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공화국 -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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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 지리학자의 2007년 저서인데 2018년말에 구입한 책의 판권은 무려 17쇄를 가리키고 있다. 나 역시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가 저자의 통찰과 연구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기어이 내 책으로 사고야 말았으니, 한국인의 아파트 사랑을 넘어선 숭배는 지금도 더하면 더했지 사그라들지 않을 현상인 까닭이다.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시작된 연구는 2000년대 중반에 마무리되어, 1960년대에 시작된 아파트 단지 개발, 아파트 입성에 성공한 중산층 이상 주민들의 선민의식과 단독-연립주택 주민들의 선망, 서구와 현대의 상징인 아파트에도 독특하게 스며 있는 한국 전통가옥의 생활방식, 오래된 것들에 대한 애착 없이 새롭고 비싼 것에 우르르 몰리는 한국 도시인들의 습성 등을 알뜰히 훑는다. 장기간의 통계 수집과 정리는 물론, 언어와 문화 장벽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장기간 거주하며 주거유형별 주민들을 심층 인터뷰한 '불란서 학생'의 끈기도 존경스럽다. 


한마디로 "유럽에서는 서민과 빈민들의 불량주거지 취급을 받는 아파트가 한국에서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 되는 기이한 현실"에 대한 외부인의 객관화된 분석인 셈이다. 그런데 책이 완결되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책에서 언급되었던 '싹수' 현상들 중에는 오늘날 쑥쑥 자라 사회 문제의 일종으로 불거진 것들도 있어 눈길을 끈다. 이를테면 "아파트 입주민들은 경비인력을 하인처럼 여기"는 현상은 오늘날 입주자 갑질과 폭력, 최저임금 인상 때마다 시도되는 인력 감축, 이제는 아파트 입주민들의 필수적인 생활편의 담당자가 된 택배/배달 기사들에 대한 물리적 격리 등으로 가시화됐다. 아파트 주민들의 선민의식은 건설사의 브랜드 네이밍, 아파트 면적 또는 영구임대 여부에 따른 학생들 간의 차별로 발전했다. 


이 책의 발행 이후 새로 나타난 현상으로는, 아파트 입주민들의 집단행동, 입주민들을 점점 더 격리하는 식으로 발전 중인 시설 설계, 수도권 1기 신도시의 노후화,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비롯한 노후 단지의 재건축 논란, 무리한 투자로 말미암은 임대인-임차인 간 갈등을 들 수 있다. 이 새로운 사태들의 싹을 이 책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저자의 연구 당시와 현재의 시간적 간극을 실감케 하는 책이지만, <아파트 공화국>은 발행 10년이 지나서도 꾸준히 읽힐 만큼 아파트 현상의 맥락을 꼼꼼히 짚은 책이다. 가능하다면 10여 년의 변화들을 업데이트할 필요성도 있겠지만, 오늘날 아파트 현상에 대한 통찰이 궁금하다면 아파트 생활을 다룬 근래의 뉴스 보도, 영화, 드라마들을 참고해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연구자는 결론에서 마을을 부수고 아파트를 짓는 서울을 위시한 대도시를 "하루살이 도시"라 평했지만, 아파트를 부수고 새 아파트를 짓는 지금의 대한민국 대도시들은 연구자가 하루살이라 부르는 현상이 일상이고 역사가 된 형국이다. 그저 끝없는 변화가 본질이 된 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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