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소설을 쓸 수 있는 용기를 나에게 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미국에서의 짧은 유학생활을 막 시작한때 였다. 같은 기숙사의 룸메이트들은 피부색이 다른 것만으로도 낯선데 말까지 통하지 않아 어색하기 그지없었고, 주변지리도 모르고 차도 없으니 어디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도 언감생심인 때였다. 그래서 그 시절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말수업이 있는 주중보다 못했다. 그런 어색한 주말이 오면 나는 침대에 누워 다운받은 영화가 나오는 노트북의 모니터만 멀뚱멀뚱 쳐다봤었다.

 

 그 때 본 수많은 영화 중 하나이지만, 아주 특별하기도 한 단 하나의 영화가 <비포 선라이즈>이다. 당시 까지만 해도 여행에 대한 기대나 환상보단 계획 짜고 짐 싸는 것에 대한 귀찮음이나 짜증남이 더 컸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여행이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그러니까 여행은 단체로 우루루 가서 내 의지에 상관없는 곳에 내려 정해진 시간 내로 사진 찍고 다시 차에 올라타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려줬다. 신체 뿐 아니라 자신감까지 혈기왕성한 때라 제시 왈라스 보다 내가 괜찮지는 안더라도 못할 것도 없다 생각했고, 충분히 줄리 델피와 같은 여자를 여행지에서 만나기만 하면 언제든 꾈 수 있다고 생각 아닌 착각을 했었다. 그런 착각이 만들어낸 자신감과 부푼 기대감을 안고, 정말 열심히 여행을 다녔다. 그런 여행들이 쌓이면 쌓일수록 비포 선라이즈와 같은 만남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감소했지만, 그래도 그런 기대감에 대한 미련의 끈을 한 번도 놓은 적은 없었다. 미련의 끈을 잡고 몇 번의 여행을 더 행한 뒤였을까, 이제 비포 선라이즈와 같은 만남이 없더라도(사실 아직도 나의 미련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다.) 여행의 참 맛을 알아 버려서 여행 없이는 내 삶이 유지되지 않고, 내 인생을 논할 수도 없다. 내가 살면서 본 영화는 다 기억나지도 않고 몇 편인지 셀 수도 없다. 그러나 내 인생에 영향을 주거나 혹은 생각할 거리를 던진 영화들은 많지 않다. 꼭 영화가 아니라도, 영화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로부터 누군가는 영향이나 영감을 받을 수도 혹은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김영하 작가님의 산문집 보다는 작가 개인적으로 영감이나 생각할 거리를 줬던 영화, 사회현상, 사람 등에 대해 작가의 생각을 풀어놓은 책이다. 보이는 혹은 관찰한 대상으로부터 작가의 생각을 소설가적 픽션을 동원하지 않고 (당연히 이건 산문집이니까) 있는 그대로 서술해 나간다. 그 서술은 예전에 경험과 연결되기도 하고, ‘또 다른 시각적 대상들과 연관을 지어가며 에피소드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의 말에서 고백했듯 가드를 내리고 상대를 맞이하는 권투선수 같은 기분같이 머쓱하고 어색하지만 그래도 작가는 덤덤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작가의 방대한 지식, 똑똑한 비유 그리고 이야기의 큰 판을 아주 치밀히 짜는 소설적 가드가 사라져서 그런지 작가와 독자가 한 층 더 친해진 느낌이다.

 

그러나 다른 작가의 산문집보다는 그 가까워짐의 거리가 아직은 좀 멀다. 그러니까, 보통의 산문집을 읽을 때에는 동네 사는 형이랑 포장마차에서 서슴없이 만나 소주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라면,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을 읽을 때에는 대학생 과외선생님과 학생이 처음 만나 어색한 듯 어색하지 않은 이야기를 이어가는 기분이랄까, 그런 거리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김영하 작가의 가드는 내려가다 목쯤에서 멈춘 듯 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뭐 김영하 작가의 산문을 자주 접하지 못한 나의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긴 한다.)

 

그래도 작가가 말한(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예측 불가능한 김영하 작가가 되는 데에는 이 산문집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이 예측 불가능했던 산문집 하나로 인해 훗날 얻어지는 부산물도 분명 있지 싶다. 대학생 김연수가 정릉의 자취방에서 아무 생각 없이 끼적였던 시로 등단 시인 김연수가 되고 소설에 자작시를 쓰는 소설가가 되었던 것처럼, 이 산문집에 쓰인 문장 하나, 단상 하나가 우리가 언제까지나 사랑할 김영하 소설의 밑거름이 될 테니까, 그러면 진짜 작가의 말처럼 이 산문집은 생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이 된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올 산문집에서는 좀 더 가드를 내리셔도 될 듯하다. 머쓱하고 어색한 정도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가드를 목보다 아래로 좀 더 내려야만 느낄 수 있는 불안함, 상대로부터 일격을 당했을 때의 억울함 아픔까지도 더 진솔하게 보여준다면 독자도 작가도 서로에게 조금 더 마음의 문을 열고 가까이 소통할 수 있는 산문집이 앞으로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다행이다, 아직 권투선수의 가드가 목까지만 내려와서. 그래서 앞으로의 산문집인 읽다’, ‘말하다가 더 기다려진다.

 

원문은 http://ddawoori.tistory.com/184 임을 밝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금 물고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신년이 되면 주변인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단체 문자를 돌리는 ‘의례적인 일’처럼 나의 어머니는 새로운 해가 오면 당연하다는 듯 ‘용하다는 철학관’으로 달려가 올해 가족의 안녕과 안부를 미리 알아보신다. 내가 이 사실을 안 것이 중학교 때 쯤 이었으니, 내 기준에서 벌써 15년 째 어머니는 ‘새해맞이 점’을 보신다. 중학교 이삼학년쯤으로 기억이 나는데, 어머니는 뜬금없이 “너는 딸을 낳아야 재물 운이 있단다, 너는 입으로 먹고 살 운명이래, 너는 역마살이 있데.”라고 말씀하셨다. 스타크래프 게임을 하느라 미쳐있던 내가 나도 모르게 역마살이라는 단어에 마우스를 잠깐 손에서 놓으며 의아한 표정으로 어머니께 되물었다. “역마살?” 어머니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그래, 역마살. 너 떠돌아다니는 운명이래.”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콧방귀를 꼈던가?, 실소를 했던가?, 여튼 “말도 안 되는 말씀마세요.” 하며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그땐, 그렇게 생각함이 당연했다. 맞벌이로 바빴던 부모님 덕에 수학여행 빼곤 부산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통학하는 유치원, 학교도 걸어서 10분 이내에 항상 있었던 그 때까지 나의 삶이었다.
 
 그런데 15년쯤 흐른 지금 그 말을 되돌아보니, 내가 점쟁이의 말을 전달하시는 어머니의 수많은 단어들 중 유독 ‘역마살’에 반응했던 이유를 알겠다. 그건 어쩌면 내 속에 ‘선천적인 역마성’이 반응했던 것이 아닐까? 그 점쟁이가 신통방통했다기 보단 그 점쟁이의 ‘수많은 겐또’ 중 하나가 맞았다고 본다. 그 이후 고등학교를 집 뒷 베란다에서 보이는 곳을 뒤로하고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였다. 부산에서 군 복무를 하고 싶어서 집 뒷동산에 있는 부대 훈련소에 지원했는데, 배치는 무연고의 충북 제천에서 군 생활 2년을 보냈다. 복학하고 착하게 살고 싶어 봉사단체에 가입했는데, 봉사한번 하려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피지라는 낯선 나라에 갔다. 그 후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그렇게 살다보니 정말 나한테 역마살이 있구나 하며 흠칫 놀랄 때 도 있고, 어쩜 그렇게 살아서 나에게 역마살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뭐가 선이고 후인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삶을 봤을 때 나에게 ‘어느 정도의 역마살’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한 ‘선천적이면서 또 후천적인 역마살’ 덕분일까? 나는 내 삶의 무게에 스스로가 지치고 힘들 때, 여행으로부터 위로받고 힘을 얻는다. 나의 여행은 특별한 것이 없다. 내가 모든 여행에서 반드시 행하는 일은 지도 없이 모르는 거리를 다리가 아플 때 까지 걷다가, 테라스 혹은 밖을 볼 수 있는 낯선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엽서를 쓰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보거나, 옆테이블에 앉은 커플들의 대화를 엿듣거나(사실 알아듣지 못한다.), 하늘을 쳐다보고 맥주를 마시며 카페에서 틀어주는 노래를 듣는다. 그러니까, 여행지에 도착하기 전엔 아무 의미 없던 ‘낯선 것들’을 나는 천천히 관찰한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알던, 일상적이던, 쳇바퀴 같던 나의 현실로부터 벗어남을 철저하게 인지한다. 그 인지 뒤에 나와 동시대를 사는 다른 장소의 사람들이 모습, 냄새, 말소리와 심지어 소음까지도 특별하고 소중함을 느낀다. 어쩌면 내 인생에 다시없을 사람들의 모습이거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을 노래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만큼 소중하고 특별하다. 이 순간이 오기까지 사실 난 ‘다른 선택’을 통해 ‘다른 순간’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나는 이 순간을 만나기 위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내가 ‘르 클레지오의 황금물고기’를 읽지 않았다면 오지 않았을 순간이다.                
        
                                          

 이렇듯 내가 선택한 매순간이 모여 추억이 되고, 나의 삶이 되고 결국 ‘누군가’를 방증할 수 있는 자신 스스로가 된다. 나 자신을 만드는 것은 ‘내가 선택한 매순간의 총합’ 이다. 매순간을 애정을 가지고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느끼는 것은 내 삶에, 나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숨 쉬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애정의 삶을 가진 사람은 누가 봐도 그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말이며, 거꾸로 돌이켜 살펴보면 자신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삶을, 지금 이 순간에 애정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여기,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일컬어지는 르 클레지오의 ‘황금물고기’는 도저히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 힘든 환경에서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여 소중하고 특별하게 여긴 주인공 ‘라일라’의 이야기가, 삶이 있다.

 어릴 적 유괴를 당하고 유괴를 당하며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그리고 팔려온 집에서 일을 하는 ‘주인공 라일라’에 대한 소개를 하며 책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두 문장만 보아도 결코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없는 환경을 다 가진 것만 같은 주인공의 삶이다. 소설의 도입부에서는 라일라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지를 독자들은 잘 알지 못한다. 하녀로 지내는 주인집의 집밖에도 나가기 싫어하며, 주인집 할머니의 품만을 맴돌려하는 그냥 ‘안주하는 주인공의 삶’을 조명한다. 적어도 주인집 할머니 랄라 아스마가 살아있을 동안은 그랬다. 아스마의 사후 그의 아들의 성추행과 며느리의 학대를 견디지 못 해 집밖으로 뛰쳐나가면서 그녀의 인생 2막이 시작된다.
 
 여인숙에서 만난 인연들과 더불어 어린 나이에는 도무지 하기 힘든 경험을 그녀는 겪게 된다. 신기한 것은 '여인숙을 벗어난 후의 ‘힘든 경험들’속에서 라일라는 결코 자신의 삶을 비관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한다. 프랑스, 미국의 이곳저곳을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들과 함께 자고 먹으며 다양한 경험을 한다. 직접적인 체험 뿐 아니라 각국의 사람들과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세계명작을 읽고 하킴의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의 경험과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상황이 ‘아주 평온한 분위기’에서 이루어 졌다면 독자들에게 아무 감흥이 없었겠지만,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부랑자 촌에서 사는 동안, 밀입국을 해 불법 체류자로 힘든 삶을 살면서 혹은 지하 차고의 추운 방바닥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지만 그래도 라일라는 ‘끊임없이 삶에 대한 탐구와 심미’를 멈추지 않기에 독자들은 감동한다. 


 그런 ‘탐구와 심미의 삶’이 무덤덤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가끔은 라일라가 자신의 삶을 방조하고 방관하는 듯해 보이지만, 독자가 책의 끝을 향해 다다르고 있을 쯤이면 아마 스토리의 구성에서 깨닫게 된다. ‘라일라는 자신의 삶을 너무도 사랑했구나!!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야 말로 매순간의 삶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삶의 터전과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라며 독자들은 책의 진미를 맛보게 된다. 이는 아마 작가 르 클레지오가 노마드적인 자신의 삶과 경험 그리고 육십이 다되어가는 나이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무덤덤함으로 ‘황금 물고기’를 엮었기에 가능한 구성이다. 작가는 직접적인 대화, 감정적 표현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가 아닌 이야기의 흐름과 전체의 정황을 통해 라일라가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는 증거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는 주인공 라일라가 고향에 도착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게 정말고향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어릴 적 자신이 납치될 때 느꼈던 사막의 모래바람, 까마귀 울음소리 그리고 자신의 태생을 유일하게 입증해 주었던 초승달 귀걸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초승달 부족'의 노파를 보며 자신의 고향임을 믿고 평온에 상태에 도달한다. 여기서 작가는 라일라의 고향으로 회기를 보여주며, 우리가 자산의 삶을 끊임없이 사랑으로 탐구하고 심미하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라일라는 그 수많은 고통과 두려움의 순간들을 결코 고통스럽지도 두렵지도 않게 새로운 삶을 받아드렸다고 책은 보여준다.
 
 직장인 3년차. 회사라는 '그물'에 '나의 자유'를 빼앗겼다고 여기며 사는 나에게 아니, 자유와 삶의 의미를 세상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우리에게 '자유의 황금물고기'는 말한다. 모든 인생에 진흙탕은 있다. 진흙탕에서 안 빠지고 살아 나오려면 종종걸음보단 무릎을 조금 높게 올리며 경쾌하게 걸으라고. 진흙이 옷에 튀거나 얼굴에 묻는 것을 두려워 말고 경쾌한 걸음으로 그 순간 즐기고 사랑하라고. 그러다 보면 진흙탕은 '아늑했던 순간과 추억'이 되고 푸른 강 주변이나 조용한 오솔길을 걷는 너 저신을 보게 된다고 '자유의 황금물고기'는 말한다. 그러는 동안 많이 보고, 즐기고, 냄새 맡고, 맛보라고. 네가 너 스스로 너의 존재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그게 '너다운 너의 존재'를 만들고 사랑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원문은 http://ddawoori.tistory.com/178 임을 밝혀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실험_바이오스피어2 2년 20분] 서평단 알림
인간 실험 - 바이오스피어 2, 2년 20분
제인 포인터 지음, 박범수 옮김 / 알마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도 '우주인'을 배출한 당당한 국가가 되었다.

왜 이 책이 그 이야기를 하려는지 난 다 읽고나서도 계속 의문이 들었지만 우주와 관련되어 있다는 공통분모를 사람들에게 호기심 자극용으로 사용하려는 출판사의 의도가 다분해서 기분이 나빳다. 내가 보기에는 이소연씨와 그리 큰 관계가 없는데도 말인다.

바이오 스피어 2의 체험자인 제인 포인터 씨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책으로 낸 것이다.

바이오 스피어 2에 가기위해 거쳐야 했던 노력과 그 곳에서 살기위해 했던 일들 등 바이오 스피어2에서의 생활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사실 나는 바이오스피어 2 실험이 진행 될 당시 너무 어린 나이라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걸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신선했다.

하지만 이 책을 덮을 때 쯤 내가 깨달은 한가지는 '그냥 딴데 가서 살 생각하지말고 있는 지구나 잘 지키자.'였다. 약 10여년 동안 우리의 과학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지구를 벗어나 다른 행성에서 정착해 살 궁리를 하기보다는 그 노력으로 우리 환경을 깨끗이하고 지키는데 사용하는 것이 더 빠를것 같다.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그 작은 공간에서 마저 그 적은 수의 사람이 서로 싸우는 걸 보니...

역시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를 벗어나 무엇을 하고 삶을 유지하려는 짓은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너무나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지금도 늦지않았으니 그 노력 자본 기술 우리의 원래 터전에 투자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지구를 지키는 것이 빠르겠습니다.

서평단에서 제공하는 괜찮은 책을 한 번 받아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어떻게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황석영 선생님의 책을 통해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그런 것들을 느낄 수는 있었다. '무기의 그늘' 같은 경우는 선생님께서 직접 베트남전을 참전하시고 쓴 글이라 독자들에게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손님'과 같은 경우도 선생님의 북한 방문이 소설의 상당부분을 더욱 치밀하고 구체적인 글로 확립시켜주었다. 이러한 책들은 간접적으로는 선생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주이기 보단 부라고 할 수 있다.

오래된 정원은 선생님의 이야기가 주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쁘게 포장해 놓았을 뿐이다.

이 땅에 민주화라고 할 만 한것들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 그 뿌리를 굳히기 위해 했던 노력들. 그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었을까?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에 고통과 두려움 따위를 그의 직접적인 경험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공감을 사기란 쉽지 않은 일이 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 소설이 꼭 그의 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전달되어서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 만은 아니다. 소설가로써 어려운 현실에서도 피어나는 사랑의 묘사는 보는 이들을 안탑깝게도 하고 애타게도했다. 그리고 언제난 그랫든 그의 소설에는 우리의 시대가 담기어 있다.

베를진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분단의 현실을 공유하고 있던 독일의 통일을 보면서 우리도 언젠가 통일이 될 수있다는 생각, 꼭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다짐같은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노동자 계급의 인간다운 대우와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를 바랬던 그의 노력.

그리고 통일에 대한 염원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와 접목시킨 황석영 선생님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태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역에서 내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이러한 행동을 통해 자신이 어떠한 시련과 고난을 격더라도 절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의 생각과 사상이 세상에 비록 배척당하고 탄압당하더라도 그는 꿋꿋하게 밀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반면 나는 요즘들어 왼손도 잘 쓰지 못하고 오른손도 잘 쓰지 못하는 어정쩡한 양손 잡이가 된 것같다. 분명 그도 오른손을 사용할 줄은 알 것이다. 하지만 왼손을 주로 쓰는 것이 사회의 약자를 감쌀 수 있고 이 나라가 올바로 가는 길이라고 그는 믿고있다. 난 아직도 왼손을 주로 써야할지 오른손을 주로 써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진실이다. 오른손을 쓰면 많은 사람들을 경쟁과 시장논리라는 이름아래 버리고 가야한는 것을...  그렇게 되면 내가 바라는 따뜻하고 온기가 느껴지는 사회와는 이 나라가 멀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선생님의 소설을 통해 왼손과 오른손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다.

80년대를 이해하기는 부족하지만 황석영이라는 작가를 이해하긴 충분한 책이라는 로쟈님의 평이 딱인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