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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Rosso (리커버) ㅣ 냉정과 열정 사이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2월
평점 :

28살의 아오이는 마빈과 살고 있다. 마빈은 올바르고 공정하고 명석하다. 허벅지, 관대함, 차분한 말투의 마빈을 사랑한다. 마빈은 그녀를 보석처럼 귀하게 사랑한다. 조용한 생활, 온화하고 부족함도 과함도 없는 순조롭게 흘러가는 나날들.
마빈은 신사적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 때론 그녀를 숨 막히게 한다.
-소유는 가장 악질적인 속박인걸요.
책벌레지만 책을 읽고 싶은 거지 갖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보석을 만지고 싶지만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마빈의 불안을 때론 느낀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 마빈에게는 하지 못하는 꿈 이야기, 꿈속에 20여 년 전 그녀의 전부였고 우주였던 쥰세이가 있었다.
얼음 속에 박제해놓은 존재라고 각인하지만 그녀 가슴속에 박제된 존재 안의 온기가 느껴질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털어냈다.
나는 보석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는 여자의 생활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석을 사는 여자의 생활과 보석을 선물받는 여자의 생활을.
55p
이 말이 마빈을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느껴졌다.
고등학교와 대학 친구 다카시와의 재회는 쥰세이에 대한 냄새를 가져왔다. 먼 옛날의 사랑으로 끝나지 않은 무엇인가가 남아있었다.

나는 불현듯 그러고 싶어져 마빈을 꼭 안았다. 팔과 가슴은 따뜻한데, 에어컨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는 등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67p
마빈을 사랑하고 언제나 그는 따뜻한 사랑을 주지만, 그녀의 심장에 온전한 따슷함은 채워주지 못하는듯하다. 문장들이 간접적으로 아오이의 마음을 표현하는 작가의 감성적인 표현법에 매료되었다.
물론, 이 비는 그 비와는
전혀 다르다. 여름이고 밀라노에
내리는 비다. (중략)
그 겨울비, 나는 그 방에 갇혀있다.
69p
스무 살이었다. 대학 뒤뜰에서 십 년 후 5월 자신의 생일 피렌체의 두오모에 함께 오르자고 약속해달라고 사랑고백을 했었다.
쥰세이의 편지는 봉인한 기억, 꽁꽁 묶어 멀리 밀쳐내 버렸던 기억을 현실 세계로 풀어냈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들판처럼 넉넉하고, 환한 표정으로 웃는 사람이었다. 들판처럼 섬세하고, 그러면서 마음 어딘가에 야만적인 것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피렌체의 두오모는 사랑하는 두오모야.
두오모에 오른다는 것을, 쥰세이와 나눈 약속을 한 시도 잊지 않았음을 인정하며 자신의 생일 주저 없이 기차에 올라 피렌체로 향한다.
정말 오고 말았어. 정상에 가까워지자, 신선한 바람 냄새가 났다. 한 계단씩, 하늘로 다가간다. 하늘로, 그리고 과거로, 미래는 이 과거의 끝에서나 찾을 수 있다.
224p
사랑은 용광로처럼 뜨겁다가도 빙하처럼 차갑게 부서지기도 한다. 때론 서서히 식어가기도 한다.
누가 보아도 완벽한 사람, 따뜻한 사람, 그렇지만 따뜻함도 심장을 완벽히 녹일 수 있는 불꽃이 될 수 없었다. 심장을 지배하는 자가 있기라도 한 걸까? 차갑게 식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사랑이 계속 그곳에 웅크리고 있었음을,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는 것이 사랑이리라.
너와 내가 머물렀던 열정, 심장 그곳으로.
아오이와 쥰세이의 잊을 수 없는 잊혀지지 않는 러브스토리를 24년 만에 다시 만났다. 20대와는 달리 사랑에 얼었다 녹았다 하는 청춘은 아니지만,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에 빠져들며 어느새 아오이와 쥰세이의 러브스토리 속에서 그들의 심장소리로 쓰셔진 글들에 녹아들었다. 사랑은 그런 것이지. 그럴 수 있는 것이지.
서로를 분신처럼 사랑해 과거에 못 박힌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 24주년 기념 특별 리커버 사랑과 열정으로 내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