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가상의 시간,가상의 사건들의 연속된 집합체이다.
또한 읽는이들은 소설가가 만든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것에서

감정이입을 통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간접 경험하는것이다.

사람이 소설을 읽으며 허탈감을 느끼기는 매우 어렵다.
이야기가 허구라는걸 이미 염두해 놓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수아비춤'이란 장편소설을 읽으며 그 벽이 허물어짐을 느꼈다.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의 소설이라 덮어놓고 까닭없이 높이 평가하는것은 아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은 이럴때 필요하다는 걸까?

'허수아비춤'에 등장하여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들은 열명을 채 넘지 않는다.
그들이 벌이는 듣도보도 못한 대한민국의 상위 5%에 해당되는 이들만의 해괴망측한 행각들은
그들 5%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초반부터 마지막장을 덮을때까지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답답함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끼도록 해준다.
최근 모기업의 비리 사실들을 방송을 통해 접해 들을때마다 작가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현실감을 더한다

초반에서 중반부분까지 읽을때에는 소설속에 나오는 회장외의 인물들이 회장의 돈에 놀아나는
허수아비라 생각하고 읽었으나 마지막장을 덮으며 필자가 이야기한 허수아비란 등장인물들이 아닌
바로 대다수의 국민들이라는것을 깨닫게 된다.

소설속에서는 대한민국은 겉모습은 국가의 이름에도 민(民)이 들어갈정도로 민주주의국가를 외치며
근 반세기를 지내온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본의 중세 봉건주의시대를 살고 있다.
자본이라는 절대권력을 가진 대기업이라는 지주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나라의 주인이 아닌 노예'라는 작가의 말,
더욱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이중노예란 말이 머리속에 남는다.
대한민국은 지금도 자본봉건주의에 빠진 국가라는 것이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심한 표현으로 절대자들에게 목숨까지 내놓고 사는 봉건노예인것이다.
실제로도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체에 근무하며 목숨을 잃고 있으나 그 보상은 극히 미미하고
진실들은 매스컴에도 자세히 보도되지 않는체 사라지고 있는것은 사실이다.

사견(私見)으로 책의 제목에서 '들의'라는 글이 빠진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아마도 책의 제목은 "허수아비들의 춤"이 되었을것이다.

사람이 원해서 춤을 추는 것에는 허수아비외에 마리오네트인형이 있다.
그런데 왜 작가는 마리오네트인형 대신 허수아비로 책의 제목을 정했을까?
 허수아비가 추는 춤과 마리오네뜨인형이 추는 춤은 서로 비슷하면서 다르다.
일단 사람이 필요로 해서 춤을 추는 것은 같다.

다만 허수아비는 바람이 부는대로 부는 춤이고 마리오네뜨인형은 인형술사가 조종하는대로 춤을 추는것이다.
마리오네뜨인형은 인형술사의 조종에 따라가 춤을 추기때문에 사람이 조종을 멈추면 더이상 움직이지 않고 춤을 멈춘다.

하지만 허수아비는 바람에 따라 춤을 추기때문에 멈출 줄을 모른다.
또 한 방향에서 불던 바람이 멈추고 다른방향에서 불어오면 갈대처럼 그 방향에 맞추어 하염없이 멈추지 않고 춤을 춘다.
거대기업, 또는 거대자본의 무차별적인 로비의 바람에 따라 대한민국의 정치가들과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오늘도
멈추지 않고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수아비처럼 기둥이 낡아 부러질때까지 말이다.

스스로 거대자본의 노예라는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미래도 하염없이 허수아비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소설이라는 허구의 포장을 씌워
우리에게 가려진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것일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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