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들 - 나를 둘러싼 존재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 들시리즈 2
박훌륭 지음 / 꿈꾸는인생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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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영업이 끝나 셔터가 내려진 약국 안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곳은 약국이자 책방이고, 춤추는 남자는 약사이자 책방 주인이다.
여러 정체성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 사람의 이름은, 박, 훌, 륭. (본명 맞다.)
책 뒷면에는 '훌륭' 이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의 소유자가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야기라고 씌여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 책은 박훌륭씨가 입신양명하거나 영웅호걸이 되는 이야기일까? 혹시...엄친아 성공 스토리 같은 건가?
그렇진 않다. 책은 그가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힘빼고 들려주는 에세이다. 그래서 전체적인 책의 분위기나 문체는 젊고 산뜻하다.
하지만, 박훌륭씨는 나름의 방식으로 진지하게 (본인 표현에 따르면 궁서체로)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시간들을 보내기 위해 노력해 온 것 같다.
길지 않은 인생, 재미가 없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인생의 진로를 바꾸기도 했으며,
(과학자를 꿈꾸며 과학고, 카이스트에 진학했으나, 약대로 진로를 변경했다고 한다.)
재학 시절 내내 춤을 통해 몸을 자유자재로 쓰는 법을 익혔으며,(춤 실력이 수준급이라고)
급기야, 약국 안의 서점이라는 사상 초유의 유니크한 업적을 달성하였으니...
지금까지의 그의 삶은 이름만큼이나 특이하고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책에서 '중의'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그런 가치관이 그가 약사이자, 책방 주인이자, 한 아이의 아빠의 역할을 재미를 느끼며 충실하게 해내는 원동력이 아닐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한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꿈을 꾸는 데서 그치고 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생'속으로 들락날락 하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 생에 대한 사랑과 호기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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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속의 삶 삶속의 예술 - 정연복의 그림이야기
정연복 지음 / 등(도서출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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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여행과 흡사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예술속의 삶, 삶속의 예술>이란 제목의 이 책이 그랬다. 책을 읽는 동안 얼마쯤은 느긋하게 유럽의 미술관을 돌아보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오랫만에 만나는 아주 정갈한 미술 에세이기도 했고.
책장을 넘기는 동안 아는 그림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
(특히 라울 뒤피의 그림!)
낯설고 신선한 그림을 만났을 때의 놀라움,
(마들렌의 초상화 라는, 18세기 흑인 여성 마들렌을 그린 아름다운 초상화가 오랫동안 그 이름 대신 니그로 여인이라 불렸다는 것.)
도무지 화가의 의도를 알 수 없는 그림을 마주쳤을 때의 불가해함을 동시에 경험했다.
(로베르 쿠튀리에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다.)
어떤 그림은 ‘거기서 나를 기다렸나?’ 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킬 만큼 운명적이기도 하다. 여행 코스에 미술관을 포함 시키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이러한 기분을 느끼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 시대,
여행은 자유롭지 않으며 더더군다나 미술관 방문은 제한이 많다.
요 며칠 머리가 복잡했고, 일상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 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차분하게 비일상을 경험하고 싶어서 나와는 아주 먼 곳에 있는 그림들을 이야기 하는 책을 읽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책은 미술에 관한 어려운 이론서가 아닌, 그림에 대한 지은이(
정연복
)의 생각을 편안하게 풀어 놓은 책이다. 신화와 영화 이야기들이 곁들여진 글들이 많아서 더욱 편안한 독서, 아니 그림 감상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면서 문득 낯선 도시에 흘러가서 작은 성당에 들어가 경건한 그림(제단화)와 마주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여행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까지나 내게 열려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하는 상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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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5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8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술속의 삶 삶속의 예술 - 정연복의 그림이야기
정연복 지음 / 등(도서출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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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만나는 아주 정갈한 미술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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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판사
정재민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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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이면서 혼자가 아니었던 한 끼 한 끼의 담담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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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시옷들 - 사랑, 삶 그리고 시 날마다 인문학 1
조이스 박 지음 / 포르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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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들은 독자들에게 부치는 편지같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책이 그렇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의 작가들에 대한 길디긴 편지를 받아든 기분. 편지를 받아보는 일은 이제는 흔한 일이 아니기에,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내게 보내진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듯.
아마 이 책의 저자도 누군가에게 긴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글을 써내려가지 않았을까? ‘시, 사랑, 삶’이라는, 너무나 바쁘고 너무나 각박하게 살아가다보니 언젠가부터 우리가 깊이 생각하기를 미뤄두었던 세 가지에 대한 긴 편지를...

이 책은 주옥같은 영미 작가들의 명시와 깊이 있는 사고와 언어로 그 시를 소개하는 작가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책은 아름다운 시와 어구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
========
슬픔의 다섯 단계 - 린다 파스탄

당신을 잃은 밤에
누군가 내게
슬픔의 다섯단계를 가리켜 보였다.
저 길로 가세요, 사람들이 그랬지
쉬운 일이지, 마치 사지가 절단된 후
계단을 오르는 것 같으니까.
(중략)

난 마침내 거기 도달했어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었어.
슬픔은 도돌이 계단이야
나는 당신을 잃었어.

============
저자의 해석은 탁월하다.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살아야 한다는 막연한 삶의 의지로 인해 나아지려 발버둥치는 과정이 계단을 오르는 상승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 해석 바로 뒤에 ‘사지가 절단된 채 오르는 계단’이라는 말에 그만 마음이 찢어지고 말았다고 썼다. 그만한 슬픔을 경험해 보았기에 그렇게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은 도돌이 계단이란 말. 가까운 누군가를 떠나보낸 슬픔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눈물 흘릴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도돌이 계단같은 슬픔은 누구나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도돌이 계단같은 슬픔은 나 또한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감정이지만, 언젠가 슬픔이 다가오게 되면 이 책에 실려 있던 린다 파스탄을 떠올리게 될 것만 같다.

이 지점에서 글쓴이와 나의 물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교감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긴긴 편지를 읽어가는 묘미일 것이다.

내 감정과 내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
문학의 필요성을 논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를 누군가 묻는다면 숨겨진 나의 맨 얼굴과 나의 고뇌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문학이라고 답하겠다.

시와 문학을 읽고 감동하던 시절을 잠시 잊고 살고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P.S.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시는 루이즈 글룩의 <헌신이라는 신화>였다. 시 읽으면서 소름 돋아보기는 처음...
우선 아무 정보도 없이 시를 있는 그대로 느껴 본 후, 책의 저자와 함께 시가 내포한 의미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전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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