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게 재밌게 나이듦 - 일용할 설렘을 찾아다니는 유쾌한 할머니들
김재환 지음, 주리 그림 / 북하우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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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3주만에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울 엄마는 어릴 적 전화번호를 적으라며 불러줄 땐 매번 못 알아듣는다고 성질을 내곤 했습니다.

‘일, 이.. 아니다 이, 일..... 아니 아니’

머리가 크기 시작한 중학교 시절부터는 그럴 때마다 동생에게 바로 수화기를 떠넘겼습니다.

왜 짜증을 내고 성을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울 엄마는 아들만 둘을 낳았습니다. 글자도 숫자도 모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성격이 더 급해집니다.

매번 전화통화 할 때 마다 하소연이거나, 성을 내는 것은 여전합니다.

“엄니, 집에 잘 도착하셨어요?”

“이이.... 어... 삼촌이 데려다줘서... 밥 먹으려고... 이이...”

숨을 헐떡이며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전하셨습니다.

“어어... 알았어요. 엄니 정신없으신가보다. 다시 전화할께요”

“내가 무슨 정신이 없어!”

갑자기 버럭하는 소리에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먼길 잘 다녀오셨는지 안부전화를 드렸다가 또 마음이 상해버렸습니다.

중년이 다되어도 여전히 억울하기만 합니다.

‘아, 울 엄니랑 나는 사주가 상극인가보다. 그만하자.’

이어서 30분이 넘게 시어머니의 하소연을 듣는 아내에게 미안해집니다.

별말없이 전화기를 들고 있던 아내가 전화를 끊고 이야기합니다.

“여자는 그냥 잘 들어주면 되는거야...“

이 책을 읽고 3주만에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이번 추석에는 코로나도 그렇고 못 올라가요. 죄송해요. 엄니 생신 때 애들 데리고 올라갈께요.”

아이들에게도 수화기를 넘겼습니다.




김재환 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가시나들’을 찍으며 할머니들의 일상을 글로 옮겼습니다.

마을회관에서 화투로 소일하던 할머니들이 여든이 넘어 마을에 생긴 문해학교(한글학교)를 다니며 외로움을 치우고 설렘을 가지기 시작하며 변화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어릴 때부터 고생만 하던 할마이들이 사투리로 적어놓은 시도 가슴을 저릿하게 합니다.

주리작가의 그림은 슬프도록 아름답습니다.

마지막 그림 금분할머님의 에피소드와 그림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엄마, 금분이가 엄마 보고 싶어요.”

할머니는 배꽃 사이 엄마 무덤을 쓰다듬으며 한참을 울었습니다.

슬픈데,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마음이 진정되자 엄마에게 술 한잔 부어드리고

나머지는 할머니가 천천히 다 마시네요.

종이컵으로 소주 드시는 모습이 평안해 보이더군요.

“구십이 넘어도 엄마밖에 없다. 자빠져도 엄마, 엎어져도 엄마다

옛날에 엄마도 엄마 엄마가 마이 보고 싶었을 기다.“



 
 

그날 이후 삶의 관점이 조금 바뀌었어요. 내가 너무 의미 과잉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돌아보게 됐거든요. 놀이는 참여해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지 분석해서 의미를 찾을 대상이 아니었던 거죠. 다른 사람들의 재미를 내가 생각하는 의미의 필터로 바라보지 말아야지, 생각했습니다.

예전에는 ‘재미있게 살고 의미 있게 죽자’라는 생각으로 살았다면 할머니들과 몇 년을 보낸 후에는 바뀌었어요. ‘재미있는 게 의미있는 거다’로.

‘가시나’는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의 줄임말이라지요.

그럼에도 할머니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오래전 가졌던 자신의 꿈을 붙잡았어요. 죽기 전에 아들의 이름만은 내 손으로 써보고 싶어서,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서울 딸 집에 혼자 찾아가보고 싶어서, 글을 알아야 맡을 수 있는 부녀회장에 출마하고 싶어서, 노래방에서 제목을 보고 선곡하고 싶어서, 초등학교 졸업장만은 갖고 싶어서, 증손녀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싶어서.... 저마다 가슴 속에 눈물이 사연들을 품고 마침내 연필을 들었습니다.

『백년을 살아보니』의 저자 김형석 교수님도 그러시더군요. (중략)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어떻게 고독을 이길 수 있는지 여쭤봤더니 움츠러든 삶의 공간을 넓혀야 하고 나이 들어서도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외로움을 없애려는 발버둥 대신, 설렘을 공급하는 데 집중하라는 조언입니다.

신경과 전문의 이은아 박사는 치매에 걸려도 잘 살 수 있는 언어 습관을 젊을 때부터 길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해마다 망가지는 게 치매고, 해마 옆에는 감정 기억을 담당하는 편도체가 있는데요. 아무 준비 없이 치매에 걸리게 되면 나쁜 기억에 사로잡혀 계속 화내고 욕하고 거부하게 돼 주위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가능성이 높다고 해요. (중략) 이은아 박사는 “밥은 먹었니?”, “참 예쁘다”, “참 맛있다”, “정말 고마워”같은, 짧고 강력하게 상대방의 마음에 닿는 긍정적인 말들을 반복해서 뇌 안에 깊이 심어둬야 한다고 권합니다. 오래둬도 상하지 않는 장아찌처럼 말이죠. 그래야 치매에 걸려도 뇌에 뿌리내린 긍정의 언어들이 가족들을 힘들게 하지 않고요. 결국 돌봄도 잘 받을 수 있다는 거에요.

글자를 아니까 사는 게 더 재밌어졌다며 웃으셨는데 치매는 야속하게 할머니의 문자 기억부터 앗아가버렸습니다. 인생이란 게 이런 거겠죠.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좋아하시는 그 노래처럼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은 오래 머물러 주지 않나 봅니다. 너무 화려해서 슬픈 봄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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