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사회
문윤성 지음 / 아작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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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SF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완전사회>가 발표 51년 만에, 작가 사후 18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발표된 해는 1967년, 지속되는 냉전과 강대국들의 군비 경쟁 속에 ‘다시 전쟁은 안 된다’는 국제사회 지도자들의 절박한 호소가 퍼져 가던 시절이다. 답답하고 아슬아슬한 시절이 얼른 지나가 어떻게든 일단락되기를 바랐던 걸까. 작가는 아마도 작품 집필 당시였을 1966년생 주인공을 1993년 세기말의 배경으로 보낸 것도 모자라, 본격적인 이야기의 배경을 22세기 중엽으로 과감하게 넘겨버린다.

상상 속에서나마 눈부시게 발전한 의학, 생물학 기술에 힘입어 주인공을 상처 하나 없이 22세기로 쏘아 보내면서, 작가는 그 동안에 변화된 인류 역사-를 빙자한 작가의 미래 예측-을 치밀한 설계도와 다부진 글발로 풀어놓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공을 혼돈에 빠뜨릴 만큼 격렬한 세계의 변동을 일으킨 제3, 4, 5차 세계대전에서 핵심 갈등 요인이 등장하는 순서가, 적어도 20세기 중엽 이후를 살아온 사람들이 아는 바와 거의 일치한다. 특히 2018년 중엽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4차 세계대전의 비극, 22세기 세상의 기이한 여인천하 풍경을 낳은 5차 세계대전의 갈등은 오늘 우리 사회가 겪는 혼란을 내다보고 쓴 듯한 느낌마저 준다. 20세기의 주인공을 봉인한 기밀실이 22세기의 어느 날 열렸듯이, 50년 전에 잠깐 열렸다가 봉인된 예언서가 때를 만나 펼쳐진 듯하다.

상상이라기보다 예언에 가까운 설정들은 어디서 왔는가. 두말할 것 없이, 20세기의 잠에서 깨어난 주인공의 입으로 발화되는 1960년대 중반의 시대상에서다. 1966년생으로 되어 있으니 지금 돌아보면 X세대에 해당하는 인물이지만, 1966년에 창조된 우리의 주인공은 당대의 미니스커트 논쟁을 예로 들어 여성들의 자의식과 육체미 추구에 대한 비판을 발설하기도 한다. 소설에서는 자의식 충만한 여성들이 기어이 남성들을 말살하고 여인천하를 만들고 임신과 출산 대신 무성생육 생명생산 시스템을 만들었다 한다. 주인공이 대변하는 작가의 관점은 지금 보면 고루하고 보수적인 인상이지만, 당대 소설이었던 김승옥의 <강변부인>이나 이후 영화계를 휩쓴 여성들의 험난한 자유연애담에서처럼, 작가는 미니스커트로 대변되는 여성들의 자의식 추구에서 전통적 젠더 질서가 흔들리고 무너질 조짐을 봤던 모양이다.

22세기 여인천하는 인간 개개인의 차이점과 갈등요인을 억압하고 제거해 온 결과물로 묘사된다. 주목할 점은, 온 인류가 ‘진성’이라 불리는 여성으로 통일되고 국경이 완전 폐지된 뒤에도 공권력은 겉보기에 완벽한 평화를 고수하기 위해 개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물리적 접촉을 통제한다는 설정이다. 그 결과, 불온하지만 본질을 건드리는 상상력의 산물인 예술작품은 모두가 외면하는 대상이 되어버렸고, 여인천하의 인간들은 감정 없는 목석처럼 되어버리거나 스스로 목석이 되기를 택한다. 쫓겨난 남성들이 어딘가의 정상 사회에서 지구를 향해 음악소리를 흘려 보낸다는 설정은 그런 까닭에 의미심장하다.

사회에 대한 통찰 말고도 흡사 예언이 된 설정들은 허다하다.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쓴 작품임에도, 소설에 묘사된 자동화된 생활편의시설과 통신시설의 작동 양상은 태블릿 PC, 영상통화, CCTV, 사물인터넷 등과 흡사하다. 생활의 불편은 필요를 낳고, 필요는 상상을 낳고, 상상은 기술 개발로 이어져 현실이 되는가 보다. Science Fiction 창작자와 scientist는 본디 한 부류의 인간인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지구의 살아 있는 조상이며 유일한 남성인 우리의 주인공은 여인천하의 획일주의와 폐쇄성에 작은 균열을 낸 뒤, 다양성이 되살아나는 세상을 위한 제2의 모험을 결심한다. 이야기는 이 위대한 결단의 순간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시선에서 마무리되는데, 그 관찰자의 시선이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관찰자가 궁금해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해석하기에 따라 소설이 독자에게 주는 의미는 사뭇 달라질 것 같은데, 그 단서를 줄 소설가는 세상을 뜬 지 오래이니 주인공의 마음속 비밀도 영원히 봉인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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