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 받는 아이들 살아있는 교육 14
이호철 지음 / 보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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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전부인 작은 분교의 일개 초등학교 교사가 써 내린 글들이 '해방 이후 초등 교육 현장에서 거둔 최대의 교육성과' 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내세울만한 학벌이 있는 것도 아니요, 쌓아놓은 부가 하늘을 찌르는 것도 아니며, 교수나 국회의원, 의사처럼 어디 가서 떳떳하게 내밀만한 명함 한 장이 있는 그도 아니건만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다.

사실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추측컨대 아마도 이 땅에 그를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고 또 많을 것이다. 그는 잘 나가는 교수도, 9시 뉴스에 밥먹듯 등장하는 국회의원도, 작은 눈을 감쪽같이 크게 만들어준다는 유명한 강남의 모 성형외과의도 아니므로 말이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 우연히라도 이호철이라는 사람 혹은 그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면 일단 지나치지 말고 진득하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 혹은 그의 이야기에 몰두하라고강권하고 싶다. - 확언하건데 그는 잘나가는 교수나 유명한 국회의원, 의사가 줄 수 없는 어떤 진귀한 것을 선물할 것이다.

뭐랄까? 이 책은 상처받은 사람이 단상에 올라 적나라하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보이며 아픔을 성토하는 대회(?) 같은 느낌이 든다. 일기를 '검열'하는 부모로 인해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로 충만한 아이의 기가 꺾인다. 유일한 숨통이었던 일기라는 '내 공간'마저 부모라는 감시자에게 점령당했으니 그 답답함이 오죽하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화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아직 '덜 자란' 어른에게 영문도 모르고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은 아이의 가슴에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남는다. 오죽하면 엄마, 아빠를 '사랑한다'가 아닌 '증오한다', '무섭다'라고 표현하겠는가. 매일같이 아빠가 엄마를 때리고 엄마가 아빠에게 독설을 퍼

붓는 건강하지 못한 가정은 또 어떠한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사는 것 마냥 아이는 불안에 떨 것이고, 이 불안한 하루하루는 아이에게 폭탄이 터졌을 때만큼이나 깊은 상처를 남길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진한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상처가 감동을 주는가? 아니면, 그저 상처받은 아이들에 대한 가여움이 감동으로 오해된 것인가? 그도 아니면, 도대체 이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는가 하는 분노가 감동을 만들어낸 것인가? 아니다. 감동은 상처 자체 혹은 상처에 대한 동정이나 분노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그 상처를 이해하는 마음, 어루만져주는 손길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호철 선생님은 그 마음을, 그 손길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을 하고는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서 피멍이 들었다고 적고 있는데도, 집에 돈이 없어서 고아원에 가야할 지도 모르겠다고, 집나간 엄마가 보고싶어 오늘도 한없이 울었다고 적고 있는데도 그런 아이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살았던 나의 평범한 과거사 속에는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없는 무언가가 그들에게서 발견된 것이다. 10살, 이제 겨우 곱셈이며 나눗셈을 배우고, 이제 겨우 나리나리 개나리를 부를 나이에, 콩쥐팥쥐며 신데렐라를 읽으며 권선징악을 배울 나이 10살에, 이 팍팍한 세상 이제 고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

처음에 나는 그런 아이들이 한편 무섭고, 한편 가여웠다. 그러나 나는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의 죽고 싶다는 말이 실제로 죽음을 표현하는 말이 아님을, 그 말에 삶에 대한 의욕이 얼마나 강하게 내비치고 있는지를 나는 정말이지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아이들은 잘 알고 있으리라. '이제 고만 죽고 싶다'는 말이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말과 같음을 선생님이라면 알아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아이들과 선생님 사이의 그 알 수 없지만 왠지 알 것 같은 대화, 그리고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믿음으로 가득한 일기장, 그것이 한없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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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
이훈구 지음 / 이야기(자음과모음)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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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도대체 누가 살인자인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이 책에 씌어진 대로 도저히 살인범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가녀린 몸매에 맑은 얼굴을 한 이은석이 죽인 것인가? 아니면, 알게 모르게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 부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도 아니면,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 은석의 몸을 빌어 그처럼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것인가? 도대체 누가 살인자인가?

넘겨진 책장이 넘겨야할 책장보다 많아 질 즈음 나는 또 한사람이 죽어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강O와 황여사가 죽임을 당하기 전, 그보다 훨씬 전부터 죽어가고 있었던 사람. 망치를 들고 방문을 나섰던 2000년 5월 21일이 아닌, 그보다 훨씬 전부터 수차례 끔찍한 살인을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저지르고 있었던 사람. 그들을 죽였지만 그들로 인해 이미 그 자신도 죽어가고 있었던 사람. 그는 이은석이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당방위'라는 말이 있다.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가 바로 '정당방위'이다. 자신을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넣는 부모에 대한 정당한 방위로 은석은 망치를 휘두르지 않았을까? 그대로 두고보면 내가 죽게 생긴 판국이라 더는 물러설 수 없어 망치를 휘두른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살인은 이은석이 아닌 그의 부모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랑을 그리워했으나 사랑을 몰랐던 그리고 사랑을 알았으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틀렸던 은석의 부모는 우리가 대학 교정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순진하고 앳된 모습의 은석을 살인자로 내몰았다. 그 아픔, 그 고통이 망치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게끔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았던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사람이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정에서 사랑 받지 못하면 세상 어느 곳에서 자신이 사랑 받고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며 나는 은석에게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것이 너무슬펐다. 그는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주고 나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 비밀일기에도 털어놓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에게는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슬프다고, 아프다고, 죽어버리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 자신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비밀일기장에도 그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그의 '나'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자신을 형편없는 놈팽이, 멍청이, 비굴한 놈, 겁쟁이로 몰아세우다가 그는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왜 나를 이렇게 욕해야만 하는가?' 그는 자신이 쓸모 없는 인간이므로 아무도 그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며 자학을 하는 그 순간에,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고 사랑해주지 않는 다는 사실에 '내가 정말이지 형편없는 인간이므로, 멍청한 겁쟁이에 비굴한 인간이므로 그럴 것이다'라는 너무나도 서글픈 이유를 갖다 붙이는 그 순간에 어쩌면 가장 사랑과 이해가, 무엇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지나친 학대, 사랑 없는 부부관계가 위태롭게 지켜내고 있는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끝'으로 도망치고 싶을 때, 누군가 은석의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더라면 그는 결코 망치를 들지 않았을 것이다. 더 큰사랑으로 자신을 아프고 고통스럽게 하는 그들을 오히려 어루만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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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페포포 메모리즈
심승현 글, 그림 / 홍익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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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바흐를 어지간히 좋아해 꼬박 몇 달간 모은 돈으로 스피커 한 조를 산 청년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스피커라 할 지라도 나이든 그의 청력을 되살릴 순 없다. 바흐를 완전히 느낄 수 없는 청년은 상심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소리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온 그의 귀로는 섬세한 음을 다 잡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건 어린아이들 뿐.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레고 박스며 태권V에 정신이 팔려 음악 듣는 것을 어지간히 싫어했던 어린 날의 그는 아주 섬세한 것까지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던 황금 같은 시기를 그렇게 다음으로 미뤄온 것이다.

'어렸을 땐 좋은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지만 듣기 싫어하고. 어른이 되면 좋은 소리를 듣고 싶은데도 다 들을 수 없다.-파페포포 메모리즈 중-'

작가 심승현은 '미룸증', '조급증' 등 갖은 중병을 앓고 있는 현대인에게-차갑게 식어버린 가슴을 가진- '파페포포 메모리즈'란 책을 선물한다. 이 책 속에는 서툴지만 예쁜 사랑을 만들어 가는 맑은 영혼의 파페와 포포가 살고있다. 작가 심승현은 파페와 포포를 통해 사랑의 진정한 가치라든가 가정이란 울타리의 소중함, 친구의 의미 등을 깔끔하면서 아기자기한 그림과 100% 농축된 짤막한 글에 모두 담아내고 있다.

누군가 '파페와 포포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막 끓여낸 코코아가 주는 뜨거운 감촉! 아마도 행복이겠죠?'라고 말하겠다. 실제로 <파페=심승현>이 듯이 이 책을 읽은 수많은 독자는 '파페=김00', '포포=이00', '파페포포=김,이커플'이라는 식으로 책 속의 파페와 포포를 자신의 모습과 끊임없이 겹쳐 보았을 것이다.

나 자신은 파페포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파페포포와 같은 모습을 한 나를 만나게 됐다면 그만한 수확도 없으리라. 이미 기억의 저편에 잊혀진 줄 알았던 내가 파페포포라는 이름으로 슬그머니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가슴의 밑둥에서부터 번져오는 뜨거움이란! 그렇다. 분명 행복이 주는 뜨거움일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이 책 속에서 객관성이라는 단어를 찾아냈다. 가장 주관적인 글이 가장 객관적인 글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글쓴이가 표현한 지극히 주관적인 사상 혹은 감성이 독자들로부터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게 할 때, 그 글은 작가 개인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자들이 하나같이 뜨거움과 위안이라는 선물을 챙겨 가는 '파페포포 메모리즈'야말로 '객관적이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객관적'이라는 힘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 찌든 현대인의 가슴에 쉽사리 식지 않을 코코아의 뜨거움을 선물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지금 혹은 언젠가 내 옆에서 이 책을 읽거나 읽고 있을 그 사람이 심승현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항상 같은 편을 걷는 사람. 사람이건, 트럭이건, '우리'를 가르려는 무엇의 방해공작에도 잡은 손놓지 않고 함께 같은 편을 갈 수 있는 그런 사람. 더운 날, 축구하는 그 사람에게 차가운 음료수를 건내기위해 땡볕에 앉아 덩달아 땀 흘리는, 가게 아주머니 눈치에도 아랑곳 않고 음료수를 찬 걸로 바꿔 가는 내가 될 수 있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이 책은 30분이면 다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다. 할머니가 사랑하는 손주녀석을 위해 아껴뒀던 양갱을 조심스레 꺼내놓는 것처럼, 아껴뒀다가 하루에 몇 분씩 꺼내보고 싶다. 순서대로 읽고 싶은 책도 아니다. 우연히 한번 펼쳐 본 페이지에서 파페와 포포를 만나고 싶다. 설령 이미 본 페이지를 다시 펼쳤더라도 그 이야기는 새롭게 다가와 새로운 감상에 젖게 하고 새로운 감동을 줄 것이다. '5분의 독서가 주는 여운은 무한하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나는 하루 5분씩, 그것이 주는 무한한 여운에 유감없이 심취해 하루를 값지게 시작하고 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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