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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2월
평점 :
-아내가 죽었다
눈물 한 방울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사랑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내가 죽었다. 갑작스러운 버스 사고였다. 인기 소설가 사치오는 어이없게 아내를 잃고 만다. 아내가 자신의 친구인 유키라는 여자와 함께 여행을 떠났는데 사고가 난 것이다. 그 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울분에 겨워 고통스러워 한다. 주변에서는 아내를 잃은 그를 동정하고 위로한다. 헌데 사치오는 슬프지가 않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다.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러 거짓으로 슬픈 연기를 한다. 이런 스스로에게 놀람이나 경멸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고 아내의 장례는 그저 다른날과 똑같은 하루가 되버렸다.
사치오가 아내 나츠코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그녀는 사치오가 무명 소설가 시절부터 그를 응원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다. 헌데 언제부터일까? 아내를 사랑하지 않게 되버린게? 대학 시절 동기인 나츠코와 찬란하게 사랑했고 결혼했지만 차츰 미용사로 성공을 거두는 아내의 뒤에서 사치오는 무명작가일 뿐이였다. 자존감은 곤두박질 쳤고 자존심은 구겨졌다. 부부 사이는 점차 거리가 벌어졌고, 사치오는 언제부턴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안기 시작했다. 아내가 죽었던 그 날도 다른 여자를 안았다. 그리고 아내가 죽었다.
슬픔, 후회,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이런 사치오의 매마른 감정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아내와 같은 사고로 죽은 아내의 친구 유키라는 여자의 가족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유키라는 여자는 얼굴조차 모른다. 헌데 죽은 그녀의 가족을 알 리가 있나? 그런데 우연찮게 여유가 생겼고 같은 처지인 유키의 남편 요이치를 도와주기로 한다. 요이치는 트럭 운전수로 장거리 운전을 하느라 늘 집을 비웠고 그에게는 중학교 입시 준비를 하는 아들과 4살된 딸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사치오는 별 뜻 없이 요이치의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한다.
매마른 땅에는 비가 내렸고 젖은 땅에는 움이 텄다. 사치오는 요이치의 가족과 함께 할수록 정이 들었고, 자신이 요이치의 가족의 일원이 된것처럼 그들속에 젖어들었다. 안정되고 평화로운 어느날 사치오는 요이치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사치오가 자신과 아내가 아이를 싫어 했기 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았다고 말했고 요이치는 사치오의 아내가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며 좋아해주었다는 말을 한다. 자신이 모르는 아내를 모습을 발견한 사치오는 아내가 죽은 이제야 아내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는데...
-차갑게 아리고 뜨겁게 울컥하다.
단단한 댐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모든 감정을 폭발하듯 터져나오다.
10년동안 같이 산 아내가 죽었다. 한때 사랑했던 아내가 죽었는데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녀의 죽음은 마치 일상의 한 페이지 마냥 지나갔고 아내가 죽을 때 함께하긴 커녕 다른 여자를 안았음에도 죄책감 따윈 없다. 처음 소설에서 표현한 아내는 마치 집에 둔 오래둔 가구같다. 그냥 그 자리에 있었고 어느날 없어져도 많은 가구중 하나 빈곳이 생겼을 뿐이다. 그러다 중후반이 넘어가자 아내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죽은 후에 알게 되는 자신이 몰라왔던 아내의 모습. 그리고 한가지 한가지 아내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될때마다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있는지를 한가지 한가지 떠올릴 때 한없이 무너지며 절망하는 남자의 모습이란. 처음에는 문체 자체가 너무 단단하고 담담해서 아내가 죽었다는 극적인 상황에도 동요되지 않았다. 남편의 심리를 이해할수 없을뿐더러 때론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 분노도 금방 식어버렸다. 고요하고 차분하게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 그저 그런 일본영화 한편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책을 덮고 난 후에는 열병을 앓은 것 마냥 알알하다.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쳐 올라 눈을 질끈 감는다. 댐을 막아놨는데 댐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다. 작가가 참 영리하다. 독자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버리다 한순간에 놓아버리는 재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