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경집전 -상 ㅣ 동양고전국역총서 6
성백효 / 전통문화연구회 / 1998년 3월
평점 :
실제로 서경이라는 단어는 나중에 생겼다. 唐代까지 《尚書》라는 명칭이 사용되다가 宋代에 이르러 《書》 혹은 《書經》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宋·元 시기의 정식 문건에는 《書經》이라고 명명하지 않았다. 蔡沈의 《書經集傳》의 정식 명칭은 《書集傳》이었고, 누가 ‘經’字를 첨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明代에도 胡廣이 《五經大全》 가운데 《書傳大全》 10권을 만들었으나 “傳”이라고 하였지 《書經》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書傳》이라는 명칭 대신 《書經》이라는 명칭을 明代의 학자들이 빈번하게 사용하였고, 淸代에 비로소 국가에서 편찬한 《尚書》관련 저작에 《書經》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걸 통해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이렇게 불렸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梁啓超의 《中國近三百年學術史》의 〈辨僞書〉 조목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어떠한 학문을 하든지 간에, 모두 진위를 분별하는 것을 반드시 기본적인 작업으로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근거한 자료가 허위자료일 경우에는, 연구를 통해 이루어낸 성과 또한 이에 따라 허위적 결론이 되기 때문에, 연구에 쏟은 노력 또한 헛된 것이 될 뿐이다. 중국의 전통적 학문은 열에 아홉이 고적을 통한 학문이었는데, 중국의 위서 또한 대단히 많았다. 그래서 위서를 변별하는 것은 전통 학문을 정리하는 것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인 것이다.(無論做哪門學文, 总需以别伪求真为基本工作. 因为所凭借的资料若虚伪, 则研究出来的结果当然也随而虚伪, 研究的工作便算白费了. 中国旧学, 十有九是书本上学问, 而中国伪书又极多, 所以辨伪书为整理旧学里头很重要的一件事.)
어떠한 학문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은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의 추구를 위해 거짓을 걸러내는 변위라는 방편이 필수적으로 생겨나게 되는데, 중국의 전통적 학문은 대체로 전해지는 전적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위서의 변별은 전통 학문을 배우는 가장 기본적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학의 경전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주는 절대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전에 대한 의심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일종의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의 교리와 같은 믿음을 심어 주었다. 더욱이 경학에 부여된 신비주의적 성격은 경전에 대한 맹신을 한층 더 강화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전의 전수가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라는 곳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에 스승의 학설을 따르는 것이 일종의 법으로 형성되었는데, 이것은 곧 스승의 가르침을 전승하는 집단이라는 형식으로 고착화 되었고, 이러한 법칙은 스승의 범위를 벗어나거나 약점을 옹호해야만 하는 묵수의 체제로 돌입힌다.당대의 《오경정의》는 묵수체제의 정수다.
송대에 이르러 이러한 경전에 대한 의심이 발생한 것은 학술의 새로운 진보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기존의 학술체제를 완전히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대의 학자들은 宋·元·明 삼대의 사상과 학술을 宋學이라는 특별한 명칭으로 분류했다. 그 경계를 나눈 것은 “한대의 유자들은 훈고의 학설만을 말하였고, 송대의 유자들은 의리만을 말하였다.”(漢儒專言訓詁, 宋儒專言義理.)라는 것이었다. 《四庫全書總目·經部總敍》에서는 송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洛學(二程)과 閩學(朱子)이 연이어 흥기하여 도학을 크게 선창하여, 한당의 경학을 무너뜨리고, 오로지 의리를 연구하였다. 이들은 경사의 구설을 모두 믿을 수 없다고 배척하였으며, 그 학문은 시비를 구분하는 것에 힘썼는데, 그 폐단은 독단적인 의리로 함부로 판단하는 사나움에 있다.(洛·閩繼起, 道學大昌, 擺落漢唐, 獨研義理. 凡經師舊說, 俱排斥以爲不足信, 其學務別是非, 及其弊也悍.)
송학은 의리를 시금석으로 삼아서 진리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변위라는 방법도 도학적 의리를 구하는문제였다. 이 가운데 경전에 대한 회의는 곧 경학 전통 자체에 대한 의리적 회의이며 반성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尚書·大禹謨》의 人心과 道心에 대한 논의는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하였다. 漢唐注疏의 결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공영달이 주편한 《상서정의》에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인심이 위태로우면 편안하기 어렵고, 은미하면 밝히기 어렵다. 그러므로 精一이라는 것으로 경계한 것이며 그 中을 굳게 잡아야 한다.(危則難安, 微則難明, 故戒以精一, 信執其中.)
하지만 이 구절은 송대에 이르러 전혀 다른 해석을 낳았다. 채심의 《서집전》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놓았다.
心은 사람의 지각이며 마음자리에서 주관하여 밖으로 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形氣로 나타난 것을 人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義理에 나타나는 것을 道心이라고 한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私心이 들어서 공정하기 어려우므로 위태롭다고 한 것이다. 道心은 밝기가 어려워 쉽게 어두워지므로 은미하다고 하는 것이다.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形氣의 사사로움이 섞이지 않도록 하여 한결 같이 지켜서, 義理의 공정함만을 순수하게 지킨다면, 道心은 늘 마음의 주인이 되고 人心은 道心으로부터 명령을 듣게 된다. 그런 위태한 것이 안정되고 미세한 것이 드러나서 저절로 動靜과 云爲에 과불급의 차이가 없게 되어서 진실로 그 마음자리를 잡을 수 있다. ……, 고대의 성인이 장차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 주려 할 때에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함께 전해주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것이 경전에 드러나는 것이 이와 같다.(心者人之知覺, 主於中而應於外者也. 指其發於形氣者而言, 則謂之人心. 指其發於義理者而言, 則謂之道心. 人心易私而難公, 故危. 道心難明而易昧, 故微. 惟能精以察之, 而不雜形氣之私, 一以守之, 而純乎義理之正, 道心常爲之主, 而人心聽命焉, 則危者安, 微者著, 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 而信能執其中矣. ……蓋古之聖人, 將以天下與人, 未嘗不以其治之之法, 幷而傳之, 其見於經者如此.)
그러므로 송학이 〈大禹謨〉를 해석한 “道心은 늘 마음의 주인이 되고, 人心은 道心으로부터 명령을 듣는다.”(道心常爲之主, 而人心聽命焉.)라는 것은 곧 송대 성리학적 체계인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멸한다.”(存千里, 滅人慾)이라는 구도 속에, 舜의 전수심법을 결부시켜 놓음으로써 성리학의 문제가 문헌적으로 증명되는 것이었다. 즉 “착한 본성대로 착하게 살자(存德性)”이라는 부분인 송학의 선결과제가 전통적 경전 속에 재확인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한당의 전통경학에 대한 송대 도학의 패러다임적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전통 주소에 대한 거부와 새로운 의리적 해석을 시도한 송학이 철리적 부분에 성리학이라는 학적 재구성을 이루해 놓고나자 위진 시대의 현학과 불학에 대항해서 심도깊은 형이상학적 논제를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송학의 “시비를 구분하는 것에 힘썼다.”(務別是非)라는 특성은 곧 경전 자체에 대한 의리적 변별작업을 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고문상서》에 대한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오역과 주희에서 시작된 《고문상서》에 대한 의심은 “문장이 해석하기 쉽고 글자가 쉬워서 복생의 책처럼 졸라 어렵지않다.”(文從字順, 非若伏生之書, 佶曲聱牙.)라는 매우 간단한 의리에서 비롯되었다. 주희는 오역을 극찬하면서 자신도 《고문상서》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정밀한 연구를 지속하여 《고문상서》, 孔氏의 《전》과 《상서서》, 한대의 《서서》에 대한 회의를 한 부분들이 주자어류 속에 남아있다. 송대 학술 태두가 이러한 태도를 보이자 경전에 대한 회의가 대를 이어 계속해서 발전했다. 명대의 오징은 《書纂言》에서 오역과 주희의 고문에 대한 의심을 대량으로 반영하여 금문 28편만을 해석하였다. 또한 원대의 매작은 《尚書考異》에서 《고문상서》가 여러 서적에 기록된 문구를 모아 만들었다는 것을 하나하나 증명하였는데, 그는 《尚書·大禹謨》의 구절이 《순자》에서 《도경》을 인용한 부분과 《논어》를 절충하여 놓은 것임을 문헌적 자료를 통해 증명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청대의 학술방법에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청대에 이르러 閻若璩의 《尚書古文疏證》에서 《고문상서》의 모순을 하나하나 진술하여 《고문상서》의 위작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서 학술의 패러다임이 고증학으로 변화하는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송학의 “시비를 구분하는 것에 힘썼다.”(務別是非)라는 사나움은 문제를 도출할 능력은 있었으나,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학술적 한계점이 있다. 송유들이 갖고 있던 “六經注我”라는 특징이 말해주듯 자신의 의리를 증명하기 위해 경전을 활용하였을 뿐이었기 때문에, 경전의 진위문제가 도학의 틀 속에서는 담론거리 조차 될 수 없었다는 한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채심의 이책은 송대 특징인 전해 내려오는 문물에 대한 고증이 형편없다는 한계성, 그리고 위서를 통해 성리학적 해석체계를 입증했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누군가 학술의 역사는 오독의 역사라고 했던가? 가라라고 해서 그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리지날이 사라지고 가라지랄한 세상이 바로 학술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는 세상이 아닐까. 한국 중국집에서 졸라게 달구어진 후라이펜에 뽁이고 있는 각종야채들, 이 야채들은 중국에 없는 짬뽕과 짜장면을 청요리로 둔갑시키는 재료다. 어쩌면 지금 한국의 중국집 주방 속에서 열라 춘장을 볶아대는 주방장이 바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진짜배기 학자의 모습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