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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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 시즌이다. 70%까지 할인한다고 적혀있는 가게 앞에 서면 발걸음을 멈춘다. 그러고 보니 재킷이 필요했는데 하나 사야겠다 싶다. 가게에 들어가지만 나올 땐 스트라이프 티셔츠만 사갖고 나온다. 입을 만한 재킷이 없었으니 마음에 드는 거라도 사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장롱을 열면 한켠에 스트라이프 티셔츠가 쌓여있다. 색깔이라도 다양하면 다행이려만, 맙소사 색깔도 거기서 거기라니. 그래도 나는 또다시 세일 기간에,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몇 개씩 사겠지.

손에 잡히는 물품들이 몇 가지 있다. 분명 그와 비슷한, 아주 유사한 제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게 되는 것들. 책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비슷한 장르, 비슷한 작가, 비슷한 내용. 하지만 비슷한 카테고리에 들어가는데 선뜻 내키지 않는 유별난 녀석들도 있다.

김연수는 내게 그런 작가였다. 당시 한국 소설에 (지금보다도 더)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의 책 뒷표지에 적혀있는 온갖 찬사들에 배알에 꼴렸는지도 모르겠다.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거 없다는 옛말마따나 읽어봤자 하는 치기어린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달까. 몇장 펴보니 이거야 뭐 여자랑 섹스하는 내용밖에 없는 것 같고. 그저 섹스하는 내용과 사회 분위기가 복잡했던 시대를 덧붙여, 어려운 단어들만 갖다 붙인 거잖아. 그래, 부끄럽게도 김연수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이러했다.

당시의 나에겐 지식인인 척 젠체하는 인간들만 보였고, 그들이 지껄이는 사랑이니 철학이니 하는 건 다 쓰잘데기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철학이나 사랑을 괄시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사랑의 본질이 섹스에 있다는 냥 구는 모습이 우스웠다. 남녀간의 사랑은 생각만큼 고급스러운, 찬양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며 사랑이란 좀더 고고한 "무엇"이라 착각했다.

 

그러다 홍상수 영화를 보게 되었다. 단순하게 찌질한 남자들과 그들에게 구애의 대상인 똑부러지고 매력있는 여성. 한번 자고싶어서 안달난 남자들이 여자 앞에서 허세도 부려봤다 불쌍한 척도 해봤다 투정까지도 부려보지만 다 잘 풀리진 않는다. 우습기 짝이 없다. 그런데 이 남자들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까. 근데 난 왜 저런 남잘 한 번도 못 만나 본거지? 이제까지 남자들이 날 전부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닐까. 나름 썸도 타봤고, 데이트도 해보고, 섹스도 했는데. 왜 난 제대로 누군갈 만나본 것 같지 않을까. 날 사랑한다던 남자들은 도대체 어떤 감정이었던 걸까, 우리는 대체 뭐였던 거니.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다 한 자리에서 멈춰섰다. 난 누굴 사랑해본 적은 있는 걸까?

 

다행히도 지금의 난 연애를 하고 있다. 첫 연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람을 만나며 마음의 온도차가 왔다갔다하는 경험을 하니, 왜 사람들이 그리도 사랑에 휘둘리는지 이해가 간다. 도대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랑이 뭔질 갈수록 모르겠다. 그러니 가판대에 진열된 그의 책에 눈길이 가 멈췄던 건지도. 사랑이라니, 선영아. 참으로 그 어조가 궁금해지는 제목이었다. '사랑이 뭐길래 그러는 거니, 선영아,' 물어보는 건지 달래는 건지, 아니면 원망하는 건지. 안 그래도 사랑에 대해 답답한 궁금증이 가득한 순간에 이런 제목과 마주하다니. 하지만 김연수 작가를 전혀 읽지 못 했던 내가 책을 사게 된 이유는 이 문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수는 영번을 누르지 않았다. 일번을 눌렀다. 오백, 육십, 일번. '부르실 곡명은 양산도.'

"너, 선영이하고 잤지?"

 신나는 꽹과리 소리를 배경으로 강하게 에코를 넣은, 광수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노래방 안을 울렸다.

진우는 돌아섰다. 마이크를 입에 바투 붙인 채, 광수가 진우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모든 남자들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보단 남자에게 "섹스"가 정말 중요해 보인다. (성차별적인 언급으로 들릴까 걱정되지만) 섹스에 대해 남자가 여자보다 더 순정적이랄까. 그러니 그들에게 사랑이란 섹스를 떼놓고 절대 네버에버 생각할 수 없다. 하룻밤 섹스에 관대한 남자가 더 순정적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섹스의 순정은 "섹스" 자체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이지 섹스의 "대상"에게 의미부여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래서일까 여자들은 현남친이 엑스에게 어떤 식으로 사랑을 표현했는가에 집착한다면, 남자들은 현여친이 엑스와 어떤 식으로 섹스했을까에 좀더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서 좋을 건 하나 없으니, 서로를 위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얄미운 사람>은 너를 위해서만 부를게.

선영아, 미안해. 사랑해. 제발 이러지마. 옷 입지 마. 그때 내가 미쳤었나봐. 잘못했어. 사랑해. 다시 벗어. 옷."

 

 곱씹을 기억이 없으니 사랑했다는 증거가 없다. 그러니 기억을 만들기 위해 우리 섹스하자. 가겠다는 여자의 바지춤을 잡고 늘어지며 다시 옷 벗고 섹스하자고 매달리는 남자. 이 남자 홍상수 영화에 나오던 그 사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하지만 조금은 다르다. 아마도 그건 홍상수 영화를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건 남자들 밖에 없어서 그런 것 같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의 영화 속 여자들은 박제된 인상이 든다. 제아무리 소신있고 개성있는 여자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남자의 대상에 불과한 느낌. (섣부른 판단의 여지도 있겠다. 모든 작품을 본 건 아니니까) 그러할 지라도 그의 영화는 여타 로맨스 작품들과는 다르다. 현실 로맨스라 부르기엔 조금 싱겁다. 아마도 그건 (김연수 작가의 표현을 빌려) 인물의 영혼의 질이 거기서 거기라서 그런 것 같다. 질이 비슷한 인물들이 난무하기 때문이랄까.

 

 김연수 속 인물들은 아주 조금 다르다. 사소한 것에서 사랑에 대한 의심이 피어 오르는 쫀쫀한 쪼다 광수, 낭만적인 사랑과 삶에 대해 쓰며 뻔뻔하고 능글맞게 영혼의 질을 가타부타하지만 결국은 잘 알지도 못하는 진우, 그리고 선영이.  그의 작품 속 선영에겐 어떤 수식어구가 붙지 않는다. 홍상수 영화의 여자들은 보기에도 매력있고 어떠한 수식어구가 따라 다니는 여자라면, 선영인 선영이다. 구태여 갖다 붙이자면 라식 수술로 좀 예뻐진 인상의 선영이랄까. 선영은 옛날에 좋아하는 남잘 다시 만나 흔들리지만 결국은 지금의 남잘 사랑하고, 그의 아이를 갖는다. 결국 선영은 현재의 자기에게 맞는  AA컵을 찾았다. 아마 그래서 홍상수의 그녀들보다 김연수의 선영에게 더 마음이 간다. 홍상수의 그녀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매력적인 여자의 탈을 쓰고 있는 남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홍상수와 김연수는 결국 같은 카테고리의 예술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우가 서점에서 우연히 선영과 마주친 뒤 고궁에서 홀로 곤룡포를 쓴 채 사진을 찍는 결말이라니. <우리 선희>에서 선희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세 남자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렇게 그들은 사랑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선영이와 선희에게 외쳤던 것이다. 사랑이라니, 선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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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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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조금 부족한 집안의 딸이다. 남자는 재산이 많고 명예도 있는 집안의 장남이다. 여자와 남자는 처음부터 서로를 오해하고 무시하지만, 어느 순간 남자는 여자의 건강한 매력에 빠지게 된다. 여자도 점점 그에 대한 오해를 풀고 연정을 품게 된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둘 사이를 반대하는 남자 쪽 친척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남자는 사랑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여자 역시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둘은 결혼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오만과 편견"의 간략한 줄거리다. 저녁 시간마다 방송되는 일일 드라마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일일 드라마= 막장", "로코=부자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로 어느 정도 카테고리화 되어있는데, 매번 다양한 소재로 그 겉모습을 다르게 포장해도 알맹이는 웬만큼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로코물을 괄시한다. 깊이가 없단다. 하지만 어째서 로코물의 전형으로 불리는 "오만과 편견"은 출판된지 200년이 넘어서도 명작으로 불리는 걸까. 심지어 제인 오스틴은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류 작가인데다, BBC에선 그녀의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고, 할리우드에선 그녀의 작품 혹은 이를 모티프로 한 작품들을 영화화해댄다. 이렇게 넘쳐나는데도 독자들은 그녀의 작품에 염증을 느끼기는 커녕, 그녀를 최고의 작가 중 한명으로 뽑는다.

 

그런 유명세와 리메이크 작품들에 떠밀려 "오만과 편견"을 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영화나 드라마로 본 내용을 짧지 않은 분량의 활자로 다시 읽는다는 건 다소 따분하게 느껴진다. 만약 (영상 매체를 봐서 줄거리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책을 덮은 이 중 하나라면, 꼭 다시 펼쳐 보자. (제가 그랬습죠....)

 

책을 펼칠 때마다 키이라 나이틀리의 엘리자베스(리지)와 콜린 퍼스의 다아시는 온데간데 없고, 리지는 내 앞에 앉아 반짝이는 눈빛으로 연신 웃어댄다. 다아시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구석에 서 있는데 그런 다아시 옆에는 빙리 양이 대화를 이어나가려 노력 중이다. 빙리는 제인에게서 눈을 떼질 못하고, 그런 빙리를 보며 베넷 부인은 다른 부인들에게 자랑하기 바쁘다. 리디아와 키티는 무도회와 군인들을 찾아 다니고, 베넷 씨는 자신의 서재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렇게 살아있는 인물을 마주하는 게 얼마만일까. 원어도 아닌 번역 작품을 읽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읽어본 소설 중에 이와 같이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은 보지 못 했다. 500페이지가 넘는 글을 멈추지 않고 단숨에 읽어내려가는 것도 오랜만이다. 소설의 재미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 작품이랄까.

 

이 소설의 묘미는 바로 "인물"에 있다. 새로운 소재(초능력, 독특한 직업 등등)가 없어도, 200년이 넘게 리지와 다아시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작가의 인물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기똥찬) 풍자 때문일 것이다. 정말이지 그녀의 인간에 대한 관찰력과 탁월한 묘사는 책을 읽는 내내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200년 전의 사람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게 한심할 수도 있지만, 제한된 사회 생활을 하던 사람의 통찰력이 이 정도라니.. 신은 불공평하다.  

 

인물 뿐만이 아니라, 그들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당대 사회상도 소설의 백미 중 하나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사회, 경제적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얘기하는데, 제인의 수완이 보통이 아닌지라 이 작품을 단순한 애정 소설을 넘어선 사회 풍자 소설로 까지 보이게 만든다. (제인 오스틴이 역사 선생님이었다면, 정말 재밌게 역사를 배웠을 지도 모르겠다)

 

좋은 글은 "새로운" 소재와 "기발한" 구성 또는 문체가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줄거리만 알면 되는 게 아니고, 줄거리를 안다고 해서 소설의 재미가 사라지는 건 더더욱 아니다. 막장과 명작의 한 끗 차이, 그건 통찰력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통찰력은 어디서 나올까. 뉴스를 많이 보고,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술을 마시고, 책을 많이 읽고, 영화나 전시도 보고, 회사도 열심히 다니고, 운동도 하고, 교회도 가고, 외국어도 배우고. 그런다고 통찰력이 생기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그건 관찰을 기반으로 한 끊임없는 성찰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자칭 성격연구가 리지가 의자에 앉아있다. 지금 당신의 행동은 어떤 성격을 드러내는 걸까요? 그 성격은 어쩌다 만들어 졌을까요? 형형한 눈빛을 띈 리지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짓는다.   

p.31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p.71
어떤 일이든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능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실행 과정의 불완전함에는 신경을 쓰지 않게 마련이지.

p.101
콜린스 씨는 분별력 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중략] 비록 대학을 다니기는 했지만 졸업에 필요한 학점만을 땄을 뿐, 도움이 될 사람을 사귈 위인이 못 됐던 탓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키울 때 무조건 복종만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그를 아주 비굴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비굴한 성격은 이제 머리는 나쁜데 사람들과 별 교제마저 하지 않는 사람 특유의 자만심과 예기치 않게 일찍 성공한 사람 특유의 자부심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상쇄되었다. [중략] 후원자인 그녀에 대한 숭배에, 자만심, 성직자로서의 권위 의식, 그리고 목사로서의 권리 등이 마구 뒤섞여 오만과 아첨, 잘난 체와 비굴함의 혼합물이 되었다.

p.293
사랑에 빠져 있었다 해도 이보다 더 기막히게 눈이 멀 수는 없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허영심이었어. 처음 만났을 때 한 사람은 나를 무시해서 기분이 나빴고, 다른 한 사람은 특별한 호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난 두 사람에 관해서는 선입관과 무지에 따르고 이성을 쫓아낸 거야.

p.322
제멋대로인 데다가 뻔뻔스럽고 내놓고 절제를 우습게 아는 리디아의 성격 때문에 우리 가족의 비중이라든가 평판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요. [중략] 아버지께서 나서서 걔의 걷잡을 수 없는 성격을 단속하고, 그런 식으로 남자들을 쫓아다니면서 인생을 보낼 거냐고 타이르지 않으시면, 걔는 곧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될 거예요. [중략] 어리다는 것하고 몸매가 봐줄 만한다는 것 말고는 매력도 전혀 없고, 찬미를 받고 싶어 날뛰어대니 모두들 꼴같잖다고 할 텐데, 그렇게 무식하고 텅 빈 머리로 그런 경멸을 어디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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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 우리시대의 지성 5-016 (구) 문지 스펙트럼 16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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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째서 독서와 멀어지게 된 걸까. 지루하고, 머리아픈 독서는 어디서 비롯됐는지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억지로 작성하던 독서 일기는 겉표지에서 읽은 내용으로 줄거리를 쓰고 간단하게 한줄 감상으로 마무리한다. 보통 ˝많은 걸 배웠다˝라고 끝내기 부지기수. 항상 책이란 즐거움보단 배움의 도구로 다가왔다.

자발적인 배움은 즐거움을 내포하고 있지만, 나에겐 배움이란 강제성이 부과된 노역같았다. 대학에 들어가서조차 무언갈 배우는 게 정말 재밌다는 생각이 든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어째서 인지 곰곰이 따져보니, ˝성적˝ 혹은 ˝보상˝이라는 결과에 대한 집착이 항상 문제의 중심에 있었다.

좋아하는 과목을 선택해 들어도, 노력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그에 대한 흥미가 전보단 떨어진다. 내가 좋아서 했다곤 해도, 어떤 작업을 했을 때 그에 대한 반응이 미적지근할 때도 기운이 빠지기 일쑤이다. 이처럼 보상에 대한 숨겨진 기대는 배움 자체의 즐거움을 퇴색시킨다.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독서의 효용도 달라지겠지만, 독서는 일단 즐거워야 한다. 홀로 마주하여 집중을 기울어야 하는 만큼, 쉽게 지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단 완전한 독서의 시공간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게 되며, 그 온전한 매력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첫 걸음은 일단 책을 어린 시절 읽던 동화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접하는 데서 시작한다.

누구나 알고는 있지만 쉽게 실천할 수 없는 방법이다. 소설을 소설처럼 읽는 것.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처음부터 글의 갈래와 주제, 상징, 비유법 등을 먼저 외우던 이들에겐 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즐거운 독서보다 강요된 독서에 익숙하니까.

십년단위마다 새로운 공부와 자기계발에 몰두해야 하는 사회에서 지식보다 즐거움 자체를 위해 책을 읽는다는 건 잉여적 행위로 간주될지도 모르겠다. 잉여에 대한 불안감이 높은 세대는 즐거운 행위가 도피처럼 느껴져 죄책감까지 들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바라봤을 땐 인간은 가장 잉여로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죄책감없이, 부담없이, 내맘대로 소설을 소설처럼 읽는 즐거움은 남겨놔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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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의 엔드 크레디트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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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빙과를 끝내자 마자, 고전부 시리즈 2탄,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를 읽었다. 고전부의 탄생을 다루는 1탄, "빙과" 때와는 사뭇 다른 사건 진행이다. 물론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방식에는 변함이 없지만.

일단 개인적인 인상을 소설 속 인물인 사토시의 취미를 빌려 풀어보자면,
빙과를 통해 폐달을 밟기 시작한 자전거에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 다다르니 속도가 점점 붙어지는 느낌이랄까. 뭣보다 이 소설이 단순한 미스터리에 그치지 않고, 인물들의 성장을 (특히 주인공 호타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은 전편보다는 부각된다.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멀어보인다만...

(타칭) 회색인에 머무르기 좋아하던 호타로에게 있어서
자아상을 성립한다는 건, 굳이 거칠 필요없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류를 거스르지 않고, 무리하지 않으며 나이듦이 오히려 편안하고 어울린다. 그러니 무리해서 장밋빛 청춘을 남기려 할 필요도 없고, 그럴 만한 가치도 없다. 장미는 언젠가 색이 바래지기 마련이니 장밋빛이란 표현도 시간 앞에선 무색할 뿐이다.

하지만 청소년이 무리하지 않으며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딘지 어폐가 느껴진다.
경쟁하도록 부추겨지는 세태 속에서 그런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장" 자체에 끊임없는 변화와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키가 클 때는 누구나 성장통을 겪는다.
나 역시, 어릴 적 다리가 아파서 잠에서 깨어난 적이 많다. 하물며 내적 성장에 있어서 고통과 변화없이 큰다는 게 가능한 걸까? 사람이 청소년 시기에만 성장하는 건 아니지만, 외적, 내적으로 가장 많은 변화를 겪는 시기가 그때인 걸 의심할 나위 없다. 결국 우리의 청소년기는 제일 고통스럽고 예민한 성장의 시기다.

보통 청소년기의 내적 고민은 의문점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잘하는 건 뭐지, 내가 하고싶은 건? 난 커서 뭐가 될까? 뭐가 되지? 모든 질문의 시작점은 너와 다른 나다. 거기에서 자아도취적 성향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괜히 중2병이 있는게 아니겠지.) 어쨌든 소년, 소녀는 그때문에 가장 괴롭기 마련이다.

그들은 타인과 구분되는 "나"를 정립하기 위해 뒤척인다.
하지만 호타로에게는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호타로는 '나는 평범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나 호타로의 맹점은 바로 그 '평범함'이란 단어에서 비롯된다. 평범하단 건, 모든 면에서 중간에 해당한다는 소리도 될 수 있지만,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공통점은 "차이점"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단어이다. 만약 사람들에게 공통점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의 "나"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평범함이란 차이 속에 공통된 속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니 그런 말은 "나"와 "너"에 대한 고민 좀 해 본 어르신들이나 담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품지 않던 호타로에게 평범하단 건 특출난 부분이 없는 사람에 불과하단 의미였겠지만.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들여다 보려 하지도 않았던, 이전의 그가 "평범"하다는 건 건방지기 짝이 없는 소리에 해당한다.

 

그랬던 호타로는 이제 그의 친구들을 통해서, 자신을 찾아 나간다. 그가 지닌 차이점을 인지하게 된다. 동시에 그는 다른 학우들의 특별함도 깨달아 간다. 그렇게 그는 여타 고교생처럼 학창시절을 장밋빛으로 물들여가게 된다. 호타로 본인은 고개를 내저을 줄 몰라도, 외부인의 시각에서 고전부는 "아름다운 고교시절"로 비쳐진다.

진정 그는 "평범"한 고교생처럼 자각하기 시작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그래, 비록 중2병이라 놀림받을지 언정, 청소년 때는 도취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나"에게 파고들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를, 또한 얼마나 "평범"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될 거다.

 

그게 성장의 과정이니까.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겠지.

두서없는 글이 길어진다.
어쨌든 이 소설은 즐겁다. 자기의 재능을 찾아가는 '탐정'은 나름 매력이 있다. 호타로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고전부시리즈가 나올 거라는 작가의 글을 읽었다. 고전부 시리즈는 언젠가 끝나겠지만, 재능을 깨닫고 능력을 발휘하며 견고해지는 호타로 시리즈를 기대하는 건 과한 욕심일까.

(이 리뷰는 개인 블로그에 2014년 1월에 작성, 게시됐습니다) 

P198.
누구나 자기 자신을 자각해야 해. 안 그러면... 보고 있는 쪽이 바보 같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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