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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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는 일은 어디나 존재한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지금 당장의 내 주변의 모든 곳에서, 먹는 일은 평범하고 당연하게 존재한다.  본능이면서도 당연해서 그것의 무게를 잘 느끼지 못하다가도, 잠깐만 가로막히면 인간은 괴로움을 느낀다.  먹는 일은 사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너무 당연한 인과관계 안에서, 우리는 그것에 무심해진다.  ‘그것에 무심해져도 되는가’ 라는 질문을 문득 받고 나면, 생각을 약간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뭇 진지해진다.  이 책은 그런 질문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진지해져야 하는가를 느끼게 해 준다.

  수많은 맛집이 인터넷 상에 소개되고, 어떤 맛이 좀 더 훌륭한가를 비교우위의 틀에 대어보는 일이 인기있는 예능프로의 주제가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것은 축복이다.  본능을 넘어 감각의 첨단을 즐기는 향연을 누린다는 것은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너무 먹고 적게 움직여서 비만인 덩치로 인간의 삶이 영위될 수 있음도 축복의 산물이다.  이 축복의 시간은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일단 제쳐두자.  인간은 당장의 배고픔과 활동을 위한 에너지 축적에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반성없이 이제까지 흘러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돌아봄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오류가 쌓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유한 계급이 잔치에서 먹다 남긴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이 거두어 사고파는 일이 생긴다.  권력욕에 휩싸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눌 때, 인민의 삶은 피폐해지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어 눈물자국 위에 파리들이 들러붙은 채 숨이 끊기는 아이들이 발생한다.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이 키우는 고양이를 먹이기 위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며 통조림을 만든다.  모순이 넘치고 부조화가 만연한 이 시대에 다행인 점이 있다면, 나는 그것들의 정점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불편한 사실 뿐이다. 

  굳이 사고의 영역을 넓게 보지 않아도 먹는 일의 숭고함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오후 3시 전후에 진료실을 찾는 환자들엔 유독 식당에서 일하는 중년 이후의 여성들이 많다.  가끔씩 그들에게서는 특유의 ‘짬밥’ 냄새가 난다.  내가 맛있게 먹는 음식을 만드는 식당 주방에서 배이는 냄새는 그다지 맛있거나 향기롭지 않다는 사실도 새롭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온 몸의 통증과 멈추지 않는 기침을 호소한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힘을 써야만 하는 일은 근골격을 피로하게 만들고, 폐쇄적인 주방의 습기와 냄새들은 날마다 기관지를 자극한다.  한 달에 쉬는 날도 두 번이 보통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그렇게 누군가의 고된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디가 맛있는가를 따져가며 우르르 몰려가 맛을 보고, 누가 만든 요리가 더 맛있는가를 방송의 여흥으로 즐기는 일에 말 한마디를 얹는 일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다만, 삶과 직결된 먹는 일을 두고 되돌아봄이 없다는 사실이 먹는 즐거움을 가볍고 비루하게 만든다.  누구나 다 먹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불평등의 구조 안에서 먹는 종류는 심각하게 차이가 난다.  탐욕과 고갈의 문제 앞에서 인간의 먹거리의 위기를 스스로 자초한다.  먹는 일의 위대함과 즐거움은 풍요로운 부를 기반으로 중심에 놓인다.  그러나, 그것이 분배의 불평등과 탐욕의 경쟁에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먹는 일의 중심은 지금과 달라진다.  저자도 이야기했듯이, 먹는 일의 중심은 밤새 먹고 마시고 토하며 흥청망청하는 잘 사는 나라의 대도시가 아니라, 내전으로 굶어 죽어가는 뼈만 남은 어린 소녀가 힘없이 누운 열대나라의 흙먼지 바닥이어야 한다.  삶이 누군가의 수고로 만들어진 음식으로 영위됨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시선은 반듯한 유니폼에 현란한 칼솜씨로 화려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브라운관 안의 쉐프가 아니라, 늦은밤 짬밥냄새를 옷에 배고 집으로 들어와 고단하게 눕는 범부의 거칠어진 손에 가 닿아야 한다. 

  이 책이 쓰인 건 1990년 중반이다.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것이 2017년이다.  20년이 더 넘는 시간차를 두고 읽었지만, 시대적 상황 외엔 별다른 시간차를 느끼지 않는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삶도 변한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을 이루는 것들은 여전히 동일하다.  그것이 다루어지는 모습 역시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것이 20년이 넘는 시간차에도 위화감이 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최근들어 세상은 유난하게 먹는 일과 맛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인지, 한 방향으로만 몰려 집중되는 관심은 온당한 것인지,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일방적 관심이라는 빛에 가려진 본질이 실은 우리의 고민일텐데, 그것을 외면한 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더 고단해지고 불행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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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똑같은 노래는 부르지 않아 - 내 삶과 나만의 생각을 음악으로 맘껏 표현하고 싶다고? 내가 꿈꾸는 사람 19
서정민갑 지음 / 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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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크가수로서의 밥 딜런을 잘 모른다.  가끔씩 라디오에서 들리는, 시를 읖조리는 듯 투박한 목소리가 밥 딜런이구나 하는 정도의 관심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의 노래가 오랜 생명력을 가지는 이유를 굳이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의 포크싱어 김광석을 생각하면 될 듯 하다.  개인적 취향에서 밥 딜런은 그닥 매력있는 가수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에 나 역시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노래는 시이며, 음율을 얹은 시를 노래함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역시, 담담한 마음으로 그의 수상소식을 받아들였고, 수상을 통해 그가 부르는 노래의 가치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음악을 향한 열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런 것들의 궁극인 자유를 꾸준하고 깊게 노래하는 모습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서 그려지는 밥 딜런은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를 가꾸어 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휘둘리지 않는 의지와 시선으로 써 내려간 시와, 다양한 음악을 통해 게으르지 않은 공부로 지어낸 선율이 만나, 밥 딜런의 노래가 되었다.  스스로의 자유의지가 담긴 그 만의 노래, 그것으로 가치는 충분하고 노래는 감동적일 수 밖에 없다.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밥 딜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자유의지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의 시대에 만들어지는 음악들의 산업적 특징에 비교된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대량생산 체계는 인간 개개인의 특성이나 능력을 무시하고 천편일률적인 획일화로 몰아넣는다.  이 시대에 생산되는 음악들은 그런 획일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노래를 하는 이들의 생각이나 개성이 노래에서 쉽게 읽히지 않는다.  자본의 힘은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들은 화려해서 인기마저 독식한다.  스스로의 의지, 인간의 개성과 가치를 선율에 담아 노래하는 가수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외면당하거나 구석으로 밀려난다. 

  밥 딜런을 소개한 이 책을 쓴 이는 사실 나와 같은 비평을 하지 않는다.  세상의 변화는 노래가 이끌지 않았어도, 변화의 옆에는 항상 노래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촛불의 광장에서도, 우리는 항상 노래와 함께 있었다.  밥 딜런은 언제나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를 노래했고, 그의 노래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노래에 희망을 담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노래가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힘든 암흑이지만, 역사 안에서 노래가 세상을 바꾼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옆에서 노래는 어떻게 변화를 함께 만들어갔고, 노래의 힘이 어떻게 희망과 긍정을 이끌어냈는지, 글쓴이는 설명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현재의 음악생산 방식에 비판적이고, 개인의 자유의지를 담은 노래들이 발전된 시스템 안에서 조명을 받아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하여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한다 생각한다.  그러나, 글쓴이가 말했듯, 노래는 항상 우리 옆에 있었고, 우리에게서 희망을 이끌어 내었음을 인정한다.  노래라는 주제 하나만으로도 매우 복잡한 얼개 안에서 중심을 잡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인간의 근대사만 보아도, 그리고 짧기만 한 나라는 인간 하나의 시간 안에서도 노래는 항상 함께 있었고, 희망이거나 위로였었다.  그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책이 청소년의 진로와 직업선택을 위한 책이라는 사실은 아쉬움을 많이 남긴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열정은 사람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삶의 중심이라는 의미에서 필수적이다.  그리고, 음악은 모든 이의 옆에 있다는 점에서 비단 청소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실용서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앞으로의 인생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러한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정말 가치있는 작업인 동시에, 간접적이고 모호할 수 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나는, 이 책을 이제 막 기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내 아들에게 건넬 것이다.  아직은 읽기에 이를 수 있으나, 나는 밥 딜런의 자유의지와 열정을 사랑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에 필수요건임을 믿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삶에서 음악의 본질을 짚어내는 방식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청소년 뿐만 아니라, 현실의 지난한 타협 속에서 지쳐버린 모든 사람들에게 건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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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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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이 된 지 일 년이 지난 조카가 군입대를 준비한다는 소식과 함께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스럽다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답해주었다.  ‘네가 하고 싶은 것들, 보고 싶은 것들을 찾아다니며 다양하게 살아 봐.  어차피,  너네 세대는 무얼 하더라도 힘들 거야.’ 답을 하고 나서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 답을 해 준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조카에게 말해 줄 어떤 긍정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비관적이긴 하지만 가장 사실에  가까운 답을 말해주었다는 생각이다.  고시를 준비하라던지, 지금부터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으라 던 지 하는 뻔한 이야기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말레이시아의  국제학교에 보낸 상태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이가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수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바깥세상을  녀석의 삶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언어에 익숙해지는 것이 우선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했다.  내가 사는 나라의  테두리 안에서만 아이를 존재하게 하는 일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많았다. 그리고, 아이의 기회를 많이  축소시키는 결과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깐의 해외 경험이라도, 언어라는 도구와 삶의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아이의 생각과 기회를  키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이  사회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고민스러웠다.  존재한다는 건, 스스로의 자아를 제대로 표현하고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와  같은 것일까 점점 의문스러워졌다.  이 사회는, 평범하거나 약간이라도 어설프면 어떻게든 아래로 끌어내리는 습성이 있다.  사회  안전망도 없어서, 그렇게 끌어내려진 존재는 루저의 상태가 되어 착실한 피착취 대상이 된다.  분배를 위한 시스템은 망가진 지  오래다.  피착취자들은 올라갈 길이 거의 보이지 않는 아래에서 서로 아귀다툼으로 각자도생을 고민한다.  한번씩 세상이 건네는 틀을  받아 들고 자신을 틀에 맞추면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 기대하지만, 이 역시 기대에서 멈추고 만다.  각자도생에 지치거나,  피착취자의 그저 그런 삶이 싫은 이들은 탈출을 감행한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를 그 시도는 이 사회에서 이미 오래된 현상이기도  하다.

  탈출 시도가 옳은가 옳지 않은가 가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국도 나름 살기 좋은 나라라는 한없이 가벼운 입놀림은 무례하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 나라가 국민으로  하여금, 스스로 탈출을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사회 구성원의 불안과 불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더 키우고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모호하고 장황한 수많은 현상들이, 테두리 밖으로 탈출하려는 의지를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현상의 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문장은 시니컬하면서도 신경질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날이 뾰족하게 서 있는 느낌이다.  그 느낌 자체는, 이 사회 구성원들의  상태를 적확하게 드러낸다.  그 신경증을 해소하는 방법은, 경계 밖으로 탈출하는 것 밖에 없다며 고군분투한다.  가진 것도 없고  배경도 없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일은 스스로에게 죄를 짓는 일임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의지하지 않으면 이 사회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꼿꼿하게 세울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탈출을 할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입장에서는, 문장 안에 깊게 배인 신경증에 사회를 되돌아보아야만 했다.  어째서 이 사회는 이렇게 되었는가..  어째서  희망은 조건이 갖추어진 이들에게만 주어진 희소품이 되었는가..  그 막연하고 옅은 절망이, 내가 조카에게 건넨 말과 아이의 행보를  결정한 이유였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신경증 속을 부유하며 참고 인내해야만 하는 내 삶의 버거움의 이유임을 깨달았다.  내가  사는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의 행복은 회복이 가능할까?  분명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이기에 존재의 행복이란 어쨌든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위해 무엇이 어떻게 변해야 할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대체 언제부터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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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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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나서,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기억에의 투쟁으로 끊임없이 세월호를 의식하려 했다.  다른 한 부류는 이미 벌어진 참사를 잊고 다시 나가자고 했다.  후자의 경우는 매우 폭력적이었고, 왜곡으로 본질을 흐리려 했다는 점에서 도덕적이지 못하며 악마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 머릿속 세월호의 농도는 점점 옅여지고 있었다.  그것이,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 속 어쩔 수 없는 현상인지, 아니면 트라우마를 대하는 인간집단의 본능적 현상인지는 알 수 없다.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한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인류 역사에서 도대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자신의 경험을 증거하고 기억하려 노력했다.  기억과 증거는 단순하지 않았다.  자신 안에서조차 그 엄청난 범죄에 가담했을 수도 있는 조건들마저도 날카롭고 분명하게 도려내는 고통의 반추였다.  그에게 자신은, 범죄적 학대에서 운좋게 살아난, 고통에서 벗어난 선인의 입장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자택에서 자살하고 만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는, 자신이 경험한 인류의 범죄를 제대로 증거하지 못했음에 대한 자책이자, 알면 알 수록 인간에 대한 절망만이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치의 강제수용소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었는가..  이는 인간의 상식에 견주어 보아도 대단한 의문이지 않을 수 없다.  나치의 강압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의 암묵이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당시 나치를 지지했던 유럽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동조자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배경은 다시 나치의 힘이 된다.  나치는 수용소의 유대인들에게 선언한다. ‘이 전쟁이 어떻게 종결되든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겼다.  너희들은 이 시설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설령 너희들이 살아남아 증언한다 한들, 세상은 이 엄청난 일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가해자와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나치는 분명 가해자로서의 범죄책임이 있지만, 희생자라고 해서 모두가 선인의 자리에 있지 않는다 했다.  하루를 추위와 배고픔과 구타를 피할 궁리 속에서 살아야 했고, 강제노동 속에서 눈 앞의 죽음을 항상 의식해야 했던 지옥 속에서도, 계급은 여지없이 발생하였다고 증언한다.  계급의 차이가 주는 특권이란 타인보다 며칠 더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생존자들은 대체로 지옥 안에서도 그렇게 특권을 부여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같은 유대인들을 통제하고, 유대인들을 향한 온갖 박해와 실험에 보조로 참여했으며, 가스실에서 쏟아져 나온 시체더미들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그들은 핍박자라는 가장 밑바닥에서도 회색지대를 이룬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이나 무감각한 자들이라고 프리모 레비는 증언한다.  

  그는 생존 이후 증거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용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용서는 가해자가 범죄에 대한 철저한 대가를 치르고, 철저하게 뉘우치며, 팩트로서 자신이 이전의 사람이 아님을 분명하게 증명한 후에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피해자 입장에서 용서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절대적 권함임도 강조한다.  세상의 모든 관념적인 용서는 있었던 사실을 왜곡하거나 본질을 흐리게 할 뿐이다.  세월호를 잊고 다시 시작하자는 이들의 파렴치함은 여기서 엿볼 수 있다.  세월호의 원인, 가해자들, 그리고 잊고자 하는 이유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이권을 얻고자 하는 이들의 교묘한 술수일 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용서는 모든 것이 밝혀진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  단,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온전한 팩트가 밝혀져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세월호를 기억하고 있는가.  사실 이런 단순한 질문 하나로 세월호를 의식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혹시,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원인들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참사를 은폐하거나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들게끔 지연시킨 장본인이 아닐까 하는 고민역시 필요하다.  참사의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의 고통 앞에서 용서를 강요하지는 않았나 하는 돌아봄도 필요하다.  우리는 세월호를 통해 분명한 트라우마를 안았고,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 한 켠에 묵직하게 남아있다.  그 고통을 일부러 숨기고 침묵함으로, 은폐와 지연의 범죄에 의도와 상관없는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프리모 레비의 작업을 통해 돌아보아야 한다.  프리모 레비의 자살 전 마지막 저작인 이 책의 제목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 가운데 제 8원의 네 번째 구덩이를 묘사하는 첫 시구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이 한국어로 발간될 당시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직후였다.  제목과 참사가 어쩔 수 없이 연관된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이 책이 말하는 트라우마와 용서는 세월호를 곱씹게 한다.  인류역사의 거대한 범죄 앞에서 인간은 반성을 하는가 싶지만, 세상은 세계대전 이후로도 크고 작은 반인륜적 범죄를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 안에서 벌어진 참사 앞에서 다시, 결코 가볍지 않은 깊은 절망을 느껴야만 했다.  인간은 반성을 통해 발전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다시 갖는다.  프리모 레비를 포함에서, 끝이었을 듯한 인간의 지옥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온 생존자들이 다시 자살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한다.  살아나온 지옥밖의 세상에서 찾을 수 없었던 자신의 정체성과, 돌아볼 수록 커지기만 하는 인간에의 절망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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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 - 교토의 명소,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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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엔 두 번 방문했다.  뒤늦게 맘이 동해서 시작한 해외여행에 오사카, 고베, 교토를 둘러보았다.  단 하루 방문한 교토에서, 전체일정의 설렘과 감동의 80퍼센트 정도를 빼앗겨 버렸다.  기온시조 역에서 지상으로 올라가자마자 한눈에 들어온 풍경에의 감동은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두 번째 일본여행은 3일을 교토에서 머무는 일정으로 정했다.  오사카는 쇼핑목적으로 단 하루 머물렀다. 

  교토의 일정 대부분은 무리할 정도의 걷기였다.  동행한 아내와 아들의 불평이 쏟아져도, 나는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골목골목의 풍경과, 오래된 건물과 단아하게 늘어선 상점들, 그리고 작은 개천 줄기마다 물이 맑게 흐르고 버드나무와 벚꽃이 차분하게 자리한 모습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니시키 시장보다도 기온거리의 작은 골목이 좋았고, 숙소가 있던 산조 역에서 헤이안 신궁으로 이어지는 길, 기온거리에서 청수사로 향하며 지도로 들쑤시듯 들어갔던 골목 풍경들이 작고 단아했다.  남선사에서 철학의 길을 따라 걸어 은각사로 이어지는 길은 다리가 아파도, 가을의 길목에서 봄이 그리워졌다.  걷고 걷다가 가끔은 버스를 탔고 가끔은 지하철을 탔다.  그 도시는, 골목과 동네의 풍경 모두, 나의 시야를 끌어다가 자신들의 모습 안으로 녹여 스며들게 했다. 

  관심이 깊어지면 알고 싶은 것도 많아진다.  교토는 알수록 그 의문이 깊고 넓어졌다.  그러니, 교통이나 관광지, 맛집 정도나 검색하고 온 여행객은 이 도시를 더욱 깊게 알고 싶어졌다.  대체 이 도시가 이런 매력과 시간을 담아내고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부터가 궁금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들의 역사와 사연들은 무엇일까 하는 아쉬움이 커졌다.  그것은 아무런 준비없이 이 도시를 마주한 여행자의 미안함이 되었다.  도시는 분명 나에게 매력으로 다가오지만, 내가 다시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 좀 더 많은 것을 준비하지 못한다면 스스로 이 곳을 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막연한 생각들을 안고, 나는 교토를 마음 한 구석에 담아두고 있었다. 

  사실 그런 갈증에서 이 책을 구입했다.  교토관련 서적을 찾아보다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의 친근함에 끌려 교토편을 구입했고, 컴퓨터 화면에 교토 지도를 펼쳐놓고 예전에 방문했던 곳들을 짚어가며 읽어나갔다.  그리고, 읽을수록 나의 갈증은 점점 기대로 변해갔고, 준비없이 발을 들였던 나의 무모함은 민망함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라시야마의 도월교를 건너며 이곳에서 신라 도래인들이 제방을 만들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사가의 죽림을 걸었지만, 이 곳에서 일본 죽도의 90퍼센트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검도를 하면서도 모르고 지나쳤다.  남선사의 수로각을 보고도, 19세기 쇠퇴하는 교토경제의 부흥을 위해 비와호에서 물을 끌어다 공급하는 수로였음을 공부하지 않았다.  교토 국립박물관을 가 보기는 커녕, 그 앞의 이총에서 오래전 아픈 역사를 되새겨보지도 못했다.  야사카 신사의 고구려 도래인 흔적을 찾아가보지 않음에 민망해졌다.  그리고, 광륭사, 금각사, 수학원 이궁, 고려박물관, 기타야마 거리의 현대건축물 등등의 생각지도 못했던 교토의 모습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다음 여행지를 교토로 정하게 만들었고, 가 보아야 할 장소들로 마음에 정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사찰마다 존재하는 정원과 한국의 정원과의 차이점, 그들의 와비사비 문화, 유도리 등등을 의식하며 그곳의 사람들 사이에서 겪을 생각의 차이들을 다음 여행의 준비물로 머릿속에 정돈하고 있었다.  

  굳이 교토만 그러겠는가.  어딘가를 여행한다는 것은 그 곳의 사전 지식을 안고 가는 것이 여행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다녀온 다음 그곳의 역사를 공부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그러했고, 대만이 그러했다.  이제는 머릿속에 가볍게 축적된 개념을 바탕으로 약간의 복습이면 그곳에 대해 대략의 설명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내가 걷는 여행지의 시간의 축이 깊고 넓게 확장되는 기분을 느낀다.  맛집이나 방문포인트보다도, 역사를 이해하면 좀 더 겸손해지고 좀 더 풍부한 여행을 할 수 있다.

  사실, 교토의 수많은 사찰과 유적들과 예술품들을 설명하는 저자의 수준을 우리가 따라가지도 못하고 전부 습득할 필요도 없다.  다만, 어느 곳을 갔을 때, 무엇을 보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의 정도로 간략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나름 풍부한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교토여행의 아주 훌륭한 가이드이다.  동시에,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곳과 내 나라의 역사와 유적에 대해 얼마나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돌아보게 되었다.  내용에서도 이국의 문화에 감탄하면서 자국의 문화를 상대적으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자라는 내용이 나온다.  돌아보니 나 역시, 그런 마음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나 생각이 드는 것이다.  교토가 일본 역사 안에서 중심적이고 오래된 도시인데다 보존을 위해 노력한 도시여서 그럴 것이다.  교토를 알면 알 수록, 나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일본은 좋든 싫든 역사의 많은 부분을 함께 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국수주의나 우월주의에 대한 경계는 이 두 권을 읽는 내내 의식되었다.  동시에, 이 곳의 역사 역시 지배자 중심의 역사일 수 밖에 없음을 느꼈다.  그러니, 내가 교토의 골목골목을 다니며 느꼈던 차분함과 단아함을 독서의 흐름 안에서 거의 회상하지 못했다.  일부러 그러하지 않음을 알겠지만, 그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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