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

토니 웹스터는 4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철없는 아이는 40년이 흘러 중년이 되었다. 하지만 달라진 건 희끗희끗해진 머리와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학창 시절 섹스에 굶주리고, 사춘기 특유의 냉소적인 대화에 빠져있던 앨릭스, 콜린, 토니 삼총사 무리에 새로운 친구가 전학 왔다. 역사와 철학에 깊은 조예가 있는 에이드리언 핀. 반항심과 허영기가 전부였던 그들에게 에이드리언의 깊은 사색과 지적 능력은 친구 이상의 동경을 자아냈다. 역사 선생님의 호언장담처럼 그는 승승장구하며 케임브리지대학교 장학생으로 자랐다. 비범한 삶을 살아가리라 예상했던 에이드리언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지 못했다. 그는 역사 선생님과 '역사'의 정의를 두고 토론을 벌일 때 주제였던 동급생 롭슨의 전철을 밟았다. 자살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 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 한걸까.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결정에 두 번 놀랐다. 이미 에이드리언이 토니의 전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사귄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연애 소식과 사망 소식은 충격의 크기가 달랐다. 시간이 흐르고, 기억은 희미해졌다. 아픔도, 슬픔도 없는 무미건조한 감정만 남은 중년의 토니. 하지만 그는 타의에 의해 베로니카, 에이드리언의 지난 관계에 다가간다. 베로니카의 어머니 포드 여사가 자신의 이름으로 유산 일부를 남겼기 때문이다. 피 묻은 돈 오백 파운드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었다. 시답지 않은 조롱과 눈치 없는 수작을 부리며 베로니카에게 일기장을 요청하지만 돌아온 것은 철없던 어린 시절 자신이 보낸 편지였다. 아니, 편지의 탈을 쓴 저주였다.

 

"그 여자는 날 경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 또한 경멸하게 될 터이니. (중략) 너희에게 계절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기원컨대 너희의 관절과 성유를 바른 머리통에 산성비가 쏟아지기를."

 

내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은, 나도 인정하는데, 유아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베로니카에게 보냈던 편지의 내용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 친구가 네가 더없이 지리멸렬한 인간임을 깨닫기 전에 임신하는 건 시간문제겠지.' 그렇게 쓰긴 했어도 추호도 진심이 아니었다. 그저 상처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닥치는 대로 휘갈겨 썼을 뿐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자신의 비난을 마주한 토니는 후회한다. 실수는 자신의 기억 속에선 없었지만, 타인의 기억 속에는, 그리고 편지에는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저주의 씨앗이 잉태되어 비극의 서막을 알렸다. <올드보이>를 연상시키는 막장드라마같은 결말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으로 맨부커 수상작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1부의 어린 토니, 2부의 중년 토니는 하나같이 '예감'을 하지 못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재수없는 남자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 역사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비굴하게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그는 가해자가 아닌 늘 피해자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상대를 비난하고,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기억은 시간을 만나면 흐릿해지고, 혹은 자신의 바람대로 또렷해진다.

 

"언뜻 생각하기엔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란 무엇인가, 라고 말이지. 뭐 생각나느 것 있나, 웹스터?"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내 대답은 좀 빠르다 싶게 튀어나왔다.

"그래, 안 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말할까봐 걱정을 좀 했는데.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 심슨?"

콜린은 나보다 더 잘 준비된 답변을 했다. "역사는 생 양파 샌드위치입니다. 선생님."

"어떤 이유로?"

""죽자고 반복하니까요, 선생님. 우리는 이제껏 역사가 트림하는 것을 보고 또 보았고, 올해에도 또 보고 있습니다. 폭정과 폭동, 전쟁과 평화, 번영과 빈곤 사이를 오가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와 천편일률적인 동요뿐이죠."

"그걸 샌드위치 속에 다 넣기엔 좀 많지 않은가 싶은데?"

우리는 학년 말 특유의 신경증에 의존해 과하게 웃어댔다.

"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늘 조심하고 명심해야 한다. 말을 내뱉을 때는 특히. 자신의 불확실한 예감은 타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꿀 수 있는 운명의 한 마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존재하는 기억의 영역에서는 내가 피해자겠지만, 타인의 기억 속에서는 나는 가해자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기 때문이다. 그 확신이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모든 사건에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리고 그 요소가 오롯이 하나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작은 물방울 하나가 물을 넘치게 하는 티핑 포인트가 될 수 있다. 토니는 그걸 알지 못했기에 편지를 보냈고, 두 사람, 아니 더 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꿨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어도 의문은 남는다. 과연 토니는 자신이 빚어낸 결과물에 책임감을 느낄까? '생 양파 샌드위치처럼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도 더럽게 예감을 못 하는 '승자들의 거짓말'만 일삼는 인간이니깐 딱히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나는 짙은 색 가구 위로, 사치스러운 화분에 심은 잎사귀들 위로 묵직하게 반사되는 빛을 의식했다. 베로니카의 아버지가 듣도 보도 못한 손님 접대법이라도 준수하듯 내 가방을 움켜잡았고, 무거워 죽겠다고 익살맞게 엄살을 떨며 다락방까지 손수 들고 가더니 침대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배관연결이 된 세면대를 가리켰다.

"밤에는 저기에 오줌을 싸도 돼."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들끼리 허물없이 지내보자는 뜻인지, 아니면 날 하류층 인간쓰레기로 보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내가 생각, 혹은 이론화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에 뭔가,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똑같은 사실, 똑같은 감정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몇 년이고 계속된다. 그러다 에이드리언이나 베로니카라는 버튼을 누르게 되고, 테이프가 돌아가고, 흔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런 사건들이 온갖 감정-분노, 억울한 감정, 안도감-을 재확인해주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달리 접근할 만한 것은 전혀 없는 듯 보인다. 이미 끝난 일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강 증거가 되어줄 만한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설령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해도. 그런데 나중에 가서라도 오래전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변하게 된다면? 내 손으로 쓴 그 흉악한 편지를 읽고서 나는 회한의 감정을 느꼈다.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얼마간은 성취를, 얼마간은 실망을 맛보는 것. 나는 이제껏 재미있게 살아온 편이다. 다른 사람들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볼멘소리를 하거나 깜짝 놀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어떤 면에서 에이드리언은 자신이 뭘 하는지 알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도 알다시피 내 인생에서 뭔가 아쉬운 게 있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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