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배를 접는 시간 -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
허소희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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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퇴근 시간이 길어서 책 한권은 챙겨서 지하철에 탄다. 이 책은 며칠 째 가방 안에만 있었다. 차마 손이 가지 않았다. 무거운 내용 일까봐, 내 안에 뭔가를 건드려서 불편하게 될까봐 그랬는지 모르겠다. 며칠을 가지고만 다니다가 첫 장을 펼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이 쏟아져서 책장을 넘길 수 없게 될 정도였고 내릴 역이 가까워지자 다 읽었다. 

 

 종이배를 접는 시간은 한진 중공업 싸움의 기록이다. 희망버스라는 새로운 연대를 만들어낸 싸움이기도 했고 아직도 진행 중인 싸움이기도 하다. 3년 전 한진 중공업은 400명의 노동자를 해고하겠다고 했다. 선박 주문이 없어서 2010년 손실액이 517억 이라는 이유였다. 운영이 어렵다던 회사는 다음날 주주들에게 176억원을 현금 배당했고 대주주인 조남호(한진 중공업 회장)는 29억 원을 받았다. 10년 전에도 회사는 수주가 어렵다며 500명을 해고 했고 이에 맞서는 노조에 손해배상가압류 소송을 걸었다. 김주익은 85호 크레인에 올라 손배 가압류 해제, 해고자 복직, 징계 철회를 요구했다. 회사는 꿈쩍도 안하고 조합원들은 떨어져 나가고 129일째 되는 날 그는 85호 크레인에 목을 맸다. 그리고 십년이 지난 후에도 회사는 단협을 무시한 채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수주 제로를 만들고 임금이 싼 필리핀 조선소로 물량을 뺐다. 여기 까지 만으로도 숨이 차오른다.

 

  김주익 노동자가 투신한 이후 겨울에 보일러도 틀지 못했다는 김진숙 위원장은 산자와 죽은 자가 나눠진 상태로 분열하던 쌍용차 투쟁을 떠올리며 그 전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85호 크레인을 오른다. 주검으로 내려올지 살아서 내려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끄덕도 하지 않는 회사에 맞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김주익 열사는 100일이 넘어서 주검으로 내려왔고 김진숙 위원에게는 희망버스가 왔다. 결국 309일 만에 김진숙 위원장은 살아서 크레인을 내려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회사는 어용 노조를 만들고 노동자를 분열시키고 또 다시 복직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언론이 국회가 난리치니 약속을 지키는 시늉만 한다.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데 자본가들은 너무 쉽게 해고 하고 약속을 저버린다.

 

 이 사회에서 나의 가치는 하는 일과 임금으로 매겨진다. 해고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살인이다. 사회적인 위치로 내가 먼저 죽고 생계를 해결하지 못해서 가족이 같이 죽는다. 사택에서 같이 살던 직장 동료와 이웃이 하루아침에 나가는 가족과 남는 가족으로 나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노동자의 임금이 싼 나라로 공장을 옮기는 것이 잘못되었는가. 자유로운 경제 이윤을 쫓는 것이 죄가 되는가. 내 사업장에서 못나가겠다고 목숨을 던지고 영업을 방해하는 것이 죄가 아닌가. 적어도 본인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대가가 주어지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남은 사람은 언제까지 일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고 잘린 사람은 열패감과 좌절감에 헤매야 한다. 직장에서,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거기에 항의하면 매 맞고 구속되며 수십억 수백억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병든 사회이고 힘의 균형이 깨진 사회다. 쥐똥 섞인 도시락을 먹어가며 청춘을 바쳐가며 함께한 회사다. 그 이윤을 공유하고 인정받지는 못할망정 하루아침에 길바닥으로 내쫓는 것은 ‘범죄’다. 목숨을 걸고 싸워도 지기만 하는 이 싸움이 심지어 노동 귀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싸움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노조’도 없는 비정규직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판판히 깨지는 계약직이다. 찍 소리도 못 내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약자다. 

 

 대학시절에 나를 지배했던 대부분은 감정은 열패감이었다. 어떻게 해도 맨 날 지기만 했다. 이기는 싸움이 없었다. 잠시 이겼다고 생각되더라도 그건 일시적인 것이었다. 손해 배상처럼 어마어마한 그물이 그들에게 다시 드리워졌다. 만성적인 패배에 지쳤다. 실은 내 싸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뒤돌아서서 내 길을 가면 된다. 어차피 나는 ‘연대’하는 입장일 뿐 ‘그들’의 싸움이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다른 사람들의 지지나 관심의 부재였다. 철지난 이야기 한다는 표정, 모두 다 새로운 가치 새로운 이념을 위해 살고 있는데 나만 외떨어진 것 같은 소외감,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움 등이 나를 지치게 했다. 그래서 희망버스 집회 한 두 번 참석하고 후원계좌에 얼마간의 돈을 보내면서 평안한 잠을 청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막막한 처지를, 어떻게 저항해도 지기만 하는 싸움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함께 하기가 불편했다. 그보다 여행 블로그를 예쁘게 장식된 인테리어 블로그를 구경하고 오늘은 뭘 해먹을까 뒤지는 일이 훨씬 편안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위안했다. 

 

 기술을 가진 숙련공들이 실업자가 되고 멀쩡한 도크는 왜 폐쇄되어야 하는가. 필리핀 노동자들은 또 얼마나 위험에,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노출되어야 하는가. 일하겠다고 하는 노동자들을 쫓아낼 용역에 쓸 돈은 있으면서 노동자들을 책임 질 돈은 없는가. 어느 날 갑자기 쫓겨나는 데 항의하면 수십억 수백억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하는가. 배도 잘 만드는 나라가 배 만들고 싶다고, 일하고 싶다고 온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왜 폐기 직전의 다른 나라 배를 들여와야 했는가. 왜 세월호 선장은 나이 많은 계약직 바지 사장일 수밖에 없었을까. 대부분의 선원이 계약직에 안전 교육을 못 받고 있는가. 책을 읽는 동안 질문은 끝이 나지 않는다. 우연히 세월호 였을 뿐이다. 일인 일 승무제가 되고 노후 된 열차에 정기 검사를 외주화한 이호선 사고도 우리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사건 사고 중의 하나 일 뿐이다. 

 

 대강 봉합할 수 없는 질문들이 막막함이 가슴을 짓누른다. 이 싸움은 ‘희망버스’라는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주고 또 많은 질문들을 우리에게 한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희망버스’를 탄 사람들은 누군가의 말처럼 어둠을 저주하기 보다는 촛불을 밝혔으며 작고 힘없는 그 빛이 세계를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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