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종류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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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붙어있는 한, 아마 나는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평생 이동하는 삶을 살 것이다. 오늘같이 꼼짝않고 집에만 있는 날에도 나는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침대에서 소파로, 소파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다시 소파로...

페렉의 유일한 산문집, <공간의 종류들>을 샀다. 

오늘은 커피를 한 잔만 먹었을 뿐인데, 고카페인 커피를 빈속에 마신 듯 심장이 미친듯이 두근댄다.

페렉을 꽤 읽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기전에는 페렉의 매력을 다 안다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다지도 독창적이고,
이다지도 아름다울까?

침대, 인생의 삼분의 일 이상을 보내는 곳.
페렉은 이렇게 썼다.

나는 침대속에서 많은 여행을 했다. 생존을 위해 나는 부엌에서 설탕을 훔쳐와 긴 베개 밑에 숨기곤 했다.(그 때문에 몸이 가려웠다....).담요나 베개가 보호해줌에도 두려움은 - 심지어 공포는 - 언제나 떠나지 않았다.

침대, 말로 표현할 길 없는 위협의 장소, 대립의 장소, 하룻밤 스쳐 지나가는 여인들로 붐비는 고독한 육체적 공간, 욕망의 권리를 상실한 공간, 정착이 불가능한 장소, 꿈과 오이디푸스적 향수의 공간:

두려움 없이 그리고 후회없이 잠들 수 있는 자는 행복하여라
묵직하고 오래된 아버지의 침대에서
모든 가족이 태어났고 또한 그들 모두가 죽었네.
(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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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비좁은 청년 주택에 관한 기사를 읽은 날
쓸모없는 공간에 대한 페렉의 글을 이렇게 접한다.
쓸모없는 공간을 상상하기도 버거운 이 시대에 읽는 페렉의 글.

나는 쓸모없는 방 하나가, 절대적으로 그리고 일부러 쓸모없는 방 하나가 있는 아파트를 생각해 보려 몇 번이고 애쓴 적이 있다.
(중략)

하지만 그 경우에도 나는 무를 생각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다. 어떻게 무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무 주위에 자동적으로 어떤 것을 두지 않고 어떻게 무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무를 하나의 구멍으로 만들어 그 안에 서둘러 무언가를 넣게 하는 어떤 것, 하나의 실천, 하나의 기능, 하나의 운명, 하나의 시선, 하나의 필요, 하나의 결여, 하나의 잉여를 넣게 하는 그 어떤 것 없이?....
(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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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여진 형식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자유로이 아름다움을 유영하고 있는 페렉의 문장에 새삼 매혹된다.
페렉의 위대함. 별다른 것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사유를 끌어내는 문장의 힘.
독자들에게는 사랑을, 다른 작가들에게는 질투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이 책을.... 나는 내 침대 옆에 오래두고 싶다. 페렉식의 아름다운 사물의 나열을 내 방식대로 필사하고 싶어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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