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1~9 완간 박스 세트 - 전9권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미생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미생'  신드롬은 드라마의 인기에 그치지 않는다. 원작 웹툰 다시보기로 이어지면서 콘텐츠의 선순환을 일으키고 있다. 드라마 방송 기념으로 포털에 연재됐던 특별편 5부작은 연재와 동시에 조회 수 1위를 기록했다. 1년 동안 90만 부 팔리던 만화 '미생' 단행본은 지난달 26일 100만 부 판매를 돌파했으며, 불과 한 달 만에 200만 부를 넘어섰다.

 

직장인의 교과서 <미생>이 '열풍'을 넘어 '광풍' 수준이다. 다음에서 연재된 원작 웹툰은 누적 조회 수 10억을 돌파했고, 스핀오프 특별판 5화도 업로드와 동시에 1위에 올랐다. 드라마는 원작을 잘 살렸다는 호평을 받으며 케이블채널 tvN에서 무려 6%가 넘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덩달아 1년 동안 90만 부가 팔리던 미생 단행본은 장그래 신드롬과 더불어 특별판, 보급판 등을 포함해 불과 한 달 만에 200만 부를 돌파했다. 일단 단행본은 웹툰의 맛이 고스란히 살아있어서 만족스럽다. 세로 스크롤을 내리는 재미에 특화된 스타일이 아니라 가로로 넘기는 책장에도 이질감이 없다. 예를 들면 움직이는 그림이나 스크롤을 내리며 긴장감을 조성하는 웹툰만의 특징이 거의 없다.

 

<미생>의 가장 큰 장점은 엄청난 현장 조사에서 뿜어져 나오는 현실성이다. 그리고 탄탄한 스토리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감과 위안이 열풍의 이유다.  썸은 있을지라도 연애는 없는 (이게 썸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은 마치 실제 업무 현장에 와있는 듯 생생하다. 그 속에서 고졸 인턴 장그래는 바둑으로 단련된 탁월한 승부사 기질을 펼치며 아직 살아있지 못한 '미생'에서 '완생'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흔한 성공 신화의 주인공처럼 엄청난 능력을 뽐내며 단숨에 성공하지 못한다. 깨지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낙담하고. 하지만 영업 3팀이란 울타리 안에서 서서히 자신만의 '바둑', 아니 자신만의 '일'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게 주된 내용이다.

 

 

대학생 때 인터넷으로 본 <미생>, 신입사원이 되어 읽은 <미생> 단행본.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읽고 난 후의 느낌이 달라지진 않았다. 다만 주인공 장그래가 온몸으로 발산하는 "짠함"이 뭔지 120% 공감했다. 신입 사원은 권리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더불어 책임도 그렇게 막중하지 않다. 그저 자연스럽게 조직에 연착륙하면서 모나지 않게 싹싹하게 일하는 게 제일이라고 느꼈다. 1년이 다 되어가는 조직 생활에서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느낌은 사실 아직까진 없다.

 그저 는 거라면 눈치와 모르는 게 나왔을 때 재빠르게 인정하거나 혹은 얼버부리는 능력 정도? 위에 컷처럼 일의 우선 순위를 보는 깜냥은 조금 늘은 것 같다. 물론 그 우선순위를 정할 때 중요도가 아니라 직급이란 변수가 더 많이 작용한다는 건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직장 생활 1년 차. 기대한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걱정한 만큼도 아니다. 다행인 건 아무리 업무가 어렵고 더러운 일이 많아도, 그 짐을 덜어줄 훌륭한 선배들을 많이 만났다는 점이다. '더할 나위 없었다. YES' 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YES" 이 정도의 일 년이었다.

 

 

정치는 정치하는 분들이 바로잡아주길 바라고, 삶을 살아가면서 내 삶을 낫게 만드는 건 우리 스스로의 일이라고 본다. 양보 없이 자신의 일을 쟁취하길 바란다"

- 윤태호 작가 인터뷰 中

흔히 90년대 우리나라 축구의 장점은 '정신력'이었다. 투혼을 강조하고 희생정신을 부르짖으며 머리가 찢어지면 붕대를 감고 뛰는 게 당연했다. 그나마 '패배하면 현해탄에 뛰어들겠다.'는 이승만 정부 시절의 외침이 미덕으로 통했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히딩크 감독이 가장 먼저 손댄 부분은 '체력'이었다. 

체력이 부족하면 기어이 짜내는 정신력은 차선책이며 반쪽짜리일 뿐이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기술, 판단력, 조직력이 극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가 그렇듯 인생도 마찬가지다. 술을 마시거나, 야근하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출근할 때도 이 모든 스트레스를 버틸 체력이 필요하다. 피곤하면 판단이 흐려지고, 지치면 쉽게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꾸준히 운동하면서 내 건강을 스스로 챙겨야 하는 법이다. 일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공한다, 어차피 일이라고 하는 것이 매번 새로운 이슈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 알고 있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만화 역시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반복적인 일에서 어떻게 스스로 새로움으로 발견해내고 유지해 나가는가, 이게 그 사람의 성공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 윤태호 작가 인터뷰 中


을 중의 을의 위치에서 갑질하는 인간들 시중을 들다 보면, 안영이 말대로 나에게 미안한 하루가 있다. 뿌듯함과 보람은 없고 그저 무의미하게 하루를 때운 느낌이 들면 한없이 허무하다. 내가 아닌 아무나 이 자리에 와도 일 처리를 할 수 있을 업무가 더 많다. 슬슬 일이 손에 익고, 빠른 길이 보이면 반복된 업무에 권태가 밀려온다. 그런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 그 권태에 짓눌려 박 과장처럼 검은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런 나른함과 지루함을 이겨내는 길도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다. 업무적으로나, (사실 업무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라 크진 않을 것 같다.) 업무 외적으로나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조금씩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대체 불가능한 자원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사실 그게 쉽지는 않다. 똑같은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에서 최대한 편하게 지내고 싶은 건 진리인걸. 어쨌거나 스스로 뿌듯한 하루를 자주 맞이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도 필요하다.

 

 


"(완생은) 마치 우리 꿈처럼 지향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끝없이 미생이고 그 완생을 지향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어제보다 조금 나아지는 삶이 되기를 바라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완생이라는 것은 쟁취의 대상이 아니라 지향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 윤태호 작가 인터뷰 中


최종합격 소식을 듣고 크게 기쁘거나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은 아니었다. 대학 합격 때와 마찬가지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무덤덤한 내 성격 덕분이었을까? (불확실성이 너무나 큰 취업 시즌에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 같다.) 하지만 부모님을 초청한 입사식에서는 뭉클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때는 딱 대학교 졸업식 때 느낌과 비슷했다. 언제나 행복의 기준을 남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착각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자.' 이 마음가짐대로 입사하면서 누군가를 깔볼 이유도 없고, 움츠러들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부모님은 예외였다. 부모님께서 웃으면 나도 즐거웠고,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나도 부모님이 자랑스러웠다. <미생> 속 어머니 역시 늘 무심하고 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 장그래를 아낀다. 친척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은 밉지 않다. 나의 부모님과 무척 닮아있기 때문이다. 평생 연구복과 공장 점퍼에 익숙한 아버지는 내가 양복을 입고 본사에 출근하는 모습에 기뻐하신다. 힘들다고 징징거려도 "사명감이니깐~" 이란 말로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신다. 그리고 아버지는 세탁소에 맡긴 와이셔츠를 그냥 입어도 되는데 일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다림질하신다. 내게는 불편한 양복 더미가 누군가에게는 자긍심이고 큰 기쁨이다. 어머니도 새벽같이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시며 사과즙을 따라주신다. 어차피 나가서 사 먹으면 된다고 말해도 웬만하면 집밥을 먹으라고 권하신다. 용돈 하라고 주신 돈도 기어이 "세일이라 그냥 하나 샀다."며 겨울 양복을 사시는 분이다. 

내가 잘하면 부모님께서 칭찬받고, 내가 못하면 부모님께서 욕 듣는 거다. 나는 부모님의 자부심이다. 절대 부끄럽게 행동하지 말고, 꼿꼿하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그들의 바람이 부담감이 아니라 내겐 원동력으로 작용하니 고마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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