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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평점 :
스마트폰의 카톡 하나면 모든 연락이 끝나는 시대, 모든 것이 빠르고 간편한 디지털 시대인 지금, 때론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온다. 한적한 외곽 산속에 위치 한 카페, 낡은 종이냄새와 무너질듯 쌓아올린 중고책이 가든한 책방, 작은 마찰음으로 음색이 맑지 않은 커다란 LP판 등. 조금의 불편함과 세련미와는 동떨어진 것들. 하지만 이것들이 주는 편안함과 정겨움은 남다르다. 감성이 충만한 가을, 후질근한 슬리퍼와 목이 늘어난 T 같은 소설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추리를 빼고, 각각의 사연으로 인간애를 더욱 농축한 작품, 누군가를 위해 대신 편지를 써주는 한 '대필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촌스럽지만, 낡았지만,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져오는 이야기 쌀쌀한 가을 <츠바키 문구점>으로 마음을 데워보자.
"자기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어도, 제과점에서 열심히 골라 산 과자에도 마음은 담겨 있어.
대필도 마찬가지야. 자기 마음을 술술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은 문제없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해 대필을 하는 거야. 그 편이 더 마음이 잘 전해지기 때문에.
네가 하는 말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이 좁아져.
옛날부터 떡은 떡집에서, 라고 하지 않니. 편지를 대필해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는 대필업을 계속해나간다, 단지 그것뿐이야"
- 누군가의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대필가' 포포의 이야기
간직한 마음이 써지는 순간, 편지가 전하는 위로가 만드는 소소하지만 뭉클한 기적들
가마쿠라에 유서깊은 문구점이 있다. 문구재료도 팔지만 대필업으로 유명한 곳, '츠바키 문구점'이다. 무려 에도시대부터 여성 서사들이 대대로 편지를 대필해온 이 곳은 아메미야 집안이 운영하는 소박하지만 입소문으로 알려진 문구점이다. 연필을 있되 샤프펜슬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고루한 원칙을 고집하면서, 대필의 종류는 주소쓰기부터 메뉴판까지 무엇이든 의뢰를 받는다. 포포는 이 소박한 문구점을 이어나갈 후손이다. 하지만 외국을 방랑하던 20대 후반인 포포는 대필가라는 직업에 흥미도 없을 뿐더라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엄한 할머니 밑에서 대필가가 되기 위한 혹독한 수련 과정을 밟을 탓도 있지만, 사실 포포는 다른 사람인 척 편지를 쓰는 것은 '사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할머니는 제과점에서 열심히 산 과자에도 마음이 담겨있다는 비유를 하며,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대필해 주는 것은 진심을 전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며 말한다. 이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포포는 11대째 전해오는 가업을 잇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뜻밖의 의뢰가 온다. 이혼 편지를 대신 써 달라는 것이다. 남자는 주변 지인에게 이혼을 알리는 편지를 써야한다. 15년의 결혼 생활을 했지만 전처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이혼을 결심한 남자. 일방적으로 아내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기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과 함께, 부인과의 마지막을 좋게 끝내고 싶다는 것이다. 자신은 감정이 북받쳐서 쓸 수 없으니 대필을 해달라는 의뢰인. 포포는 의뢰를 받고 고민한다. 그의 마음에 집중하여 그를 대변하려 한다. 겨울 밤하늘 같은 감색 종이와 15년 전 발매된 우표를 써서 남자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쓴다. 결국 의뢰인의 결혼 생활의 끝을 좋게 마무리해준 포포, 그리고 의뢰인은 좋은 끝이 끝으로, 좋은 시작을 하게된다. 그리고 또 다른 의뢰가 들어온다. 심각한 표정의 의뢰인은 돌아간 사람을 대신해 편지를 써 달라고 의뢰한다. 이 사람은 누구에게 어떤 사연으로 편지를 쓰는 걸까? 이번에도 포포는 의뢰인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 '대필가'라는 독특한 직업이 주는 신선함과 의뢰와 치유라는 구조의 익숙함.
낡았지만 그립고, 촌스럽지만 정겨운 아날로그 감성을 충전시켜주는 이야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심야식당> 같은 차분하고 소박하지만 가슴 벅찬 힐링 소설.
이 소설은 신선함과 익숙함을 동시에 갖은 책이다. 대필가라는 직업이 주는 신선함에 첫 눈이 사로잡히지만, 상처받은 의뢰인과 그것을 대필로 치유해주는 주인공의 역할구조는 익숙함으로 독자를 편안하게 책 속으로 인도한다. 이런류의 대표적인 작품이 <심야식당>인데, 일본의 소박하지만 정갈한 식문화와 함께, 각기 다른 현대인들의 고민과 사연을 음식으로 치유하는 내용을 담아, 가슴한 한구석을 된장국처럼 구수하고 따뜻하게 데워주는 작품이다. 이런식의 힐링 식문화를 내세운 작품이 꽤 있는데, 이번에는 '대필'이란 소재로 나왔다. 의뢰인의 사연을 경청하고 편지를 대필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과 기분까지 배려하며 편지를 쓰는 주인공. 사연,의뢰,치유라는 구조는 익숙해서 별다를게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필이라는 직업의 특색이 스토리에 잘 묻어나 톡특한 개성을 만들어 낸다. 조문 편지에는 슬픈 나머지 벼루가 눈물이 떨어져 옅어졌다는 의미에서 옅은 먹색을 쓰고, 지나간 첫사랑에게 안부 편지를 쓸때는 투명한 마음이 전해지도록 유리펜을 쓴고, 돈을 빌려줄 수 없다는 거절 편지에는 술기운과 함께 굵은 만년필로 단호함의 의지를 표현한다. 대필이라는 것 자체가 단순히 누군가를 대신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담아낸다는 점과 그 과정이 매우 새롭고 섬세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익숙한 구조임에도 진득하게 몰입해서 읽을 맛이 있다. 그리고 주인공 포포 역시 의뢰인과 소통하고, 대필을 하면서, 상대를 치유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닦아내는 과정이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정성, 배려, 관심, 치유. 이런 키워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따뜻한 기운을 흠뻑 취해 나른하게 낮잠자고 싶은 날, 이 책 한권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