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역설 - 한자는 중국을 이렇게 지배했다
김근 지음 / 삼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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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만큼 거창한 역설은 없는 것 같다. 그보다는 우리가 배운 한자 형성 원리에 대한 심화 학습서로 보면 되겠다. 분량도 많지 않아 하루 저녁에 읽을 수 있다. 본문 중 몇 부분을 인용해 본다.

 

1. 다시 말해서 인간 앞에 던져진 카오스의 실재 세계를 사람이 살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 만들려면 사물을 분절해서 창조하고 사물들 간의 관계와 질서를 부여해서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데, 과학적 사유 능력이 덜 발달했던 고대인들에게 신화적 사유는 매우 중요한 논리적 도구로 작용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화는 체제 이데올로기를 사회 구성원들의 뇌리에 흔적을 남기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신화가 구축해놓은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헤게모니가 획득된다. 한자의 경우 이러한 메타 인식적 기능은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 차원에서 각각 일어나고 있다. 시각이미지의 차원이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이미지 자체로부터 존재론적으로 의미를 형성해내는 가차를 뜻하는 것이고, 청각 이미지의 차원이란 한자의 독음을 따라 속성이 구체적인 사물로 발현되는 전주를 각각 지시하는 것이다.

 

2. 중국에서는 중용사상이란 게 있어서 역사가 극단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최대한 연기시키는 기능을 수행했는데, 기실 이것때문에 중국의 문화는 그렇게 종교적이지도, 또한 이성적이지도 않은 속성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중용의 연기 기능은 이러한 모순을 흡수해서 역사의 발전이 극단적으로 흐르는 것을 억제하는 기능에 다름 아니었다. 중국인들의 중용이라는 지혜를 고안한 것은 바로 한자를 사용하는 가운데 터득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한자가 잉여의 모순을 흡수할 수 있었던 패러다임의 구조는 이러하다. 한자도 상징체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틀에서 배제되는 잉여가 만들어지기는 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자의 표의 기능은 잉여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체제 속의 존재로 인정함으로써 실재계를 커버하려 한다. 앞서의 '란(亂)자를 다시 보면 '헝클어진 실타래와 두 손'이라는 상황은 '어지럽다'를 상징하기도 하고, '다스리다'를 상징하기도 한다. 어느 쪽을 표상하더라도 다른 쪽은 배제되지 않은 채 여전히 문자 속에 존재하면서 실재계로 기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상징으로서 실재계를 커버하는 한자 패러다임인 것이다.

 

4. 중국이라는 큰 나라를 유지시켜온 변하지 않는 관념적 틀이 있다면 그것은 삼강오륜의 윤리로 요약되는 유교봉건주의일 것이다. 이 질서의 요체는 태양과 같이 완벽하면서도 변치 않는 상징적 존재를 체제의 정점에 설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세상의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귀속시키면 사회는 안정적으로 유지, 운영된다. 그러려면 이 체제가 당위적일 수밖에 없다는 헤게모니를 가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렇게 믿게 만들 합리성이 전제돼야 한다. 여기에 한자의 이미지 속성과 조자(造字) 구조는 이 합리성을 제공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된다. 그래서 한대 이후 청대에 이르기까지 한자학(또는 문자학)은 권력이 중시해온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해왔다. 왜냐하면 한자학은 사물의 질서를 세움으로써 권력을 당연한 행위로 규정해주기 때문이다.

 

5. 이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중국에 살면서 겪는 어려움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자의 존재론적인 의미 작용이 비즈니스나 일상생활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므로 이 때문에 적지 않은 갈등과 심지어는 분쟁까지도 발생한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 중국과의 교역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할 무렵, 한국무역협회는 중국에 진출할 사업자들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주지시킨 바 있는데, 그중 하나가 중국의 사업자와 계약서를 쓸 때에는 반드시 영어로 작성하라는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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