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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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 충동구매하고 오래 잊었던 책을 석 달 만엔가 꺼내 읽었었다. 작가가 10년 전쯤 발표한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처럼, 안정된 일상의 균열을 거짓으로 덮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시 펼쳐진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그 덮음이 더 적극적, 지능적으로 자행된다. 모든 변수에 대비하며 완벽하게 외동딸을 키운 여고생의 엄마가 예정에 없었던 미숙아 손녀를 외면해 죽음의 문턱에 몰고 가거나(아무것도 아닌 것), 평범하게 결혼한 중산층 주부가 자신이 십여 년 전 질투했던 어린 여자 후배를 학부모-보조교사의 관계로 만나 위기의 순간에 외면하는 식이다(안나).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는 손녀의 생사 결정을, 젊은 외할머니는 외동딸의 정상적인 생활만을 바라보며 기약 없이 미루고 뭉갠다. 우여곡절 끝에 헐값으로 내집 마련에 성공한 젊은 주부는, 이상하게 싸게 나온 집의 충격적인 비밀을 알고도 결정을 무를 수 없다(서랍 속의 집). 가정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려는 여인들의 억지스러운 선택은, 미세하게 안 맞는 유리 뚜껑을 달궈진 프라이팬 입구에 얹는 것과 같다. 원제가 '뚜껑'이었던 '아무것도 아닌 것'의 미숙아의 젊은 친할머니가 그랬듯이.


그런 까닭에, 이 소설들은 각자 완결된 단편임에도 불길하게 열린 결말을 취하며, 독립된 작품이라기보다 스릴러 장편 소설의 발단 같은 느낌을 준다. 이름 없는 아기는 병원에서 곧 죽음을 맞을 것이다. 젊은 할머니는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오기 전에 딸을 등교시키고 병원 일을 처리하겠지만, 어쩌면 아기에 관한 이야기는 병원의 괴소문으로 떠돌다 귀 밝은 기자의 손에 들어가 스캔들로 비화될지도 모른다. '경'의 어린 아들은 자기를 영어 유치원에 밀어넣은 극성 엄마 대신 엄마의 사랑을 베풀어준 '애나'(안나)에 대한 그리움을 잠자리에서 고백하지만, 안나를 얕잡아보던 '경'은 침실 불을 끄며 아들의 말문을 막는다. 막장 드라마에 익숙한 독자라면 막연하게나마 '10년 후 안나의 복수극' 같은 후편을 상상해 봄직도 하다.


불길한 열린 결말, 또는 파국의 발단은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빼앗긴 소설 속 자녀들에게서도 잉태될 수 있겠다. 준비 없이 생겨서 감출 수 있을 때까지 감추려다 일찍 낳아버린 아이를 키우겠다고 떼를 쓰던 고교생 커플은 정상적이고 규칙적인 일상으로 등 떠밀려 돌아갔다. 극성 엄마와 주재원 아빠를 따라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던 리에는 둘만 통하는 언어로 대화하던 친구 메이를 잃고(내내, 여름), 영어 유치원의 어린이는 맘 붙이며 따르던 '애나' 선생님과 영문도 모른 채 헤어졌다(안나). 정유정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자식 차별의 피해자들만큼 극단적 노골적 폭력을 당한 건 아니지만, '내리사랑'을 빙자한 상냥한 폭력은 '뭘 모른다'고 간주되는 아이들에게 무심히 던져진다.


그러나, 아이들이 당한 폭력이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낮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못한 어두운 비밀, 공감받지 못한 상처가 파국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우리는 숱한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에서 익숙하게 접해 왔다. 그러나 이 소설집에서는, 상처받은 내면을 독백하는(내내, 여름) 것조차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다. 아귀가 맞지 않는 뚜껑을 어거지로 이고 덮으며 별 일 없이 사는 부모들을 따라 자식들도 그렇게 살 수도 있다. 차라리 그 편이 소설가에게는 현실을 더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은 파국조차 되지 못하는 건조한 비극의 집합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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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 -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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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 지리학자의 2007년 저서인데 2018년말에 구입한 책의 판권은 무려 17쇄를 가리키고 있다. 나 역시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가 저자의 통찰과 연구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기어이 내 책으로 사고야 말았으니, 한국인의 아파트 사랑을 넘어선 숭배는 지금도 더하면 더했지 사그라들지 않을 현상인 까닭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시작된 연구는 2000년대 중반에 마무리되어, 1960년대에 시작된 아파트 단지 개발, 아파트 입성에 성공한 중산층 이상 주민들의 선민의식과 단독-연립주택 주민들의 선망, 서구와 현대의 상징인 아파트에도 독특하게 스며 있는 한국 전통가옥의 생활방식, 오래된 것들에 대한 애착 없이 새롭고 비싼 것에 우르르 몰리는 한국 도시인들의 습성 등을 알뜰히 훑는다. 장기간의 통계 수집과 정리는 물론, 언어와 문화 장벽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장기간 거주하며 주거유형별 주민들을 심층 인터뷰한 '불란서 학생'의 끈기도 존경스럽다. 


한마디로 "유럽에서는 서민과 빈민들의 불량주거지 취급을 받는 아파트가 한국에서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 되는 기이한 현실"에 대한 외부인의 객관화된 분석인 셈이다. 그런데 책이 완결되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책에서 언급되었던 '싹수' 현상들 중에는 오늘날 쑥쑥 자라 사회 문제의 일종으로 불거진 것들도 있어 눈길을 끈다. 이를테면 "아파트 입주민들은 경비인력을 하인처럼 여기"는 현상은 오늘날 입주자 갑질과 폭력, 최저임금 인상 때마다 시도되는 인력 감축, 이제는 아파트 입주민들의 필수적인 생활편의 담당자가 된 택배/배달 기사들에 대한 물리적 격리 등으로 가시화됐다. 아파트 주민들의 선민의식은 건설사의 브랜드 네이밍, 아파트 면적 또는 영구임대 여부에 따른 학생들 간의 차별로 발전했다. 


이 책의 발행 이후 새로 나타난 현상으로는, 아파트 입주민들의 집단행동, 입주민들을 점점 더 격리하는 식으로 발전 중인 시설 설계, 수도권 1기 신도시의 노후화,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비롯한 노후 단지의 재건축 논란, 무리한 투자로 말미암은 임대인-임차인 간 갈등을 들 수 있다. 이 새로운 사태들의 싹을 이 책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저자의 연구 당시와 현재의 시간적 간극을 실감케 하는 책이지만, <아파트 공화국>은 발행 10년이 지나서도 꾸준히 읽힐 만큼 아파트 현상의 맥락을 꼼꼼히 짚은 책이다. 가능하다면 10여 년의 변화들을 업데이트할 필요성도 있겠지만, 오늘날 아파트 현상에 대한 통찰이 궁금하다면 아파트 생활을 다룬 근래의 뉴스 보도, 영화, 드라마들을 참고해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연구자는 결론에서 마을을 부수고 아파트를 짓는 서울을 위시한 대도시를 "하루살이 도시"라 평했지만, 아파트를 부수고 새 아파트를 짓는 지금의 대한민국 대도시들은 연구자가 하루살이라 부르는 현상이 일상이고 역사가 된 형국이다. 그저 끝없는 변화가 본질이 된 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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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없는 삶 - 불안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졌다
필 주커먼 지음, 박윤정 옮김 / 판미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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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기관의 녹을 먹고 사는 직업 특성상 종교와 관련된 책 정보를 주의깊게 보곤 한다. 그러던 중 올해 종교 출판물에서 드러나는 확연한 주제가 '탈종교'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개신교계의 용어로 굳어진 '가나안 성도'([교회에] '안 나가'를 거꾸로 한 은어) 현상 분석은 이미 몇 년 된 주제이고, 올해 출판물 중에서 눈에 띈 제목은 이 '종교 없는 삶'과 '세속성자' 등이었다.

저자가 사는 나라인 미국은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어느 종교든지 개인의 믿음과 공동체 생활로써 유지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종교 없음이 때로는 배척과 심지어 저주의 사유가 된다는 설명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이 책은 종교생활이 일상에 깊이 스며든 나라에서 종교 없이 살아가는 삶의 어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쓴다면 얻을 수 있는 대안적 가능성을 설명한다.

저자의 주장과 분석 중에는 '종교적인 나라가 오히려 덜 민주적이고 인권을 덜 존중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를테면 필리핀과 중남미 가톨릭 국가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 나라들의 부조리가 (예컨대 현세의 고통에 저항하기보다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종교 때문인지, 오랜 식민 지배의 영향과 저개발과 지구적 착취 구조 때문인지는 검증되지 않는다. 종교가 정말 인민의 아편으로 작용한다는 논증이 있다면 저자의 주장을 수긍할 만하지만, 그런 논증의 진위 여부는 이 책에서는 관심 밖이다. 요는 개인의 선의와 개인들의 건전한 연대가 있다면 종교 없이도 공동선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므로.

종교 있음이 당연한 미국에서 일어나는 탈종교 현상 묘사는 흥미롭지만, 인구의 다수가 무종교인인 한국에서 읽기에는 신선한 내용은 아니다. 다만, 최근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종교적 현상, 곧 종교 수행에서 목적과 형태는 빌려왔으되 종교색은 의식적으로 배제한 수행 프로그램들이 호응을 얻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책에서 말하는 종교를 떠난 미국인들의 자아 초월 체험이라든지 결국은 종교를 모방해 가는 실천들은 읽고 기억해 둘 만하다. 무종교 한국인들의 수행도 그 목적은 탈종교 미국인들의 자아실현 추구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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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사회
문윤성 지음 / 아작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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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완전사회>가 발표 51년 만에, 작가 사후 18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발표된 해는 1967년, 지속되는 냉전과 강대국들의 군비 경쟁 속에 ‘다시 전쟁은 안 된다’는 국제사회 지도자들의 절박한 호소가 퍼져 가던 시절이다. 답답하고 아슬아슬한 시절이 얼른 지나가 어떻게든 일단락되기를 바랐던 걸까. 작가는 아마도 작품 집필 당시였을 1966년생 주인공을 1993년 세기말의 배경으로 보낸 것도 모자라, 본격적인 이야기의 배경을 22세기 중엽으로 과감하게 넘겨버린다.

상상 속에서나마 눈부시게 발전한 의학, 생물학 기술에 힘입어 주인공을 상처 하나 없이 22세기로 쏘아 보내면서, 작가는 그 동안에 변화된 인류 역사-를 빙자한 작가의 미래 예측-을 치밀한 설계도와 다부진 글발로 풀어놓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공을 혼돈에 빠뜨릴 만큼 격렬한 세계의 변동을 일으킨 제3, 4, 5차 세계대전에서 핵심 갈등 요인이 등장하는 순서가, 적어도 20세기 중엽 이후를 살아온 사람들이 아는 바와 거의 일치한다. 특히 2018년 중엽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4차 세계대전의 비극, 22세기 세상의 기이한 여인천하 풍경을 낳은 5차 세계대전의 갈등은 오늘 우리 사회가 겪는 혼란을 내다보고 쓴 듯한 느낌마저 준다. 20세기의 주인공을 봉인한 기밀실이 22세기의 어느 날 열렸듯이, 50년 전에 잠깐 열렸다가 봉인된 예언서가 때를 만나 펼쳐진 듯하다.

상상이라기보다 예언에 가까운 설정들은 어디서 왔는가. 두말할 것 없이, 20세기의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의 입으로 발화되는 1960년대 중반의 시대상에서다. 1966년생으로 되어 있으니 지금 돌아보면 X세대에 해당하는 인물이지만, 1966년에 창조된 우리의 주인공은 당대의 미니스커트 논쟁을 예로 들어 여성들의 자의식과 육체미 추구에 대한 비판을 발설하기도 한다. 소설에서는 자의식 충만한 여성들이 기어이 남성들을 말살하고 여인천하를 만들고 임신과 출산 대신 무성생육 생명생산 시스템을 만들었다 한다. 주인공이 대변하는 작가의 관점은 지금 보면 고루하고 보수적인 인상이지만, 당대 소설이었던 김승옥의 <강변부인>이나 이후 영화계를 휩쓴 여성들의 험난한 자유연애담에서처럼, 작가는 미니스커트로 대변되는 여성들의 자의식 추구에서 전통적 젠더 질서가 흔들리고 무너질 조짐을 봤던 모양이다.

22세기 여인천하는 인간 개개인의 차이점과 갈등요인을 억압하고 제거해 온 결과물로 묘사된다. 주목할 점은, 온 인류가 ‘진성’이라 불리는 여성으로 통일되고 국경이 완전 폐지된 뒤에도 공권력은 겉보기에 완벽한 평화를 고수하기 위해 개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물리적 접촉을 통제한다는 설정이다. 그 결과, 불온하지만 본질을 건드리는 상상력의 산물인 예술작품은 모두가 외면하는 대상이 되어버렸고, 여인천하의 인간들은 감정 없는 목석처럼 되어버리거나 스스로 목석이 되기를 택한다. 쫓겨난 남성들이 어딘가의 정상 사회에서 지구를 향해 음악소리를 흘려 보낸다는 설정은 그런 까닭에 의미심장하다.

사회에 대한 통찰 말고도 흡사 예언이 된 설정들은 허다하다.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쓴 작품임에도, 소설에 묘사된 자동화된 생활편의시설과 통신시설의 작동 양상은 태블릿 PC, 영상통화, CCTV, 사물인터넷 등과 흡사하다. 생활의 불편은 필요를 낳고, 필요는 상상을 낳고, 상상은 기술 개발로 이어져 현실이 되는가 보다. Science Fiction 창작자와 scientist는 본디 한 부류의 인간인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지구의 살아 있는 조상이며 유일한 남성인 우리의 주인공은 여인천하의 획일주의와 폐쇄성에 작은 균열을 낸 뒤, 다양성이 되살아나는 세상을 위한 제2의 모험을 결심한다. 이야기는 이 위대한 결단의 순간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시선에서 마무리되는데, 그 관찰자의 시선이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관찰자가 궁금해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해석하기에 따라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의미는 사뭇 달라질 것 같은데, 그 단서를 줄 소설가는 세상을 뜬 지 오래이니 주인공의 마음속 비밀도 영원히 봉인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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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운 전집
한하운 지음, 인천문화재단 한하운 전집 편집위원회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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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한하운에 대한 기억은 국어 교과서의 시 한두 편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대표작 ‘파랑새’를 두고 한센병 환자여서 갇혀 지내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자유에 대한 갈망을 노래한 작품이라고 (배웠었다고) 기억할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학생이었었다. 학교 다니기를 그만둔 지 십수 년이 넘은 지금, 나는 가끔 모자란 교양을 두꺼운 비문학 서적 읽기 또는 이름난 작가의 전집으로 보충함으로써 있어 보이기를 원하는 일반인이 되었다. 그 일반인의 인터넷 서점 구경 중에 목격된 상품이 이 책이다.


이 책을 사서 읽은 데는 다른 계기도 있었다. 2016년, 업무 관계로 소록도에 1박 2일 방문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소록도 천사 마리안느 할매도 만나고, 소록도의 유지라고 할 수 있는 성당 주임신부님의 배려로 이목구비와 손발이 뭉툭해진 음성 한센 환우들과도 만났다. 그 기억이 강렬했던 까닭에, 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전집에도 눈길이 가 닿았던 것이다.


시 두어 편으로 알던 시인의 전집을 독파했을 때, 나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내가 생각지도 못했음을 깨달았다. 대표작이 교과서에 실릴 정도면 그 기저에 얼마나 수다하고 검증된 작품들이 있었을 것이며, 자유로운 삶을 향한 애통한 절규의 시를 쓸 정도면 얼마나 답답하고 북받치는 부자유와 억압이 있었을 것인가. 또한 부끄럽게도 내가 상상도 못했던 뜻밖의 사실들. 한하운은 무려 유학까지 가서 수의학을 공부한 인텔리 청년이었고, 발병해서는 주변인들의 외면과 풍찬노숙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한센인 정착촌에 몸붙인 뒤에는 한센인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질병도 빈부 계급을 가려서 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는, 인텔리도 한센병에 걸리고 거지 신세가 될 가능성, 흉측한 문둥이도 뜨겁게 사랑할 가능성, 비참한 문둥이 거지도 자신과 동지들의 존엄을 지키려 일어설 가능성 같은 건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인생사를, 우리가 시인으로만 알고 있던 한하운은 절실한 의지 위에 탄탄한 문장력과 명철한 지성으로 써서 남겼다. 웬만한 장편소설 못지않게 드라마틱하고 견고하게 짜인 수기를 읽고 나니, 그가 남긴 시들은 문둥이의 육신을 외면하고 저주하느라 그 안의 인간까지 매도해 버리고 마는 무정한 세상에 대한 날선 투쟁으로 읽힌다. 


뻔한 독후감이지만,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는 한 줄로 간단히 요약되고 마는 그의 대표작 ‘파랑새’의 울림이 실은 얼마나 큰 진폭을 지닌 작품인지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한하운 전집은 시간을 내어 읽을 가치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집에 담긴 한하운의 다양한 산문들은 재밌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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