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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몇 달 전이었을 것이다. 친구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라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을 꺼내왔다. 그때까지 나는 베르메르라는 화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또, 영화가 소설을 바탕으로, 그리고 그 소설이 실존하는 그림을 보고 쓰여진 것조차 몰랐다. 말 그대로 아무 지식 없이 친구의 손에 이끌려 영화관에 가게 됐다.
사실 좀 미심쩍었다. 그리 작지 않은 영화관에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저녁 때 단 두 회만 상영을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주목을 덜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다른 영화를 보고 싶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떠들어대던 것들로 말이다. 하지만 친구가 워낙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괜히 돈하고 시간만 버리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표를 끊었다.
불이 꺼지고 드디어 영화가 시작되었다. 야릇한 음악이 흐르고, 새하얀 얼굴의 인형같은 소녀, 스칼렛이 등장했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멋지게 나왔던 콜린 퍼슨이 베르메르 역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영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천천히 진행되는 이야기. 일견 평화로워 보이나,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문득문득 그리트와 베르메르의 교감이 이루어질 때면, 나까지 덩달아 찌르르, 하고 전율이 일었다. 마침내 베르메르가 그린 그리트가 화면 속에 드러났을 때 가슴이 덜컥 뛰었다.
결국 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멍한 상태였다. 내겐 생소한 델프트의 풍경, 순수한 소녀의 얼굴로 묘하게 색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그림. 결코 말이 많지 않았던 그리트와 화가 베르메르 사이의 야릇한 분위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영화를 볼 당시에 나는 무방비 상태였다. '북구의 모나리자'라고까지 불리는 그림을 몰랐으며, 베르메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아무 정보도 없이 백지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시 영화를 볼 생각은 없었다. 괜히 한번 더 봤다가, 처음 접했을 때의 짜릿한 기억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대신, 책을 들었다.
나는 '그리트'라는 소녀가 트레이시라는 여인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허구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아무 의심 없이 그리트의 존재를 믿었던 것이다. 어쨌든 책과 영화를 비교해 볼때, 책이 좋았던 점은 세세한 묘사와 설명이었다. 그리트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소설은, 작은 부분에도 세밀한 묘사를 덧붙였다. 그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 책의 매력이자 단점이었다. 영화 속의 그리트는 결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보이는 행동만으로, 그녀의 속내를 짐작했다. 책 속의 그리트는 내 상상과 조금 틀렸다. 신비로움은 덜 했지만, 책 속 그리트의 현실적 감각은 마음에 들었다.
영화와 책은 엔딩 부분에서 조금 차이가 났다. 영화의 엔딩 쪽이 좀 더 매력적이긴 했지만, 오히려 카타리나에게 받은 진주 귀고리를 돈으로 바꾸는 쪽이 설득력 있었다. 책의 그리트는 로맨틱한 꿈에 젖어 살지 않았다. 그녀는 피터와 결혼했고, 아이까지 낳았다. 평범한 로맨스였다면, 그리트가 평생 베르메르의 추억을 간직하고 독신으로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주 귀고리를 달았던 소녀는 결국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고,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것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책과 영화. 둘 다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 영화 쪽에 좀더 높은 점수를 주지만, 책도 충분히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다만, 영상 매체의 리얼한 전개와 생생한 긴장감을 책에서 똑같이 전해 받지 못했고, 이미 영화를 본 후 배우들의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책에서 큰 감동을 받지 못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소녀의 애매모호한 표정만으로 이와 같은 스토리를 읽어낸 트레이시의 재능에 존경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