哪門學文, 总需以别伪求真为基本工作. 因为所凭借的资料若虚伪, 则研究出来的结果当然也随而虚伪, 研究的工作便算白费了. 中国旧学, 十有九是书本上学问, 而中国伪书又极多, 所以辨伪书为整理旧学里头很重要的一件事.)

어떠한 학문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은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의 추구를 위해 거짓을 걸러내는 변위라는 방편이 필수적으로 생겨나게 되는데, 중국의 전통적 학문은 대체로 전해지는 전적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위서의 변별은 전통 학문을 배우는 가장 기본적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학의 경전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주는 절대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전에 대한 의심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일종의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의 교리와 같은 믿음을 심어 주었다. 더욱이 경학에 부여된 신비주의적 성격은 경전에 대한 맹신을 한층 더 강화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전의 전수가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라는 곳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스승의 학설을 따르는 것이 일종의 법으로 형성되었는데, 이것은 곧 스승의 가르침을 전승하는 집단이라는 형식으로 고착화 되었고, 이러한 법칙은 스승의 범위를 벗어나거나 약점을 옹호해야만 하는 묵수의 체제로 돌입힌다.당대의 《오경정의》는 묵수체제의 정수다

송대에 이르러 이러한 경전에 대한 의심이 발생한 것은 학술의 새로운 진보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기존의 학술체제를 완전히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대의 학자들은 宋·元·明 삼대의 사상과 학술을 宋學이라는 특별한 명칭으로 분류했다. 그 경계를 나눈 것은 “한대의 유자들은 훈고의 학설만을 말하였고, 송대의 유자들은 의리만을 말하였다.(漢儒專言訓詁, 宋儒專言義理.)라는 것이었다. 《四庫全書總目·經部總敍》에서는 송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洛學(二程)과 閩學(朱子)이 연이어 흥기하여 도학을 크게 선창하여, 한당의 경학을 무너뜨리고, 오로지 의리를 연구하였다. 이들은 경사의 구설을 모두 믿을 수 없다고 배척하였으며, 그 학문은 시비를 구분하는 것에 힘썼는데, 그 폐단은 독단적인 의리로 함부로 판단하는 사나움에 있다.(洛·閩繼起, 道學大昌, 擺落漢唐, 獨研義理. 凡經師舊說, 俱排斥以爲不足信, 其學務別是非, 及其弊也悍.)

송학은 의리를 시금석으로 삼아서 진리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변위라는 방법도 도학적 의리를 구하는문제였다. 이 가운데 경전에 대한 회의는 곧 경학 전통 자체에 대한 의리적 회의이며 반성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尚書·大禹謨》의 人心과 道心에 대한 논의는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하였다. 漢唐注疏의 결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공영달이 주편한 《상서정의》에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인심이 위태로우면 편안하기 어렵고, 은미하면 밝히기 어렵다. 그러므로 精一이라는 것으로 경계한 것이며 그 中을 굳게 잡아야 한다.(危則難安, 微則難明, 故戒以精一, 信執其中.)

하지만 이 구절은 송대에 이르러 전혀 다른 해석을 낳았다. 채심의 《서집전》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놓았다

心은 사람의 지각이며 마음자리에서 주관하여 밖으로 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形氣로 나타난 것을 人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義理에 나타나는 것을 道心이라고 한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私心이 들어서 공정하기 어려우므로 위태롭다고 한 것이다. 道心은 밝기가 어려워 쉽게 어두워지므로 은미하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形氣의 사사로움이 섞이지 않도록 하여 한결 같이 지켜서, 義理의 공정함만을 순수하게 지킨다면, 道心은 늘 마음의 주인이 되고 人心은 道心으로부터 명령을 듣게 된다. 그런 위태한 것이 안정되고 미세한 것이 드러나서 저절로 動靜과 云爲에 과불급의 차이가 없게 되어서 진실로 그 마음자리를 잡을 수 있다. ……, 고대의 성인이 장차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 주려 할 때에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함께 전해주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것이 경전에 드러나는 것이 이와 같다.(心者人之知覺, 主於中而應於外者也. 指其發於形氣者而言, 則謂之人心. 指其發於義理者而言, 則謂之道心. 人心易私而難公, 故危. 道心難明而易昧, 故微. 惟能精以察之, 而不雜形氣之私, 一以守之, 而純乎義理之正, 道心常爲之主, 而人心聽命焉, 則危者安, 微者著, 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 而信能執其中矣. ……蓋古之聖人, 將以天下與人, 未嘗不以其治之之法, 幷而傳之, 其見於經者如此.)

그러므로 송학이 〈大禹謨〉를 해석한 “道心은 늘 마음의 주인이 되고, 人心은 道心으로부터 명령을 듣는다.(道心常爲之主, 而人心聽命焉.)라는 것은 곧 송대 성리학적 체계인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멸한다.(存千里, 滅人慾)이라는 구도 속에, 舜의 전수심법을 결부시켜 놓음으로써 성리학의 문제가 문헌적으로 증명되는 것이었다.   “착한 본성대로 착하게 살자(存德性)”이라는 부분인 송학의 선결과제가 전통적 경전 속에 재확인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한당의 전통경학에 대한 송대 도학의 패러다임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전통 주소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의리적 해석을 시도한 송학이 철리적 부분에 성리학이라는 학적 재구성을 이루해 놓고나자 위진 시대의 현학과 불학에 대항해서 심도깊은 형이상학적 논제를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송학의 “시비를 구분하는 것에 힘썼다.(務別是非)라는 특성은 곧 경전 자체에 대한 의리적 변별작업을 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고문상서》에 대한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오역과 주희에서 시작된 《고문상서》에 대한 의심은 “문장이 해석하기 쉽고 글자가 쉬워서 복생의 책처럼 졸라 어렵지않다.(文從字順, 非若伏生之書, 佶曲聱牙.)라는 매우 간단한 의리에서 비롯되었다. 주희는 오역을 극찬하면서 자신도 《고문상서》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정밀한 연구를 지속하여 《고문상서》, 孔氏의 《전》과 《상서서》, 한대의 《서서》에 대한 회의를 한 부분들이 주자어류 속에 남아있다. 송대 학술 태두가 이러한 태도를 보이자 경전에 대한 회의가 대를 이어 계속해서 발전했다. 명대의 오징은 《書纂言》에서 오역과 주희의 고문에 대한 의심을 대량으로 반영하여 금문 28편만을 해석하였다. 또한 원대의 매작은 《尚書考異》에서 《고문상서》가 여러 서적에 기록된 문구를 모아 만들었다는 것을 하나하나 증명하였는데, 그는 《尚書·大禹謨》의 구절이 《순자》에서 《도경》을 인용한 부분과 《논어》를 절충하여 놓은 것임을 문헌적 자료를 통해 증명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청대의 학술방법에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청대에 이르러 閻若璩의 《尚書古文疏證》에서 《고문상서》의 모순을 하나하나 진술하여 《고문상서》의 위작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서 학술의 패러다임이 고증학으로 변화하는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송학의 “시비를 구분하는 것에 힘썼다.(務別是非)라는 사나움은 문제를 도출할 능력은 있었으나,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학술적 한계점이 있다. 송유들이 갖고 있던 “六經注我”라는 특징이 말해주듯 자신의 의리를 증명하기 위해 경전을 활용하였을 뿐이었기 때문에, 경전의 진위문제가 도학의 틀 속에서는 담론거리 조차 될 수 없었다는 한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채심의 이책은 송대 특징인 전해 내려오는 문물에 대한 고증이 형편없다는 한계성, 그리고 위서를 통해 성리학적 해석체계를 입증했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누군가 학술의 역사는 오독의 역사라고 했던가? 가라라고 해서 그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리지날이 사라지고 가라지랄한 세상이 바로 학술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는 세상이 아닐까. 한국 중국집에서 졸라게 달구어진 후라이펜에 뽁이고 있는 각종야채들, 이 야채들은 중국에 없는 짬뽕과 짜장면을 청요리로 둔갑시키는 재료다. 어쩌면 지금 한국의 중국집 주방 속에서 열라 춘장을 볶아대는 주방장이 바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진짜배기 학자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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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강호 1
김용 지음, 박영창 옮김 / 중원문화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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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오강호는 김용의 소설 가운데 시원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비록 지금은 절판이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노신의 소설 분량을 줄이고 김용의 영웅문이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띄워주고 있다. 노신의 비판 보다는 중화무공제일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싶어서 일까.

   김용의 영웅문은 인물의 개성도 나름 뚜렷하거니와 환타지적 분위기, 그리고 역사와 맞물린 주인공의 드라마틱한 구성이 잘 배합된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에러라면 중화주의가 너무 짙게 풍긴다는 점이다. 동사, 서독, 남제, 북개, 그리고 중앙의 왕중양이 자리잡은 것은 분명 중화사상의 표현이다. 중앙의 왕중양이 무덕으로 사방의 대표를 제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방의 으뜸이 바로 중앙이며 바로 중국을 상징한다.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것 처럼 꼴불견은 없다.

   이와는 달리 소오강호는 이런 구도를 뒤집고 있다. 그리고 서민적 영웅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좀 점수를 주고싶다. 소오강호의 오악검파는 중원을 상징하는 단체다. 오악검파의 분열은 곧 중국의 분열을 상징하며, 화산파의 악불군이 핍박속에서도 위선을 가장하며 오악검파를 장악하려는 야심을 절치부심하는 부분은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린다는 중국적 복수주의의 긴 안목을 보여준다. 마교에 대한 뒤집기와 위군자, 이는 중화적 권위에 대한 헤체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검법은 독고구검이다.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외길인생을 걷는 검법이다. 이와 동시에 소오강호에 나타나는 최고 무공 역시 상징성이 있다. 규화보전, 우리말로 해바라기 권법이다. 이 권법은 거세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 자신의 중심을 버리고 세속을 따라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딸랑거리며 아부를 해야 먹고사는 세상에 대한 무공적 상징이랄까. 세상에서 규화보전을 닦는 사람은 많지만, 독고구검을 닦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무공에 인생에 대한 관찰을 결합한 것은 시적 표현과 비슷하다. 소시적 무협영화에서 중국 협객들이 읊는 시구절이 좀 더 후까시 있게 보인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일까.

   무공에 철리적 부분을 담은 것은, 와호장룡을 들 수도 있겠다. 와호장룡에서 이모백의 검법은 현빈검법이며, 현빈은 노자에서 나온 말법이다. 물론 난 영화로 밖에 보지 못했지만. 마지막에 짱쯔이가 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 역시 일종의 도가적 표현인것 같다. 노자에 곡신불사라고 했던가. 이 영화에서 나는 강호라는 것에 대한 이안 감독의 정의를 어렴풋 하게 느꼈다고 해야할까.

   무협영화에서 나는 호금전의 협녀를 최고로 꼽고, 그다음이 소오강호다. 사실 협녀를 보기 전에는 소오강호를 최고로 쳤지만, 협녀를 보고난 다음에는 소오강호는 버렸다. 소오강호에 호금전도 참여를 했지만 서극과의 불화로 중도하차했다. 호금전의 영화에 비하면 서극의 장점은 오로지 우뤠매 특수촬영 이다. 소오강호를 꼽은 것은 순전히 소설 때문이다. 이후 장예모 감독의 영웅도 봤지만 이 감독 중국제도권에 들어가더니 중국만세를 부르기에 시간이 모자란다. 게다가 이후에 나오는 영화란 무협영화로 치부하기 힘들다. 그의 영웅이라는 영화는 형가를 모욕하는 영화다. 협객에게 협이라는 의미는 중화를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인데도 불구하고, "천하"라는 중화주의 속에 매몰되어 사라졌다. 영상미는 협을 표현할 수 없다. 이후 나타난 황후화, 십면매복 등등은 무협이라는 글자를 놓고 볼 때 모두 국적불명의 쓰레기다. 이후 그가 가장 뛰어난 점을 보인 부분은 올림픽 개막식이랄까. 요즘은 삼창박안경기라는 쓰레기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다.

   고전 무협은 원수갚기가 주된 골자다. 봉건 사상의 향연이 바로 고전 무협의 스토리 라인이었고, 이후 발전된 것이 애정이 가미된 무협이다. 하지만 소오강호는 탈속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점은 협녀의 바탕이 중국의 선종에 있는 부분과 쌍벽을 이룬다. 영역 역시 touch of zen이었다. 비록 엔딩이 부실한 김용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연성결의 엔딩과 설산비호의 엔딩이 그런데로 괜찮았던것 같다. 더불어 욕은 들어먹지만 원앙도와 월녀검도 괜찮았던것 같다. 사실 김용의 장편은 엔딩이 좃같다. 천룡팔부는 예외지만. 하지만 천룡팔부는 중간 부분 아자라는 여자애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좃같아지고, 고전적 원수갚기의 근원이 일개 여인의 질투에서 비롯되었다는 3류 저질 소설적 스토리라인이 결정적 애라다.

   그래서 나는 장편에서는 소오강호를 꼽고, 단편으로는 연성결과 설산비호를 꼽는다. 이 세작품에서 나는 연성결을 좋아한다. 물론 이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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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1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굴오굴 2010-03-1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린다" 이 문장 죽인다! 나도 10년 걸릴 복수갚기를 준비해야지.
 
이웃집 김형탁 - 어느 활동가의 삶과 동네 이야기
김형탁 지음, 서미현 엮음 / 레디앙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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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나름 정치인을 인터뷰해 쓴 전기지만 표지에 사람 얼굴이 없어서 좋았다. 나무 한그루 덜렁 그려놓았지만, 그래서인지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사실 사람 얼굴 그려진 책은 좀 부담스럽다. 만일 재미없더라도 미안해서 라면 받침대로도 사용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첫번째 연대기랄까, 연보랄까... 느낌은 누구누구 댁 운동권 아들네미의 비밀스런 삶의 이야기 같았다. 연애를 언제 했는지, 짱돌 컴플렉스가 언제 생겼는지 등등의 간략하면서도 사실적인 글이었지만 서정적 느낌이 풍겼다. 간략하지만 풍성하달까. 개인적으로 술 먹으면서 누군가 이 '그 인간 그랬다는데. ㅋㅋ'라는 식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었다.

   이 책은 운동권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내 짧다면 짧은 일생 동안 정치적 입장을 견지한 적도 없고, 운동권의 삶에 대하여 재미있고 상세하게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학교 다닐 때 선배가 짱돌 던지는 데 보조역할을 한 것이 다라면 다다. 그 때가 대학교 1학년 때던가? 그 당시 뭣 때문에 학교 문 앞에 가 있었는지도 기억 안 난다. 하여간 분명한 것은 그 당시 나는 장마가 그친 후 파릇파릇한 풀 냄새가 물씬 풍기는 화창한 초여름 오후의 교정에서 학교 정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문 밖으로 햇빛에 반짝반짝거리는 까맣고 동글동글한 하이바를 쓴 검은색 제복의 전경들이 소복하게 모여 있었다. 마치 스타워즈 다스베이더의 제국군 같다는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어쭈 한 150명 정도 되네. 짜식들."

   부대 병력을 가늠하는 능력을 나에게 자랑하듯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과 선배였다. 하, 이 선배 언제 내 옆에 나타났지? 이 선배는 자신이 수방사를 나온 것을 늘 자부하고 다녔다. 쪽수를 헤아리는 것도 수방사에서 배운 건가?

   "어케 알아요?"
   "(피식) 군대를 좀 그런 데 갔다왔거든."

   역시. 하지만 나는 방법을 물었으나, 알면 다친다는 식의 대답 때문에 존경의 느낌은 쉽게 사라졌고 입가에 맴도는 웃음을 발견한 나는 '시발'이라고 중얼거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 선배는 무섭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렇게 말했다.

   "너 짱돌 들고 내 옆에 좀 있어라."
   "네."

   생각할 시간도 없이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나와 선배는 학교 학생회에서 짱돌을 분배받은 다음, 선봉대라 불리는 붉은 두건 일지매들과 떨어져서 학교 담장 아래로 샤샤샥 붙었다. 나도 뒤질세라 샤샤샥 따라 붙었다. 선배는 독립적 행동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최루탄은 저쪽에서 터지고 우리는 안전했다. 선배는 마치 <히트>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발 킬머처럼 머리를 살짝 올려서 자신의 타겟을 확인하고는 다시 담장 아래로 몸을 숨겼다.

   "돌"
 
   얼른 돌을 챙겨 주었다. 선배는 다시 200원짜리 두더지 잡기 게임기의 두더지 마냥 머리를 쏘옥 내밀고는 돌을 휙 던졌다가 다시 내려왔다.

   "앗, 빗나갔다."
   '!!!'

   이러기를 여러 차례, 공급받았던 돌이 다 떨어졌다.

   "니 돌 좀 구해와라."
   "..."

   나는 화단의 나무 밑 주변의 돌을 찾으러 허리를 굽히고 빌빌 돌아다니면서, 주섬주섬 챙겨서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돌에 문제가 있는지 이렇게 말했다.

   "너무 크다."
   "..."

   이러기를 몇 차례 반복한 후 선배에게 말했다.

   "저 수업 있는데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선배가 뭐라 했는지 기억에 없다. 다만 뒤돌아오는 길에 뒤통수가 조금 따끔거렸던가?

   하여간 이게 내 운동권의 역사다. 그래서 이 책에 있는 삶의 문제와 연계된 고민들과 사실들에 대하여 이해 지수가 높지 않다. 그저 곁에서 지나치면서 스윽 바라보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글을 읽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타나는 담담한 사실 속에 묻어 나오는 파스텔화의 느낌들은 주인공에게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주었다. 아,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거기에서 이런 일을 했었구나 하는.

   개인적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전기 혹은 행장은 쓰기가 힘들고 쓸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아마도 글의 진실성에 관한 문제인 것 같다. 정확한 중립의 입장에서 글을 쓰기도 힘들거니와 그렇다 한들 사람들의 시각 속에서 편향된 모습으로 굴절되기 쉽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주인공에 대한 시각은 칭찬도 비판도 없다. 이 사람이 거기서 무엇을 하였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가 간략하고 담담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무언가 초름한 서정적 느낌을 받는다.

   이 글의 주인공은 무모하다면 무모한 인간이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을 굳이 한다고 고집부리고, 게다가 말려도 듣지 않는 고집스러운 성격이 보였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자신의 주관을 견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하면 출세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사실을 이 책의 주인공은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자기 기억력이 나쁜가 하고 주인공이 자책하는 말이 서문에 인용돼 있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보통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보면 자신에게 불리하건 억울하건 잘하건 못했건 다 잊어먹는 사람인가... 그래서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철학을 주장하는 대신 행동이 앞서는 것 같다. 과거와 미래보다는 현재와 사는 사람인가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신에게 떳떳해지자면 집에 미안하다. 자신보다 큰 집단을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이라고 하지만, 적어도 가족들에 대해서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도연명이 공무원 때려치우고 집에 오면서 흥얼거렸던 '귀거래사'는 가족들에게 있어서는 경제력을 포기한 가장이 부르는 무시무시한 장송곡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귀거래사는 중국문학의 불세출의 거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상이 사라진 사회에서 한 길을 또박또박 걷고 있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사람이 주변에 적어도 하나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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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로 2010-03-13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뽕주님의 글을 읽고 나니 이 책의 1부 '살아온 이야기'가 조선 시대 선비들의 <행장>과 스타일상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군더더기 없이 한 인물의 언행과 행적을 담담하게 옮겨놓았다는 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