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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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그닥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내가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곳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침략을 받아 몰살에 가까운 원시문화의 멸망을 겪은 후, 현재의 시간까지 수많은 세계사적 현상의 변두리에 있었음 정도만 알고 있는 정도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씩 듣게 되는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사냥을 나가는 이들이 며칠간을 풀로만 식사를 하며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거친 뒤 움직이면, 사냥의 대상이 될 동물들이 그들을 따라나서며 교감을 통한 먹이사슬의 순환에 수긍한다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아마존의 깊은 밀림속엔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어쩌면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소설속에서 표현하는 마술적 세계는 실제하는 현상에 기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술적 감각이나 신비로움도 존재하지만, 소설속의 공간은 어쩔 수 없이 비현실적이지만은 않은 우리와 같은 인간들의 세계이고, 그것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현상들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시작과 끝을 통해 인간의 문명과 사회가 시작되고 저물어가는 모습은 인간의 흥망성쇠 그 자체이다.  게다가 흥망성쇠의 과정이 자본과 권력의 존재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동시에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마꼰도는 성서적이기도 하다.  사람을 죽인 원죄를 짊어지고 늪지대에 터전을 잡은 인간이 노동으로서 자리를 만들고 사회를 만들며, 고독을 달래려 성적인 교류를 나누는 모습의 대부분은 창녀나 집시와의 관계이자 근친상간이 대부분인 모습은 구약 초기시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전쟁이라는 인간의 싸움에서 퍼뜨린 자신의 수많은 자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마에 십자가의 부적을 받고 하나하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은 대를 이은 정죄를 연상케 하며, 근친상간으로 인하여 집안의 대가 끊기는 모습은 금기를 행함의 대가로 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예언되어 있었다는 마지막은 묵시록을 연상케 한다.  신비로움과 현실성, 마술성과 합리성이 공존하고 뒤섞인 마꼰도는 성스럽고 타락했으며, 모여있으나 외롭고, 평화롭고자 하나 억눌림과 탄압을 겪어야 했던 종교적 인간사회의 현실적 축소판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문장은 무척 신비로우며 마력이 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도 그랬지만, 그의 문장에는 본능에 기초한 인간의 자유를 느끼게 하는 어떤 관능이 서려있다.  풍부하고 부드러우면서 육감이 살아있어, 읽다보면 마치 잠자고 있던 몸 안의 관능적인 매력이 깨어나는 듯 하다.  그 관능은 너무 마술적이어서 합리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과 표현까지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끔 한다.  그러다보니, 자본과 권력이 인간을 휘두르는 대목에서는 그것이 그닥 심각하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자연상태에 있다거나 자연 자체가 글을 통해 읽는 이에게 다가올 때에는 구체적이지 않은 자유로움과 풍부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미녀 레메디오스가 침대시트를 붙잡고 승천하는 어처구니없는 대목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신기한 독서경험이라니..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펜에는 분명 어떤 마술적 힘이 서려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진지하면서도 신비롭고 애처로우면서 아득한 느낌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내 몸에서 활짝 피어오른 관능과 함께 오래도록 진지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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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하버드 철학 리뷰 편집부 엮음, 강유원.최봉실 옮김 / 돌베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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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주제나 현상을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사유의 작업을 철학적 사고라 함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에 있어 필요한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적 사고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상식수준의 논리와 이해만 갖춘다면 그닥 어려울 일도 아니고, 정신적인 면에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철학'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떤 딱딱함을 극복한다면, 우리의 삶에 있어 사유하는 모든 과정은 일반적 의미의 철학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철학이라는 단어가 딱딱하고 어렵기만 한 이유는 어쩌면 사유의 기회조차도 갖지 못할만큼 복잡하고 여유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때문인지도 모른다.  또는 사유할 이유를 느끼지 못할만큼 물질이나 자본에 익숙해지고 의존적인 무념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철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철학에도 나름의 전문적인 논리와 논리의 첨예함을 쌓아 만들어낸 심오한 사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등등의, 한번쯤 들어본 철학자는 많아도 그들이 말하는 그들의 사유를 바라보면 이름과는 달리 무척 생소하고 어렵기만 하다.  때로는 그들의 사유가 대체 논리적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고, 이걸 현실세계나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고 녹여내야 싶을 정도로 이질적이기까지 하다.  저자가 쉽게 풀어낸 삶 속의 철학적 사유를 말하는 책이 아닌 한, 나 역시 철학에 관한 책들은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어렵고 이질적이어서 쉽게 이해해내지 못했다.  게다가 철학의 전문분야에서는 철학의 계보를 이야기하며, 시간과 철학자를 이어내려오는 사유의 연결고리를 분석하기도 한다.  의학이 일상에서 풀어내는 수준의 이야기가 있다면 철학도 일상속의 철학이 있고, 반면에 의학의 의사들끼리 이해될 수 있는 전문적인 영역이 있듯, 철학도 철학자들이 공부한 전문적 영역이 존재한다.  사실 이 책은 그런 전문적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용이 다루어진다.  그래서 어렵다.


  움베르토 에코나 마이클 센델과 같은 무척 익숙한 인물들이 보이지만 인터뷰 내용은 무척 어렵다.  철학의 전문적인 영역에서 첨단을 이끌어가는 이들이 그들의 간략한 과거와 진지한 현재를 이야기하고, 그 안에는 그들이 현재 이어나가고 있는 그들만의 사유를 이야기한다.  인상적인 것은, 이들을 인터뷰한 이들은 철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계속 공부를 이어나가는 이들인데, 철학교수들에게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이들의 자세역시 무척 진지하고 분석적이며 첨예하다는 점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라 해도, 철학의 최전선을 이끄는 학자를 대함에 있어 긴장보다는 진지함과 예리함이 살아있기는 무척 어려운 일일텐데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공부하고 파악해야 할 것이 무척 많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철학의 계보와 대륙철학과 분석철학등의 개략적 이해, 그리고 근래의 철학적 이슈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어렵지않게 읽어나가며 나름의 이해와 정리를 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역자는 철학입문서로도 좋다 추천하지만 읽고난 후의 개인적 느낌은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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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읽기 전 - 천자문에서 소학까지 한 권으로 배우는 고전 입문
정춘수 지음 / 부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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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통해 느끼게 되는 서양의 사고방식은 동양의 그것과 무척 다르다.  하나의 결론을 미리 설정해놓고 다양한 관점에서 결론에 대해 논리적 설명을 하는가 하면, 다양한 문제제기를 통해 논리를 전개하여 마지막에서는 공통된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학위를 위해 논문을 써 보았거나, 서양의 수많은 저자들이 써낸 책들이 산더미처럼 존재하는 시대에 조금이라도 책을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논리나 전개방식에 대해 매우 익숙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결론에 이르고 난 후의 느낌은 '그렇구나'하는 깨달음과 성취감과 함께 약간의 허탈함이 생긴다.  마치 산꼭대기에 올라 더 오를 길이 없어 이제 내려가야 한다는 느낌처럼, 열심히 산을 오르며 열과 땀으로 데워진 몸이 이제 막 내려가려 움직일 때 불어오는 바람에 한기를 느끼며 살짝 떨리듯, 무언가 아쉬움이 생긴다. 


  반면에 동양의 사고방식은 하나의 주제로 가만히 깨달음을 채워가는 과정이다.  논리의 방식이나 과정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끊임없는 생각과 고민으로, 그리고 시대마다 존재했던 다양한 인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결론을 만들어낸다.  본문에도 나오지만 동양의 공부는 마치 배어들어가는 것과 같다.  하나의 주제라는 물감이 하얀 천의 귀퉁이에 닿았을때, 얼마나 넓고 깊게 물들어가고 배어들어가는가, 이 과정에 최종적인 모습이 존재할까 싶지만, 주제로 물들어간 다양한 천의 모습이 결과로서 세상에 받아들여진다.  각각의 인간이 이렇게 하나의 주제로 생각하고 고민하며 머리와 몸에 배인 지식은 한 인간만의 모습을 형성한다.  이는 시대마다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결론이 도출되며, 결론의 일관성이 없기에 다양성을 빙자한 혼란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단지 지식의 축적이라는 표면성과는 다른 머리와 몸을 아우르는 탄탄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고와 공부의 방식이었다.


  '공부한다'라는 말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요즘처럼 공부 많이하는 세상이 있었을까?  수많은 정보와 자료의 홍수속에서 차분할 수 없이 우겨넣어야 하는 공부에 사람들은 지쳐서 나가떨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양산되는 엘리트는 대부분 조직안에서의 영혼없는 톱니바퀴가 되거나, 여전히 어딘가에 의존해야만 하는 덩치큰 애어른이 된다.  보편적으로 따져보아도, 우리는 그렇게 공부를 했지만 실제 직업활동이나 생활에 배운 것을 적용하는 부분은 매우 작다.  엄청난 지식을 접했지만, 우리사는 세상은 점점 상식을 잃어가며 천박해져가고 있다.  우리는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답은 지금 이 순간 내리기는 어렵다.  단지, 머리에 지식을 가득 채워넣어가며 길러진 인간이 생각과 행동이라는 관점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긍정보다는 부정적 생각이 크게 다가옴이 사실일 뿐이다.  머리의 지식이 녹아서 몸으로 배어들지 않으면,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따로 작용하는 딜레마적 인간이 되지 않을까?  또는, 왜곡된 이해를 통해 이기적이거나 파괴적인 인간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는 지식이라는 것들의 실체는 몸으로 녹아들 수 없는 딱딱한 금속같은 것일까?  싸움닭같이 공부할 것들에 파묻혀 닭장안에서 성장하여, 그렇게 받아들인 공부라는 것이 자신에게 선사한 결과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던 나와 친구들의 대학시절을 바라보고, 우연히 시작한 독서가 어느정도 규모를 갖추게 되니 젊은 시절의 공부와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공부의 괴리감을 깊이 느끼게 된 지금의 순간에, '공부'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 만난 이 책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동양의 고전을 통해 우리시대의 공부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무언가의 실마리를 느끼게 한다.  그것의 일부는 아마도 몸에 배이지 않는 상식과 염치는 아닐지 조심스레 가닥을 잡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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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여성 - 그녀들의 가슴에 묻어 둔 5.18 이야기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기획, 이정우 편집 / 후마니타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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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생생함을 온전하게 하는 데에는 주제와 구성방식과 기록방법과 분위기등의 많은 요소에 정성을 들여야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경험한 이들이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말로서 정확히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체적 시간의 어느 지점안에서 구술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5.18의 광주와 4.3의 제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33년 전의 과거와 65년 전의 과거는 인간의 기억력에 따라 구술의 정확성에 차이를 주기 충분한 시간차이다. 이러한 시간차에는 폭력을 자행한 당사자인 정권이 망각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고, 역사의 변화가 침묵의 봉인을 조금 빨리 해제시켰다고 하면, 5.18은 다행스럽게도 조금 일찍 진실을 알 수 있게 된 역사의 장면이 된 것이다.  


  광주를 경험한 여성의 입장에서 5.18을 다시 돌아본다.  하지만 이야기는 5.18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구술자들의 살아온 인생내력으로 시작하여 자신의 생각이 첨가되고 어쩌다가 5.18에 휘말렸고 그 순간 무얼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삶에 어떠한 영향으로 남아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는 5.18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의 하나로서 여성이 바라보는 5.18이라는 의미도 가지지만, 5.18을 떠나 여성으로서의 삶을 바라보는 의미도 가진다.  단지 이 구술의 특별한 의미를 짚어보라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던 여성들이 우연히 5.18을 만남으로서 생각과 생활에 어떠한 변화가 왔는가라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관점과 시선에서 5.18을 바라본다는 것은 과연 별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뒷편의 대담에서도 논쟁거리가 되는데, 읽고난 후의 내 관점은 그것은 여성이기에 5.18을 그렇게 바라보고 행동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민군에게 밥을 해주고, 몰려드는 환자들을 치료간호해주고, 쫓기는 대학생들을 숨겨주고, 시신을 염하며 눈물흘리고 한탄하는 모습은 그것이 여성이기 때문이거나 어떤 이념이 강고해서 그런 것이 아닌, 그저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애정과 연민이 있기 때문에 발휘되는 행동인 것이다.  동시에 현장의 중심에서 존재하며 앞장선 이들의 서사로만 표현되고, 그럼으로서 이후에 그들의 이야기만으로 남게 되는(동시에 남성성 가득한 느낌으로만 남게 되는) 역사의 사건은 사실, 인간성의 측면에서 합리적이고 납득할 만한 당위를 품고 행동한 모든 이들의 역사이자 이야기임을 깨닫게 해 준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책의 구술은 정말 평범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이야기를 통한 5.18의 진정한 내면을 보여주고 있고, 당시 적극적으로 헌혈하고 먹을 것을 나누어주다가 이후 경찰에게 연행되어 폭행당하고 한두달을 구치소생활을 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진 이름모를 술집 아가씨들 같은, 현장의 중심에 있었던 약자들의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던져준다.  여성성의 관점에서 특징삼을 점들은 오히려 5.18의 외부에 존재한다.  여자아이이기에 학교를 못갔다거나, 얼굴도 모르고 결혼했다거나, 내 딸은 나와같이 살지 않았으면 해서 결혼도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등의 이야기에서 그 시기를 살아온 여자들의 모습과 생각을 살펴볼 수 있다. 


  권력에 의한 폭력은, 그러니까 4.3이나 5.18등의 비극은 온전하게 마무리된 것일까?  4.3은 정부의 공식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고, 5.18역시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이를 마무리로 인식하고 화해와 상생이라는 단어로 포장지을 수 있는 것일까?  구술자들의 이야기만을 가지고 말해보자면 아닌 것 같다.  5.18을 온전히 통과해 온 이들은 5.18 기념일 행사엔 참석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전날이나 다음날 조용히 망월동을 찾아간다고 했다.  행사를 통해 5.18은 정치적으로 소비당하고 있다는 분노감때문이다.  동시에 보상이라는 금전적 혜택이 주어짐과 동시에 유가족들의 권력화와 내분이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표현한다.  의미와 추모는 온데간데 없고 보상은 분열과 왜곡을 낳으며, 위정자들은 도청별관과 전남대 정문을 싹 갈아엎음으로서 5.18의 상징성을 제거하려 한다.  그 앞에서 이들의 구술은 안타까움만 느껴지지 아무런 저항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4.3의 제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비참하고 안타까운 상황을 가해자들이 아니고 피해자인 인민들이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것을 시대가 변한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암담하다.  그 암담한 토양에서 친일 기회주의 세력이 다시 세를 펼치고, 역사에 대한 무지와 사고력의 무능을 바탕으로 사실의 왜곡과 폄훼가 독버섯처럼 곳곳에서 올라오는 모습들을 보면, 다시 이런 기록의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참담함도 함께 느껴야하는 슬픔도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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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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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사유'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그것은 얼마만큼의 부피를 가져야 보편적이 될 것이며, 얼마만큼의 부피와 깊이를 지녀야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인가.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인민의 사유'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위고의 말처럼, 인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배고픔과 빵이라면, 그것은 사유의 영역이 아닌 본능의 영역이 아닌가.  사유를 통한 인간의 구분기준은 사유의 유무인가 아니면 사유의 부피와 깊이의 차이인가. 


  사유와 이론이 뒤섞이고 교배하여 만들어내는 수많은 생각과 이를 표현하는 수많은 말과 글들은 어쩌면 '사유할 줄 아는 인간'만이 가능한 능력이자, 사유하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자연적 현상인지 모른다.  교배와 뒤섞임으로 태어나고 변화하여 창궐하는 수많은 생각속에서 건져진 새롭게 가치를 부여받은 사유는 다시 다른 가치있는 사유들과 교배하고 뒤섞임으로 가치있는 사유들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사유의 진화는 인간의 육적 진화와 더불어 인간역사의 한 축을 이루어 왔을 것이다. 


  여기 가치를 부여받은 다양한 사유의 꺼리들이 누군가에 의해 던져졌다.  이것들을 살펴보니 기실은 새롭지 않다.  이제껏 수많은 사상가들이나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사고로 이룩해놓은 생각꺼리들의 중간적 결과물들이거나, 일상에서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잠깐씩은 스치듯 생각해보거나 느껴보았을 것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보았거나, 이런저런 대상들을 가지고 장난치듯 이리저리 굴려보고 돌려보다 새로워보이는 부분을 들이밀듯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한번 흘레붙여보고 뒤섞어보며 새로운 사유거리를 만들어보라 주문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그것이 오류가 되었든 오답이 되었든 간에, 그 안에서 새롭게 가치를 부여할만한 새로운 것이 건져질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던져준 이는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던져준 그'는 너무도 고고하고 도도하다.  너무 높은 곳에서 독야청청하듯, 때론 너무 때묻지않은 정결한 모습으로 꺼리들을 던져준다.  너무 높은 곳에서 너무 고결한 것들을 던져주니 그것을 받아든 아래의 사람들은 이를 어찌할 줄을 모른다.  사유의 교배와 뒤섞임은 커녕, 던져준 것들 하나하나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둘 중 하나이다.  받아든 사람들이 너무 무지하거나 던져진 것들이 너무 어렵거나.. 


  난 그 두가지 이유 중 무엇이 진짜 원인인지 모르겠다.  던져진 것들이 인간에 의해 사유되며 형성된 하나의 결과물이라면 인간으로서 이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읽어본 나로서도 너무 어렵고 난해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생각하려 하지 않고, 어쩌면 생각의 기능이 퇴화되었는지도 모를 사람들 가득한 이 사회에서 과연 이것들이 이해될 일말의 소지라도 찾아볼 수는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부정할 수 없는 솔직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던져진 것들의 실체들을 이 책의 각 악장들의 내용들이라 생각한다면, 던져준 이와 던져진 꺼리들, 그리고 인민의 간극은 무얼 어찌할 수도 없을 매우 크고 멀기만 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의 서곡에서 말한 '사유해야 한다'가 아닌 '왜 사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도 전에, 우리는 '사유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앞에서 나는 어떤 꺼리들이 던져져야 우리는 과연 사유를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본다.  어렵고 난해한 이 책이 제시하는 꺼리보다도 좀 더 쉬운 것들이 던져지면, 지금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사유의 교배와 뒤섞음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까?  지금의 한국사회가 보여주는 수많은 현상들을 바라보면 그런 꺼리들의 수준은 과연 어디까지 낮추어져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사회에서 이 책의 내용은 한없이 어려워, 저자의 바램과 시도는 한마디로 실패했다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풀어내는 사유의 깊이와 부피는 정말 한없다.  그것은 전공적 지식과 독서가 만들어낸 특수한 여건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보여주는 사유의 방식, 방식의 다양성, 사유를 만들어내는 다양한 분야에의 관심과 지식은 정말 방대해서 사치스러움과는 다른 고급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고고한 자유를 보여준다.  자유는 사고에서도 나타나지만, 글의 표현과 문장과 단락의 형식에서도 그대로 보여진다.  마치 자기절제와 고고함을 유지하며 자신의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지 시험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나에게도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었지만, 그런 고고한 자유에 대한 나름의 부러움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때까지 읽기를 그만두지 못하게 한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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