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1~9 완간 박스 세트 - 전9권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미생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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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신드롬은 드라마의 인기에 그치지 않는다. 원작 웹툰 다시보기로 이어지면서 콘텐츠의 선순환을 일으키고 있다. 드라마 방송 기념으로 포털에 연재됐던 특별편 5부작은 연재와 동시에 조회 수 1위를 기록했다. 1년 동안 90만 부 팔리던 만화 '미생' 단행본은 지난달 26일 100만 부 판매를 돌파했으며, 불과 한 달 만에 200만 부를 넘어섰다.

 

직장인의 교과서 <미생>이 '열풍'을 넘어 '광풍' 수준이다. 다음에서 연재된 원작 웹툰은 누적 조회 수 10억을 돌파했고, 스핀오프 특별판 5화도 업로드와 동시에 1위에 올랐다. 드라마는 원작을 잘 살렸다는 호평을 받으며 케이블채널 tvN에서 무려 6%가 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덩달아 1년 동안 90만 부가 팔리던 미생 단행본은 장그래 신드롬과 더불어 특별판, 보급판 등을 포함해 불과 한 달 만에 200만 부를 돌파했다. 일단 단행본은 웹툰의 맛이 고스란히 살아있어서 만족스럽다. 세로 스크롤을 내리는 재미에 특화된 스타일이 아니라 가로로 넘기는 책장에도 이질감이 없다. 예를 들면 움직이는 그림이나 스크롤을 내리며 긴장감을 조성하는 웹툰만의 특징이 거의 없다.

 

<미생>의 가장 큰 장점은 엄청난 현장 조사에서 뿜어져 나오는 현실성이다. 그리고 탄탄한 스토리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감과 위안이 열풍의 이유다.  썸은 있을지라도 연애는 없는 (이게 썸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은 마치 실제 업무 현장에 와있는 듯 생생하다. 그 속에서 고졸 인턴 장그래는 바둑으로 단련된 탁월한 승부사 기질을 펼치며 아직 살아있지 못한 '미생'에서 '완생'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흔한 성공 신화의 주인공처럼 엄청난 능력을 뽐내며 단숨에 성공하지 못한다. 깨지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낙담하고. 하지만 영업 3팀이란 울타리 안에서 서서히 자신만의 '바둑', 아니 자신만의 '일'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게 주된 내용이다.

 

 

대학생 때 인터넷으로 본 <미생>, 신입사원이 되어 읽은 <미생> 단행본.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읽고 난 후의 느낌이 달라지진 않았다. 다만 주인공 장그래가 온몸으로 발산하는 "짠함"이 뭔지 120% 공감했다. 신입 사원은 권리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더불어 책임도 그렇게 막중하지 않다. 그저 자연스럽게 조직에 연착륙하면서 모나지 않게 싹싹하게 일하는 게 제일이라고 느꼈다. 1년이 다 되어가는 조직 생활에서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느낌은 사실 아직까진 없다.

 그저 는 거라면 눈치와 모르는 게 나왔을 때 재빠르게 인정하거나 혹은 얼버부리는 능력 정도? 위에 컷처럼 일의 우선 순위를 보는 깜냥은 조금 늘은 것 같다. 물론 그 우선순위를 정할 때 중요도가 아니라 직급이란 변수가 더 많이 작용한다는 건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직장 생활 1년 차. 기대한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걱정한 만큼도 아니다. 다행인 건 아무리 업무가 어렵고 더러운 일이 많아도, 그 짐을 덜어줄 훌륭한 선배들을 많이 만났다는 점이다. '더할 나위 없었다. YES' 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YES" 이 정도의 일 년이었다.

 

 

정치는 정치하는 분들이 바로잡아주길 바라고, 삶을 살아가면서 내 삶을 낫게 만드는 건 우리 스스로의 일이라고 본다. 양보 없이 자신의 일을 쟁취하길 바란다"

- 윤태호 작가 인터뷰 中

흔히 90년대 우리나라 축구의 장점은 '정신력'이었다. 투혼을 강조하고 희생정신을 부르짖으며 머리가 찢어지면 붕대를 감고 뛰는 게 당연했다. 그나마 '패배하면 현해탄에 뛰어들겠다.'는 이승만 정부 시절의 외침이 미덕으로 통했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히딩크 감독이 가장 먼저 손댄 부분은 '체력'이었다. 

체력이 부족하면 기어이 짜내는 정신력은 차선책이며 반쪽짜리일 뿐이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기술, 판단력, 조직력이 극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가 그렇듯 인생도 마찬가지다. 술을 마시거나, 야근하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출근할 때도 이 모든 스트레스를 버틸 체력이 필요하다. 피곤하면 판단이 흐려지고, 지치면 쉽게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꾸준히 운동하면서 내 건강을 스스로 챙겨야 하는 법이다. 일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공한다, 어차피 일이라고 하는 것이 매번 새로운 이슈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 알고 있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만화 역시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반복적인 일에서 어떻게 스스로 새로움으로 발견해내고 유지해 나가는가, 이게 그 사람의 성공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 윤태호 작가 인터뷰 中


을 중의 을의 위치에서 갑질하는 인간들 시중을 들다 보면, 안영이 말대로 나에게 미안한 하루가 있다. 뿌듯함과 보람은 없고 그저 무의미하게 하루를 때운 느낌이 들면 한없이 허무하다. 내가 아닌 아무나 이 자리에 와도 일 처리를 할 수 있을 업무가 더 많다. 슬슬 일이 손에 익고, 빠른 길이 보이면 반복된 업무에 권태가 밀려온다. 그런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 그 권태에 짓눌려 박 과장처럼 검은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런 나른함과 지루함을 이겨내는 길도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다. 업무적으로나, (사실 업무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라 크진 않을 것 같다.) 업무 외적으로나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대체 불가능한 자원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사실 그게 쉽지는 않다. 똑같은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에서 최대한 편하게 지내고 싶은 건 진리인걸. 어쨌거나 스스로 뿌듯한 하루를 자주 맞이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도 필요하다.

 

 


"(완생은) 마치 우리 꿈처럼 지향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끝없이 미생이고 그 완생을 지향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어제보다 조금 나아지는 삶이 되기를 바라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완생이라는 것은 쟁취의 대상이 아니라 지향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 윤태호 작가 인터뷰 中


최종합격 소식을 듣고 크게 기쁘거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은 아니었다. 대학 합격 때와 마찬가지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무덤덤한 내 성격 덕분이었을까? (불확실성이 너무나 큰 취업 시즌에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 같다.) 하지만 부모님을 초청한 입사식에서는 뭉클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때는 딱 대학교 졸업식 때 느낌과 비슷했다. 언제나 행복의 기준을 남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자.' 이 마음가짐대로 입사하면서 누군가를 깔볼 이유도 없고, 움츠러들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부모님은 예외였다. 부모님께서 웃으면 나도 즐거웠고,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나도 부모님이 자랑스러웠다. <미생> 속 어머니 역시 늘 무심하고 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 장그래를 아낀다. 친척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은 밉지 않다. 나의 부모님과 무척 닮아있기 때문이다. 평생 연구복과 공장 점퍼에 익숙한 아버지는 내가 양복을 입고 본사에 출근하는 모습에 기뻐하신다. 힘들다고 징징거려도 "사명감이니깐~" 이란 말로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신다. 그리고 아버지는 세탁소에 맡긴 와이셔츠를 그냥 입어도 되는데 일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다림질하신다. 내게는 불편한 양복 더미가 누군가에게는 자긍심이고 큰 기쁨이다. 어머니도 새벽같이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시며 사과즙을 따라주신다. 어차피 나가서 사 먹으면 된다고 말해도 웬만하면 집밥을 먹으라고 권하신다. 용돈 하라고 주신 돈도 기어이 "세일이라 그냥 하나 샀다."며 겨울 양복을 사시는 분이다. 

내가 잘하면 부모님께서 칭찬받고, 내가 못하면 부모님께서 욕 듣는 거다. 나는 부모님의 자부심이다. 절대 부끄럽게 행동하지 말고, 꼿꼿하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그들의 바람이 부담감이 아니라 내겐 원동력으로 작용하니 고마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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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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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글쓰기를 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항상 남에게 보여주기 주저하고 부끄러워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끄러워했다. 내가 쓴 글을 보여주는 것은 벌거벗은 내 몸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같았으니. 일기를 써도, 독후감을 써도 늘 혼자 생각하는 점에서 그치거나, 써도 곧장 버리곤 했다. 좋아하면 잘하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글쓰기'는 마치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느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이 술술 써내려간 소설, 영감이란 놈의 도움을 받아 신 내린듯 흘러가는 수필. 내가 쓴 괴발개발 글은 다시 읽어보면 낯간지러운 수준이었다. (분명 이렇게 느낀 이유에 악필도 적잖이 한몫했다. 확실히다.) 하지만 우연히 수년 전 다이어리를 읽고 느꼈다. 김연수가 맞구나. 토할 때까지 쓰면 된다는 오직 '쓰는' 작가의 비밀이 진짜였구나.

 

"나는 축구를 했다. 골을 넣었다. 역시 재미있었다." '~다'로 끝나지 않으면 총 맞는 것도 아닌데 주야장천 짧은 문장으로 이어간 보고서 같았다. 혹은 방학 숙제 몰아서한 초등학생. 하지만 매일매일 일기를 쓰다 보니 표현도 늘고, (물론 즐겨 쓰는 표현은 질리지도 않고 등장하지만.) 분량 자체가 늘었다. 예전에는 의무감에 꾸역꾸역 빈칸을 가뜩이나 크고 못생긴 글씨로 채운 느낌인데. 지금은 일기장이 모자란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그리고 블로그를 시작한 것도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이니 마음대로 써도 괜찮겠단 게 블로그를 시작한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글씨체를 마음껏 고를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책, 영화, 공연, 음반. 내가 보고 듣고 읽은 후에 느낀 감정을 차분하게 정리하니 제법 재미가 쏠쏠했다. 어느덧 100편이 다 되어가는 영화평은 점점 체계도 갖추게 되었다. 나만의 별점, 명대사, 그리고 최근에 추가한 추천/비추천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완벽한 글을 쓸 수 없다. 그러므로 완벽한 글을 쓰기 전까지 내 글을 숨길 필요가 없다. 셰익스피어, 도스토예프스키, 피츠제럴드, 오르한 파묵 등 수백, 수천 년 전 타고난 글쟁이들도 이르지 못한 경지를 추구하기엔 내 인생은 유한하다. 마음껏 쓰고 토하고, 토하고 쓰고. 말인지 막걸리인지 모를 똥을 싸지르든, 단어와 단어 사이에 영혼이 살아 숨 쉬는 걸작을 써내려가든. 결국 쓴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고, 그 의미 속에서 재미를 느낀다면 충분하다. 그 재미를 남들이 공감한다면 그건 더욱 짜릿한 일이고. <소설가의 일>에 등장한 도식과 공식은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 <수학의 정석> 만큼이나 정형화되었지만 효과적이었다. 글쓰기만큼 돈 안 들고, 시간 잘 가는 취미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걸 확신한 만큼 쉬지 않고 또 써야겠다. 일단 펜을 잡고 노트를 펴면, 아니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즐거우니깐. 언젠가는 고통스러운 순간이 오겠지만, 그것 또한 발전했다는 증거이니 유쾌하게 받아들여야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누군가 고민할 때, 나는 무조건 해보라고 권하는 편이다. 외부의 사건이 이끄는 삶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이끄는 삶이 훨씬 더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리적 변화의 곡선을 지나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조차도 성장한다. 그러니 일단 써보자. 다리가 불탈 때까지는 써보자. 그러고 나서 계속 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자.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하고 싶다면, 일단 해보자. 해보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달라져 있을 테니까. 결과가 아니라 그 변화에 집중하는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

소설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에게 "그건 네 말도 맞아"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이건 단순히 선언적인 문제가 아니라 작법의 문제다.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이입 혹은 이해 없이 소설가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쓸 수 없다.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 세상의 갖은 방해 = 생고생(하는 이야기)



다 알고 있다시피 작가는 거짓말을 진실처럼 들리게 말하는 사람이다. 이때 ‘진실처럼‘이 들어가는 자리에 ‘핍진성 있게‘라는 말을 넣으면 된다. 소설과 비소설의 차이는 이 핍진성에 있다. 비소설에서 진실이란 실제로 벌어진 일을 뜻하지만, 소설에서 진실이란 반박할 부분이 한 곳도 없는 완벽한 이야기를 뜻한다. 물론 소설을 써보면 알겠지만, 반박할 부분이 한 곳도 없는 이야기를 쓰고 나면 실제로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거나 나중에 벌어지는 걸 확인할 때가 있다. 소설 쓰다가 신 내린 게 아니라 핍진성 있게 쓴다는 말이 워낙 그런 뜻이기 때문이다. 이 차이점을 잘 이해해야 하겠다.





내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 ‘행동한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행동한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면, 소설을 쓰는 나 역시 ‘쓴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쓴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소설 쓰기의 절정으로 올라가야만 하리라. 그러니까 먼저 소설가가 되라고 말한다면 순서가 잘못됐다. 소설가라면 플롯의 시작점이 행동이라는 걸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삶이 ‘쓰기‘에서 시작한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그러니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뭔가를 써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소설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리에 따라 먼저 뭔가를 쓰고 좌절하고 다시 쓰고 또 좌절하고 그럼에도 다시 쓰는 그 과정을 반복하다가 죽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를 통해서 좌절과 환희를 맛봤다면, 치욕이라고 왜 맛볼 수 없겠는가는 생각이 들었다. 꼭 남몰래 연애를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욕한대도 나만은 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감정이입이란 그런 것이다. 이성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그건 마치 사랑 같은 것이다. 몸으로 느껴지는 것이지, 머리로 설명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지난 일을 생각하다가 불쑥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정말이지 그건, 사랑을 잃은 느낌 같았다.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 구상하지 말자. 플롯을 짜지 말자. 캐릭터를 만들지 말자.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컴퓨터가 있다면 거기에 쓰고, 노트라면 노트에 쓰고, 냅킨밖에 없다면 냅킨에다 쓰고, 흙바닥뿐이라면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집어서 흙바닥에 쓰고, 우주공간 속에 유영하고 있다면, 머릿속에다 문장을 쓰자. 머릿속에 쓰든 흙바닥에 쓰든 노트에 쓰든, 자신이 소설을 쓴 것인지 그냥 생각만 한 것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한심한 내용일지라도 글자수를 헤아릴 수 있다면 소설을 쓴 것이고, 제아무리 멋진 이야기라도 헤아릴 글자가 없다면 소설을 쓴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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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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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 이성복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이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遲鈍의 감칠맛을 알게 되었다

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 속에 입장할 것이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구근 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될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천국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시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사랑은 응시하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말이 따뜻한 시대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시대의 어리석음과

또 한 시대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하지 마라

아들아 시를 쓰면서 나는 고향을 버렸다 꿈엔들 네 고향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고향 대신 물이 흐르고 고향 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성기 끝에서 왔고 칼 끝을 향해 간다

성기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시,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시를 쓴다는 일은 어찌 보면 고통을 마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섬세하게 언어 파괴를 즐기며 (문장을 뒤죽박죽 배열하고, 단어가 테트리스처럼 쏟아져 내리는 등) 개인의 고통을 보편적 삶으로 확대하는 이성복 시인. 그도 '아들에게'란 시에서는 조근조근 숙제를 던져준다. 결국 칼 끝을 향해 가는 필연적인 인간의 운명을 다시 확인시켜주면서도, 결국 '시'라는 하나의 숙제는 던져준다. 그것을 자유롭게 풀어내기란 어렵겠지만, 그걸 마침내 이뤄냈을 땐 다알리아 꽃이 피는 찬란한 인생의 밝은 면은 잠깐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일의 연속에서 잠시나마 그걸 잊을 수 있는 마취제 정도가 더 현실적일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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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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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살리는 일기다. 이 책은 인간 종에 관련된 과학적 상식을 알려주는 백과사전이다. 이 책은 스포츠의 진정한 재미를 살펴보는 에세이다. 테니스를 하는 아버지, 농구를 했던 글쓴이. 절대 가까워질 수 없는 부자는 서서히 지난날을 되새기며 한층 돈독해진다. 아버지의 지나친 허풍과 심하다 싶을 정도의 고집을 퉁명스럽게 비판하다가도 결국 책의 맨 앞장은 "나의 아버지(1910~)에게"다. 데이비드 실즈는 지루한 내용을 지겹지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다양한 인간 생애와 관련된 상식을 유명인의 명언과 절묘하게 버무려 독자가 다음 장을 부담 없이 넘기도록 도와준다. 베이브루스, 게오르그 니부어,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 다 빈치, 마키아벨리, 볼테르, 괴테, 부처, 칼 마르크스, 우디 앨런 등. 각계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의 명언이 차례대로 나오고, 은근히 말장난 개그도 숨어있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데 길가 곳곳에 알사탕이 놓여있는 격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기원전 44년에 키케로는 말했다. '아무리 늙은 사람이라도 1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낳다.' 그렇게 말하고는 기원전 43년에 죽었다. 임종의 자리에서 미국의 작가 윌리엄 사로얀은 말했다. '누구나 죽어야 하지만 나는 늘 나만은 예외일 거라고 믿었다' 에드워드 영은 '누구나 사람의 생명이 유한한 것을 알지만 누구나 자신을 빼놓고 생각한다'라고 썼다.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이런 문답이 있다. ' 세상의 하고많은 놀랄 일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주변에서 남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은 죽지 않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단순 정보 전달이 지겨워질 때쯤 간간이 유머를 섞어준다. 농구에 임하는 그의 자세도 무척 흥미로웠다. 스포츠의 재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로서는(게다가, 농구와 테니스 둘 다 즐기는 나에게는!) 공감 가는 부분이 참 많더라. 오히려 농구 에피소드만 따로 모아서 이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사실 남들이 보기에는 그깟 공놀이에 뭐 그리 죽기 살기로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니, 사실 그게 이성적으로 맞는 일이다.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일에 다치는 것도 감수하고, 죽어라 한계를 뛰어넘는 건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쾌감과 재미에 이끌려 또 경쟁하고, 뛰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과학적 상식은 오히려 덜 나온 듯한 느낌이다. '성' 관련된 킨제이 보고서 스타일의 분량보다, 스포츠와 함께 나오는 여러 상식이 담겼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는 언어와 스포츠이다. 나는 그 사랑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이제 나는 운동선수와는 거리가 멀다. 요통이 있고, 어깨 힘줄염이 있고, 무릎관절이 불안정하고, 양쪽 다리에 균형이 맞지 않아서 신발에 깔개를 깔았고, 얼마전부터는 뒷목이 저릿저릿할 때가 있다. 반면에 97세인 아버지는 테니스 엘보 말고는 그다지 아픈 데가 없는 것 같다. 아버지는 비가 오면 짜증을 낸다. 밖에서 걸을 수 없고 실내에서 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략)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어떻게 보면 바로 그런 자세였다. 기존의 지혜를 의심해보라는 것, 스스로 본 시각을 고집하라는 것, 언어를 운동장처럼 생각하라는 것, 운동장을 천국처럼 생각하라는 것. 아버지는 내 입과 내 타자기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들을 사랑하라고 알려주었고, 내가 내 몸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사랑하라고, 다른 누구의 거죽이 아니라 내 거죽에 담겨 있는 사실을 사랑하라고 알려주었다.

 

​죽음. 모든 인간이라면 공평하게 맞이하는 유일한 것이다. 부자도 죽고 거지도 죽는다. 남자도 죽고 여자도 죽는다. 노인도 죽고 아이도 죽는다. 결국 모두가 맞이하는 종착역은 '죽음'이란 같은 결과물이 기다린다. 누구나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가 죽는다는 만고불변의 법칙을 믿지 않으려 한다. 법칙마저 바꾸려고 진시황제는 또 다른 이들의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역설적으로 죽음은 곧 삶의 자양분이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즉 인간의 유한함을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삶은 윤택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함은 그 유한함을 체감할 때 비로소 빛난다. 인간의 생명이 무한하다면, 순간순간 마주하는 소중하고 찬란한 '현재'의 중요성을 절대 알 수 없다. 어차피 반복되고, 다음에는 다르게 행동하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절대 인생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면. 비로소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도 담담하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아버지의 가쁜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싹 다가붙었다. 하지만 여력이 없다. 내 머리는 정신없이 위아래로 까닥이고, 목 근육은 터질 듯 팽팽하다. 아버지는 무릎을 더 높이, 가슴에 닿을 듯이 들어올린다. 아버지는 쏜살같이 더 멀리 달아난다. 선인장을 향해서, 고함을 지르면서, 제대로 속도가 붙어 달려간다. 아버지의 팔다리는 부드럽게 힘차게 움직인다.

나는 돌연 무릎이 꺾여 먼지투성이 땅으로 엎어진다. 몸을 받치려고 팔을 쭉 뻗는 바람에 손이 돌멩이에 온통 긁힌다. 아버지는 호주머니에서 칼을 꺼내어 선인장 낮은 가지를 베고,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 마신다. 아버지가 이겼다. 또 아버지가 이겼다. 언제나 아버지가 이긴다. 하지만 결국에는 아버지도 진다. 우리 모두 언젠가 진다. 

 

농구 시합에서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담담한 말. 마지막 장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담백하게 표현하는 말. 은근히 마음을 짠하게 하는 구석이 많은 책이었다. 특히 '유서'부분은 가슴이 찡하더라. 남겨진 이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 수많은 위인과 유명인들은 제각각 자신의 특색, 성격대로 유쾌하게 하고 싶은 말을 세상에 남기고 떠났다. 하지만 모든 공통점은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원망하기보다는 고마움과 미안함, 아쉬움이 곳곳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더는 고칠 게 없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에 오롯이 집중하기 때문에, 비난과 원망의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다. 지금 당장 내 곁에서 설거지는 하는 어머니의 부산스러움이 다시 들리지 않는다면? 내가 통화한 목소리가 사랑하는 그녀의 마지막 생생한 음성이었다면? 아니면 사소한 일상을 더이상 만끽하지 못하고 훌쩍 떠나버려야 하는 운명이 내게 닥친다면? 새삼 지금 '현재'에 충실하고, 후회 없이 그리고 대책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강렬해진다.

'내가 죽으면', 이것은 내 어머니의 유언이다. '내 육신을 화장하고 재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처리해주기 바란다. 내 마음 같아서는 심장, 콩팥, 각막을 기증하고 싶지만, 암 환자의 장기를 이식할 수는 없으니 안 될 것이다. 화장이 유대 율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생명 없는 육체를 처분하는 방법으로 화장이 가장 지각있는 수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적인 장례식은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특별한 형식 없이 그냥 모여서 서로 힘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을 것 같다. 나는 세상을 떠나면서 아무런 후회도 쓰라림도 없다. 나는 멋진 인생을 살았다. 그대들 모두에게 평온한 미래가 있기를. 샬롬.' 끝을 앞둔 사람의 체념이 읽힌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

내 마지막 말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의 묘비명은 뭐라고 하면 좋을까? 고민끝에 생각해보면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어쨌거나 헤피엔딩이니깐. 고맙고 또 고마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전환이다.‘ 이 말은 모두에게 위안이 되었다. 디키는 영원히 사라진 게 아니다. 디키는 공수 전환을 뛰고 있을 뿐이다. 로시 선생님은 디키의 자살 소식을 알려준 뒤에 그래도 시합을 하겠느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물론이고 우리 스스로도 놀란 일이지만, 모두들 그러겠다고 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디키처럼 패스하고, 디키처럼 공을 몰고, 디키처럼 뛰었다. 모두들 공을 건넬 사람을 찾아 두리번거렸는데, 그 사람은 디키였다. 하룻밤 자고 나면 그가 이 모든 게 장난이었다며 불쑥 나타나기를 바랐다. 우리가 모두 디키처럼 경기하면, 그가 차고 문 밑에서 튀어나와 3대2 공격을 하는 법을 보여줄 것 같았다. 내가 90세가 되어도 잊지 못할 플레이가 있다면, 그날의 그 순간이다. 우리 팀의 스타인 브래드 갬블이 홀로 돌진해 들어가고 내가 뒤를 따랐다. 브래드가 뛰기를 멈추고 바닥으로 공을 굴렸다. 내가 그것을 집었다. 나는 뒤에 누가 없나 돌아보았다. 계속 기다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나는 공을 던져 백보드를 맞추었다. 우리는 낙승을 거두었다.

내털리가 태어났을 때 나는 울었고, 아내는 울지 않았다. 울기에는 너무 바빴으니까. 우리가 병원에서 손을 맞잡고 잡지를 읽는데, 갑자기 아내 로리가 전에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위엄 있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잡지 내려놔." 그리고 내털리가 나왔다.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나는 간호사를 다그쳐서 그것이 당뇨를 암시하는 징후가 아님을 확인받았다. (초보 부모용 지침서를 너무 많이 읽었다.) 나는 앞으로는 절대로 사소하거나 멍청하거나 이기적인 생각을 하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그런 감정 고양 상태가 그다지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뭐, 그게 어딘가...

글을 쓰면 쓸수록 아버지의 자화자찬 거짓말은 불어난다. 아버지가 첫 결혼해서 낳은 자식들은 아버지와 관걔가 소원해서 95세 생일파티에도 오지 않았지만, 글에서는 그들이 선물까지 들고 온다. 아버지는 40세부터 대머리였지만, 글에서는 지금에 와서야 ‘머리카락이 거의 사라졌다.‘ 어머니는 예순에 죽는 걸로 되어 있다. (실제로는 51세였다.) 글쓰기는 아버지에게 윤색할 기회이다. 아버지는 요즘도 게걸스럽게 독서를 하는데 인생에서든 문학에서든 싸구려 감상을 싫어하는 분이다.

담배 연기에 일산화탄소가 들어 있다는 경고문은 여성 잡지 광고의 37퍼센트를 차지했지만, 남성 잡지 광고에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일산화탄소 경고문을 실은 광고는 대개 젊고, 여유롭고, 진지하지 않아 보이는 여성들이 출연하는 광고였다. 일산화탄소는 몸에서 산소 전달 메커니즘을 방해하는 유독 기체이다. 광고주들은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이 남성보다 이 사실을 모를 가능성이 높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담배회사들은 공중보건국장 경고문의 사용을 조작하여 효과를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경고의 목적을 퇴색시킨다. 독자가 가장 쉽게 무시할 것 같은 경고문을 선택하여 사용한다.

하루에 빠지는 머리카락 수는 100개 쯤 되는데, 가을에 가장 많고 봄에 적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은 호르몬 변화 때문이다. 탈모가 심한 사람은 체내 호르몬 농도 변화에 남보다 민감하다는 뜻이다. 부모가 머리카띿이 빠지는 사람은 자기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여성도 넷 중 한 명꼴로 머리카락이 조금 빠진다. (중략) 대머리에는 약이 없다.

채널 2번, 영화에서 탐정이 살인 현장을 재방문했다.

채널 4번, 마이크로스펀지 구조에서는 레틴-A가 트레티노인을 물고 놓지 않느다.

채널 7번, 칸쿤으로 놀러 간 여대생들이 티셔츠를 벗어젖혔다.

(중략)

채널 95번, 할리우드의 유명인들은 매리 윈저의 몸 만들기 프로그램을 경험하려고 2만 4천 달러를 지출했다.

채널 99번, 캄캄한 방을 배경으로 흰 커튼이 펄럭이는 장면에서 공포 영화가 끝났다.

채널 2번에서 99번까지, 우리는 찾아보았지만, 언젠가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구제책은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97세인 아버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루해 보인다. 하루, 또 하루, 또 하루 존재를 이어가는 일 외에는 어떤 일에도 흥미나 열정이 한 줌도 없는 것 같다.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 속의 몸>에서 이렇게 말했다. ‘몸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것이 점차 관심의 대상이 되어 다른 대상들의 자리를 삼켜버린다. 아주아주 나이 들고 병든 사람의 세상은 자기 몸에서 반경 60센티미터 안의 원으로 좁혀진다. 무엇을 먹었고, 배출에 어떤 문제가 있고, 통증의 진행 정도는 어떻고, 의자나 침대가 편하네 편하지 않네 하는 내용이 생각과 말의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바로 그런 현상이 아버지에게 갑자기 일어나고 있다. 몇 달 전만 해도 괴짜 노인 철인 대회라도 준비하는 듯 열심히 운동을 해대던 양반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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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

토니 웹스터는 4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철없는 아이는 40년이 흘러 중년이 되었다. 하지만 달라진 건 희끗희끗해진 머리와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학창 시절 섹스에 굶주리고, 사춘기 특유의 냉소적인 대화에 빠져있던 앨릭스, 콜린, 토니 삼총사 무리에 새로운 친구가 전학 왔다. 역사와 철학에 깊은 조예가 있는 에이드리언 핀. 반항심과 허영기가 전부였던 그들에게 에이드리언의 깊은 사색과 지적 능력은 친구 이상의 동경을 자아냈다. 역사 선생님의 호언장담처럼 그는 승승장구하며 케임브리지대학교 장학생으로 자랐다. 비범한 삶을 살아가리라 예상했던 에이드리언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지 못했다. 그는 역사 선생님과 '역사'의 정의를 두고 토론을 벌일 때 주제였던 동급생 롭슨의 전철을 밟았다. 자살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 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 한걸까.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결정에 두 번 놀랐다. 이미 에이드리언이 토니의 전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사귄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연애 소식과 사망 소식은 충격의 크기가 달랐다. 시간이 흐르고, 기억은 희미해졌다. 아픔도, 슬픔도 없는 무미건조한 감정만 남은 중년의 토니. 하지만 그는 타의에 의해 베로니카, 에이드리언의 지난 관계에 다가간다. 베로니카의 어머니 포드 여사가 자신의 이름으로 유산 일부를 남겼기 때문이다. 피 묻은 돈 오백 파운드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었다. 시답지 않은 조롱과 눈치 없는 수작을 부리며 베로니카에게 일기장을 요청하지만 돌아온 것은 철없던 어린 시절 자신이 보낸 편지였다. 아니, 편지의 탈을 쓴 저주였다.

 

"그 여자는 날 경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 또한 경멸하게 될 터이니. (중략) 너희에게 계절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기원컨대 너희의 관절과 성유를 바른 머리통에 산성비가 쏟아지기를."

 

내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은, 나도 인정하는데, 유아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베로니카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친구가 네가 더없이 지리멸렬한 인간임을 깨닫기 전에 임신하는 건 시간문제겠지.' 그렇게 쓰긴 했어도 추호도 진심이 아니었다. 그저 상처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닥치는 대로 휘갈겨 썼을 뿐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자신의 비난을 마주한 토니는 후회한다. 실수는 자신의 기억 속에선 없었지만, 타인의 기억 속에는, 그리고 편지에는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저주의 씨앗이 잉태되어 비극의 서막을 알렸다. <올드보이>를 연상시키는 막장드라마같은 결말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맨부커 수상작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1부의 어린 토니, 2부의 중년 토니는 하나같이 '예감'을 하지 못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재수없는 남자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 역사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비굴하게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가해자가 아닌 늘 피해자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상대를 비난하고,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기억은 시간을 만나면 흐릿해지고, 혹은 자신의 바람대로 또렷해진다.

 

"언뜻 생각하기엔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말이지. 뭐 생각나느 것 있나, 웹스터?"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내 대답은 좀 빠르다 싶게 튀어나왔다.

"그래, 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말할까봐 걱정을 좀 했는데.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심슨?"

콜린은 나보다 더 잘 준비된 답변을 했다. "역사는 생 양파 샌드위치입니다. 선생님."

"어떤 이유로?"

""죽자고 반복하니까요, 선생님. 우리는 이제껏 역사가 트림하는 것을 보고 또 보았고, 올해에도 또 보고 있습니다. 폭정과 폭동, 전쟁과 평화, 번영과 빈곤 사이를 오가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와 천편일률적인 동요뿐이죠."

"그걸 샌드위치 속에 다 넣기엔 좀 많지 않은가 싶은데?"

우리는 학년 말 특유의 신경증에 의존해 과하게 웃어댔다.

"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늘 조심하고 명심해야 한다. 말을 내뱉을 때는 특히. 자신의 불확실한 예감은 타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꿀 수 있는 운명의 한 마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존재하는 기억의 영역에서는 내가 피해자겠지만, 타인의 기억 속에서는 나는 가해자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기 때문이다. 그 확신이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모든 사건에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리고 그 요소가 오롯이 하나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작은 물방울 하나가 물을 넘치게 하는 티핑 포인트가 될 수 있다. 토니는 그걸 알지 못했기에 편지를 보냈고, 두 사람, 아니 더 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꿨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어도 의문은 남는다. 과연 토니는 자신이 빚어낸 결과물에 책임감을 느낄까? '생 양파 샌드위치처럼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도 더럽게 예감을 못 하는 '승자들의 거짓말'만 일삼는 인간이니깐 딱히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나는 짙은 색 가구 위로, 사치스러운 화분에 심은 잎사귀들 위로 묵직하게 반사되는 빛을 의식했다. 베로니카의 아버지가 듣도 보도 못한 손님 접대법이라도 준수하듯 내 가방을 움켜잡았고, 무거워 죽겠다고 익살맞게 엄살을 떨며 다락방까지 손수 들고 가더니 침대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배관연결이 된 세면대를 가리켰다.

"밤에는 저기에 오줌을 싸도 돼."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끼리 허물없이 지내보자는 뜻인지, 아니면 날 하류층 인간쓰레기로 보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내가 생각, 혹은 이론화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에 뭔가,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똑같은 사실, 똑같은 감정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몇 년이고 계속된다. 그러다 에이드리언이나 베로니카라는 버튼을 누르게 되고, 테이프가 돌아가고, 흔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런 사건들이 온갖 감정-분노, 억울한 감정, 안도감-을 재확인해주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달리 접근할 만한 것은 전혀 없는 듯 보인다. 이미 끝난 일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강 증거가 되어줄 만한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설령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해도. 그런데 나중에 가서라도 오래전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변하게 된다면? 내 손으로 쓴 그 흉악한 편지를 읽고서 나는 회한의 감정을 느꼈다.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얼마간은 성취를, 얼마간은 실망을 맛보는 것. 나는 이제껏 재미있게 살아온 편이다. 다른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볼멘소리를 하거나 깜짝 놀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면에서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뭘 하는지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도 알다시피 내 인생에서 뭔가 아쉬운 게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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