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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평점 :
여자는 조금 부족한 집안의 딸이다. 남자는 재산이 많고 명예도 있는 집안의 장남이다. 여자와 남자는 처음부터 서로를 오해하고 무시하지만, 어느 순간 남자는 여자의 건강한 매력에 빠지게 된다. 여자도 점점 그에 대한 오해를 풀고 연정을 품게 된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둘 사이를 반대하는 남자 쪽 친척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남자는 사랑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여자 역시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둘은 결혼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오만과 편견"의 간략한 줄거리다. 저녁 시간마다 방송되는 일일 드라마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일일 드라마= 막장", "로코=부자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로 어느 정도 카테고리화 되어있는데, 매번 다양한 소재로 그 겉모습을 다르게 포장해도 알맹이는 웬만큼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로코물을 괄시한다. 깊이가 없단다. 하지만 어째서 로코물의 전형으로 불리는 "오만과 편견"은 출판된지 200년이 넘어서도 명작으로 불리는 걸까. 심지어 제인 오스틴은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류 작가인데다, BBC에선 그녀의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고, 할리우드에선 그녀의 작품 혹은 이를 모티프로 한 작품들을 영화화해댄다. 이렇게 넘쳐나는데도 독자들은 그녀의 작품에 염증을 느끼기는 커녕, 그녀를 최고의 작가 중 한명으로 뽑는다.
그런 유명세와 리메이크 작품들에 떠밀려 "오만과 편견"을 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영화나 드라마로 본 내용을 짧지 않은 분량의 활자로 다시 읽는다는 건 다소 따분하게 느껴진다. 만약 (영상 매체를 봐서 줄거리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책을 덮은 이 중 하나라면, 꼭 다시 펼쳐 보자. (제가 그랬습죠....)
책을 펼칠 때마다 키이라 나이틀리의 엘리자베스(리지)와 콜린 퍼스의 다아시는 온데간데 없고, 리지는 내 앞에 앉아 반짝이는 눈빛으로 연신 웃어댄다. 다아시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구석에 서 있는데 그런 다아시 옆에는 빙리 양이 대화를 이어나가려 노력 중이다. 빙리는 제인에게서 눈을 떼질 못하고, 그런 빙리를 보며 베넷 부인은 다른 부인들에게 자랑하기 바쁘다. 리디아와 키티는 무도회와 군인들을 찾아 다니고, 베넷 씨는 자신의 서재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렇게 살아있는 인물을 마주하는 게 얼마만일까. 원어도 아닌 번역 작품을 읽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읽어본 소설 중에 이와 같이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은 보지 못 했다. 500페이지가 넘는 글을 멈추지 않고 단숨에 읽어내려가는 것도 오랜만이다. 소설의 재미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준 작품이랄까.
이 소설의 묘미는 바로 "인물"에 있다. 새로운 소재(초능력, 독특한 직업 등등)가 없어도, 200년이 넘게 리지와 다아시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작가의 인물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기똥찬) 풍자 때문일 것이다. 정말이지 그녀의 인간에 대한 관찰력과 탁월한 묘사는 책을 읽는 내내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200년 전의 사람에게 질투를 느낀다는 게 한심할 수도 있지만, 제한된 사회 생활을 하던 사람의 통찰력이 이 정도라니.. 신은 불공평하다.
인물 뿐만이 아니라, 그들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당대 사회상도 소설의 백미 중 하나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사회, 경제적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얘기하는데, 제인의 수완이 보통이 아닌지라 이 작품을 단순한 애정 소설을 넘어선 사회 풍자 소설로 까지 보이게 만든다. (제인 오스틴이 역사 선생님이었다면, 정말 재밌게 역사를 배웠을 지도 모르겠다)
좋은 글은 "새로운" 소재와 "기발한" 구성 또는 문체가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줄거리만 알면 되는 게 아니고, 줄거리를 안다고 해서 소설의 재미가 사라지는 건 더더욱 아니다. 막장과 명작의 한 끗 차이, 그건 통찰력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통찰력은 어디서 나올까. 뉴스를 많이 보고,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술을 마시고, 책을 많이 읽고, 영화나 전시도 보고, 회사도 열심히 다니고, 운동도 하고, 교회도 가고, 외국어도 배우고. 그런다고 통찰력이 생기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그건 관찰을 기반으로 한 끊임없는 성찰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자칭 성격연구가 리지가 의자에 앉아있다. 지금 당신의 행동은 어떤 성격을 드러내는 걸까요? 그 성격은 어쩌다 만들어 졌을까요? 형형한 눈빛을 띈 리지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짓는다.
p.31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p.71 어떤 일이든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능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실행 과정의 불완전함에는 신경을 쓰지 않게 마련이지.
p.101 콜린스 씨는 분별력 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중략] 비록 대학을 다니기는 했지만 졸업에 필요한 학점만을 땄을 뿐, 도움이 될 사람을 사귈 위인이 못 됐던 탓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키울 때 무조건 복종만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그를 아주 비굴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비굴한 성격은 이제 머리는 나쁜데 사람들과 별 교제마저 하지 않는 사람 특유의 자만심과 예기치 않게 일찍 성공한 사람 특유의 자부심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상쇄되었다. [중략] 후원자인 그녀에 대한 숭배에, 자만심, 성직자로서의 권위 의식, 그리고 목사로서의 권리 등이 마구 뒤섞여 오만과 아첨, 잘난 체와 비굴함의 혼합물이 되었다.
p.293 사랑에 빠져 있었다 해도 이보다 더 기막히게 눈이 멀 수는 없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허영심이었어. 처음 만났을 때 한 사람은 나를 무시해서 기분이 나빴고, 다른 한 사람은 특별한 호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난 두 사람에 관해서는 선입관과 무지에 따르고 이성을 쫓아낸 거야.
p.322 제멋대로인 데다가 뻔뻔스럽고 내놓고 절제를 우습게 아는 리디아의 성격 때문에 우리 가족의 비중이라든가 평판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요. [중략] 아버지께서 나서서 걔의 걷잡을 수 없는 성격을 단속하고, 그런 식으로 남자들을 쫓아다니면서 인생을 보낼 거냐고 타이르지 않으시면, 걔는 곧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될 거예요. [중략] 어리다는 것하고 몸매가 봐줄 만한다는 것 말고는 매력도 전혀 없고, 찬미를 받고 싶어 날뛰어대니 모두들 꼴같잖다고 할 텐데, 그렇게 무식하고 텅 빈 머리로 그런 경멸을 어디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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