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이후의 삶 - 역사, 철학, 예술로 3.11 이후를 성찰하다
한홍구.서경식.다카하시 데쓰야 대담, 이령경 옮김 / 반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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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한 이후 우리는 비를 맞지 말라는 이야기를 자주들을 수 있었다.  방사능물질이 비구름에 섞여 내리기 때문에 맞으면 안된다 말했던 것인데, 어릴적의 기억에도 핵에 대한 경계심은 딱 그 정도였다.  어른들은 더이상 핵에 대한 걱정이나 우려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후의 성장과정에 있어 핵은 '핵'이라는 표현으로 이야기되지 않았다.  '청정에너지 원자력'으로 회자되었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핵과 원자력을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2년전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붕괴된 이후를 생각해보면 어릴적의 '적당한 걱정과 우려'수준에서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가 유행하다보니 우려와 걱정의 이야기는 많아졌지만, 공식적으로 그런 현상은 루머와 편견으로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약간의 걱정을 마음에 담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후쿠시마는 바로 이웃나라에 존재하는 곳이고, 우리는 수많은 핵발전소를 보유한 국가라는 현실속에서 말이다.


  후쿠시마는 소수자의 영역이 되어버렸고 버려진 땅이 되었다.  예전의 체르노빌과 스리마일 섬이 그렇듯 말이다.  공통적인 특징은 핵발전소를 통해 희생의 영역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첫째로는 다수의 삶이 존재하는 거대한 도시의 전력을 위한 희생이었고, 두번째는 핵을 통해 이득을 보려는 국가와 핵마피아 집단들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다.  처음부터 낙인찍힌 것은 아니지만, 결과론적으로 낙인이 찍혀 지금까지 이어온 자신들의 삶을 더이상 이어나갈 수 없는 희생자이자 버려지는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핵의 문제는 단지 과학으로 말하는 핵의 문제만이 아니다.  국가권력과 그것이 비호하거나 그 자체인 핵마피아집단의 이익문제, 국가간의 알력의 문제, 그리고 파괴적인 현상과 존재인식에 후천적으로 만들어낸 소수자의 문제까지, 그리고 방사능은 시간을 거쳐 서서히 문제를 만들어내는 특징도 있기에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역사적으로도 고찰해볼 수 있는 인간의 삶의 문제이다.  거기에 핵물질의 집적과 분산에 따른 먹거리와 환경에 대한 실질적 문제까지 고려해본다면 우리는 지금 후쿠시마의 문제를 이렇게 '가벼운 걱정거리'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또 한가지 더, 고리원전이나 영광원전등의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수많은 핵발전소의 현재운영상태나 설비의 안전성문제등등을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미래는 과연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은 핵전문가가 아닌 비핵전문가들이 핵에 대해 문화 역사 예술적인 부분에서 폭넓은 고민을 나눈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비과학적이니 너무 앞서나간 걱정이라 폄하할 수 있을까?  문제는 핵에 대한 과학적인 사실들에서부터 비과학적이라는 데에 있다.  녹색평론에 여러차례 실려왔던 여러 과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생체에 있어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방사선량의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며, 핵발전소 기술자들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설비의 비효율성과 편법, 그리고 임시방편적 관리에 대한 증언을 고려해보면 핵발전소는 거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느낌이다.  그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핵에 대한 일반적인 걱정이나 우려는 어느 경우에서나 과하다고도 적다고도 할 수 없으며, 이제까지 보여진 현상론에 근거하여 저자들의 좌담과 같은 폭넓은 고민과 반성, 그리고 제안은 객관적 힘을 가질 수가 있다.  거기에 핵관련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보여왔던 국가권력의 은폐노력은 이러한 생각들에 무게감을 더해왔다. 


  개인적으로 핵에 대한 걱정이 존재한다 해서 삶의 모습이 극적으로 변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핵에 관련된 모든 현상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든 현실이다.  직시해야 할 것은 여전히 핵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 하고 국가간 폭력적 긴장을 증가시키려는 국가권력과 핵마피아에 대한 직시와 경계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세대를 넘어 이후의 세대들을 위한 의무가 아닐까?  현실은 수명을 다한 고장난 원전을 억지로 가동시키고, 신규원전 유치에 지역정치꾼들과 그에 선동된 주민들이 유치찬성을 해대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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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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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형은 세대론에 대해 그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읽고난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세대를 가늠해보게 된다.  나는 과연 어떤 세대에 속한 사람이었던가.  94년도에 대학에 들어가 386세대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았고, 당구가 저물고 스타크래프트가 뜨는 순간을 체험했으니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단어였던 x세대쯤 되지 않을까 가늠해본다.  베이비붐 세대라며 취업의 고통을 하소연하던 학번은 하나 높지만 나이는 조금 많던 다른과 선배의 모습이 얼핏 떠오른다.  하지만 선배의 하소연 직후, IMF는 우리를 급습하였고 모두가 힘들다는 시대에 명예퇴직을 종용받던 아버지의 버팀으로 다행스럽게도 나는 학자금 지원이라는 수혜를 받으며 무사히 의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군의관시절, 경제위기의 긴 여파로 인하여 젊은 친구들이 마지못해 군입대를 선택해 들어오는 모습들을 보며 마음아팠던 일을 생각해보면 한윤형이 제목에서 말하는 청춘이라는 세대적 범위의 경계는 크게 잡아 내 또래의 바로 뒤에서 형성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 역시 세대론적 분석이나 경계지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은 세대간의 수많은 교류를 만들어내며 함께 흘러가는 시공간이기에, 그리고 자본이나 계급등 수많은 경계지음의 기준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굳이 세대까지 구분해가며 싸움을 붙일 필요는 있겠나 싶기 때문이다.  경제학적으로 따지자면, 정해진 부의 운영과 분배방식의 문제를 해결하면 취업난으로 대표되는 현시대의 세대간의 갈등은 자연적으로 해소되는 면도 없지 않기에 세대론은 부차적인 의미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오히려 '인민'이라는 대상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위고의 말처럼 인민은 빵과 배고픔때문에 움직이는 존재라면 굳이 이렇게 자잘한 정치평론이나 세태에 대한 고민은 필요없을 것이다.  '인민이 위대한' 이유가 언제나 함께 가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면 그저 배고픔과 불만이 극도에 다다를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존재들이고, 그래서 세상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와 분석과 주장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답답함과 우울함은 빵과 배고픔 이상의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몇년전 프랑스에서 연금법 개악에 반대하는 데모가 한창일 때, 고등학생들이 내건 플래카드에 '은행에서 현금을 모두 인출해버리자!' 라는 문구가 항상 뇌리에 맴돈다.  그 문구는 그들과 달리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필요한, 어떤 지적인 바탕이 부족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해와 논리가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와 그 이면의 현상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하는 저자에 대한 감탄 이면에 마음 한 켠의 어떤 답답함이 늘상 자리하고 있던 느낌은 위에서 말한 나의 생각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저자의 분석과 글이 무척 마음에 들면서도 한윤형 이전의 사회를 분석했던 수많은 평론가들에 비하여 신선함의 면 외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 느낌이었다.  그가 내놓는 소소한 대안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라'는 우석훈의 대안보다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긴 하지만 공감은 작기만 했다.  물론 우리사회가 뾰족한 대안이나 해법이란게 대뜸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복잡하긴 하다.  동시에 나의 생각은 치밀하고 현실적인 저자의 분석과는 거리감이 있는, 은연중에 세대론에 빠져있는 구세대적 연령공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가 보편적으로 지녀야 하는 세상을 직시하는 지적바탕을 고민하고 있다.  한윤형의 분석을 조금 지루하게 받아들이게끔 만든 나의 고민에 대해 한윤형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줄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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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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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수많은 에세이와 단편의 글들 중에 추려내어 엮은 이 책을 통해 나는 나를 되돌아 볼 수 밖에 없었다.  굳이 오웰의 글이 아니더라도 정말 매력적인 글을 써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부러움과 동시에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기제이다.  글을 쓴다는 일은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그것을 기술적인 문제와 글로 표현할 생각의 깊이와 폭의 문제로 나누어보면 나는 이에 관한 다양한 고민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한다. 


  기술적인 면은 글쓰기라는 재능으로 자연히 해결이 되거나 글쓰기 연습을 통해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지는 많은 재능은 연습을 통해 어느 정도 수준은 이룰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보면 오웰의 글이 보여주는 간결하고 명쾌한 면모는 매우 매력적이다.  그것이 그만의 천부적 재능인지 노력의 산물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보여주는 문장의 모습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하지만 기술적 요소가 글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권정생 선생님의 글이 때로는 장황해지고 의미가 먼 길을 돌아오기도 하지만 그 분의 생각은 읽는 이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듯이, 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의 깊이와 폭일 것이다.  즉,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생각이 얼마나 통찰있고 분석적이며 어디까지 경험하고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경험이 글의 깊이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삶의 어느 순간 예기치 않은 자극과 마주하는 순간 발생한다.  생각이 작동하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깊고 폭넓어지는가는 내가 그와 연관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이해하는지에 좌우되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작용을 극대화시키는 촉매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이라 생각한다.  단 한번이라도 호미질을 해 본 사람만이 땅을 일구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알게 되듯이 말이다.  내가 오웰의 글에서 통찰과 깊이를 존중하는 까닭은 오웰이 스스로 자초한 경험때문이다.  그 경험이 오웰 자신의 양심에 근거했다는 점에 있어 더욱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얼마전부터 나의 글은 너무 공허하기만 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의 공허감은 한때, 블로깅을 잠시 그만 두어볼까하는 생각까지도 들게 만들었지만 나는 블로그만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고집으로 그 뒤에 애써 공허함을 감추고 있었다.  어디에 쉽게 말하기도 어려워 오랜만에 만난 블로그 친구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털어놓은게 공허감에 대한 유일한 표현이었다.  고민이 이어짐이란 원인을 찾아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나의 공허함은 그런 점에서 따져보니 경험의 부족이었다.  그리고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는 어떤 게으름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과 쓰고자 하는 글은 내가 자리하고 있는 위치에서 사뭇 동떨어져 있기도 했거니와, 내 자리에서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마저도 치열함이 부족한 때문인지 경험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매너리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기술적 표현력도 부족하지만, 의미의 공허는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생업을 잠시 접고 다른 경험들을 해볼까도 종종 생각하고 있지만, 이 역시 현실앞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스스로의 발목만 붙잡고 있는 나의 처지..  그런 나에게 오웰은 수많은 에세이를 통해 좀 더 삶에 치열해지기를 주문한다.  70여년전의 글들이 지금도 마음을 붙잡을 정도로 통찰과 사상이 살아있는 글을 통해, 고민하는 나를 내리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자신도 용기도 없다.  그것은 어쩌면 안일하기를 바라는 내 안의 정치성인지도 모른다.  모든 글은 정치적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나의 태도도 현실을 핑계로 자리하는 정치적 자세인지 모르겠다.  좀 더 진지하고 치열하며 경험적 기회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인가..  아마도 공허감은 그렇게 해야만 해소되고 채워질 것 같긴 하지만, 난 여전히 안일함의 정치적 견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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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경제학 - 상식이 그리운 시대, 인문학으로 풀어보는
한성안 지음 / 팩컴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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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분야에 몰두할수록 시야는 좁아진다.  시야가 좁아지면 이해의 폭도 좁아지는데, '전문집단의 권력화와 무지화'는 이런 과정을 거쳐 발생하는 현상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학생시절, 국영수와 물리화학등 각각의 과목이 왜 따로 존재하기만 하고 연관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라는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던 듯 하다.  세상은 그렇게 각각의 분야가 서로 스며들듯 감싸안지 못한 채, 경계가 명백한 퍼즐조각이 서로 맞물려 딱딱하게 구성되는 그런 구조인가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오래전의 고민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찾은 듯 싶다.  하나의 분야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막연한 생각은 역시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실제적이고 명쾌한 설명으로 마주하는 답은 정말 반갑기까지 하다.  분야의 중심은 경제학이다.  딱딱하고 어렵기만 한 경제학이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자는 역사와 사회와 인문, 철학등등의 다양한 분야와 접목시켜가며 설명한다.  거기에 시대적 현실에 응용하는 방식까지 생각하면 정말 간결하고 명쾌하다.  경제학은 재밌고 부드럽고 감성적이기까지 하다.  학문이 인간의 삶을 위해 존재한다면, 학문을 이루는 각각의 분야들은 독립적으로 설 수 없고 인간의 삶을 위해 서로 녹아들고 함께 서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쯤되면, 저자가 말하는 경제학은 무척 따뜻하고 근사하며 간결명료한 재미진 삶의 구성요소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베블런의 진화경제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와 함께 시대현실에 응용하여 이야기하는 경제는 본문에서 직접 만나보도록 하자.  전체적으로 나는 저자의 생각에 적극동의하고 감탄의 마음까지 표하지만 크게 두가지 부분에서 고민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첫번째로 저자는 본문과 댓글토론에서 종종 한국민들의 어떤 사고의 수준(?)을 논하는 것을 언뜻 느낄 수 있었다.  정치사회적으로 그리고 경제학적으로 암담한 결과만을 낳고 그 결과에 스스로 고통에 빠지는 인민의 모습에 근거하여 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이런 부분에서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선거라는 불완전한 제도를 통해 기득세력에 이용당하기만 하고, 결과론적으로 스스로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민들의 모습을 보자면 과연 인민이란 어떤 존재적 특성을 지니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프랑스 인민들을 바라보던 위고와 그들의 혁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말처럼, 인민은 단지 배고픔과 빵으로 움직이는 존재일까?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 있어 고민에 빠진채 답을 지니고 있지는 않은 입장에서, 저자인 한성안 교수는 '인민'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둘째, 이 책이 정리된 시점은 이번 대선직전이었다.  저자는 좌파 정당들의 허약함을 지적하면서 최선이 아니라면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심정으로 임한다고 댓글토론에서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올바른 선택인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일단 우리의 근본적 변화가 어려운 것은 분명한 정치사상적 지점이 없이 나아가는 한발 한발에 방향성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생각때문이다.  좌의 분명한 현실적 좌표가 존재한다면 우리의 한발 한발은 어느정도의 유연성을 두고서라도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동시에 그런 좌의 현실적 좌표를 구성했던 세력을 무력화시킨 사람들이 혹시 저자가 말한 차선의 선택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참여정부의 온건함은 중도좌파의 흡수와 좌파세력들의 무장해제를 초래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이후의 연장선에서 경기동부로 대표되는 NL계의 초토화는 허약해진 좌파세력의 붕괴를 동시에 유도했다.  과연 저자의 차선의 선택은 '너무도 허약한 좌파세력'들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다시 내용으로 돌아와 이 책은 정말 근사하고 후련하다.  경제학이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느낌도 좀처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면에서는 조금 부족하고 현실비판 위주이기는 하다.  비교대상으로 어떨지는 모르지만 장하준이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조금은 착하게 살아야하지 않나'를 심각한 표정으로 딱딱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면, 한성안 교수의 이 책은 '우리모두가 인간답고 아름답게 살고자 노력하면 우리의 경제도 매우 인간적이고 부드러워질 수 있다'고 온화한 표정으로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의 현실에 대입하여 쉽게 설명된, 인문사회철학분야등을 함께 느끼며 접할 수 있는 경제학의 입문서로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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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야기들
에릭 홉스봄 지음, 이경일 옮김 / 까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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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현재의 시대에 있어 맑시즘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잘 모르겠다.  맑시즘에 기초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지 20년도 넘었고, 사회주의의 변형태라 볼 만한 중국식 사회주의나 북한의 사회주의는 철저한 통제에 기반하여 자본의 본질을 더욱 추종하는 자본주의로 변화되거나, 권력세습에 몰두한 변질된 독재사회로 남았을 뿐, 시대적인 영감을 세상에 부여하는 힘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분배의 공정한 재구성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남미국가들의 실험적 시도에 주목해 볼 수도 있겠지만, 맑스의 자본론이 보여주는 역사적 시나리오와 권력의 순환관점에서 보자면 남미국가들의 시도는 매우 온건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면이 있다.  

 

  현실사회주의도 결국은 정치적 현실이었다.  맑스의 자본론은 그런 점에서 맑스자신이 예상해 본 일종의 시나리오였고, 때문에 곳곳에서 오류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현실사회주의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존중과 우대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계급독재와 계획경제 아래에서 고통만 수반했을 뿐이다.  폴란드 사회주의를 그린 만화 '마르지'에서 표현되는 계획경제 배급시스템은 물자부족과 역할관계에 있어 비인간성만 만들어내었을 뿐이라 묘사한다.  맑스는 노동자의 역할에 있어 전세계적 규모를 강조하였지만, 그런 바탕아래 구성된 인터내셔널은 베트남의 호치민이 이야기했듯이 자국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정책하에 고통받는 식민지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기만 했다.  시나리오의 불안정성은 자본의 악의적 본성마저도 극복하지 못했다.  맑스는 자본의 축적이 공황기를 거쳐 전세계 노동자들의 대혁명을 통해 계급의 전복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지만, 자본의 공황뒤에 찾아온 것은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이었고, 자본은 계급의 전복없이 다시금 제모습을 찾아 이윤을 찾아 구르기 시작했다. 


  현실사회주의는 붕괴했다.  냉전이라는 정치적 구도가 사라진 이후 자본은 이윤율 추구와 경쟁의 심화과정을 통해 성장을 지속하고자 했지만, 미국발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그 과정은 점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맑시즘은 다시금 주목을 받았는데 관심의 주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자본가들이었다.  그들은 맑시즘을 세계경제의 근본적 대안으로서 주목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윤과 권력을 유지하는데 잠시의 양보와 보폭을 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바라본 것이었다.  이 쯤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역사의 현실안에서도 실험으로만 끝나버렸고 현재에 와서는 근본적 변혁의 수단이 아닌 체제유지수단으로서 주목되고 있는 맑시즘은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에릭 홉스봄도 맑시즘을 대안이 아닌 시대적 참고사항으로 제시하고 있음은 어떤 면에서는 조금 비관적인 느낌이 없지 않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자본주의건 맑스식 사회주의건 간에 자본의 끊임없는 순환과 생산을 전제로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존관점에서 환경이 대두되고 있고, 심각한 환경의 훼손이 명백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대두되는 환경론 앞에서 맑스의 자본론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자본주의의 파괴적 속성이 사회주의적 체제로 변환된다 해서 환경론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맑스의 자본론이 제시하는 시나리오가 완벽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이는 어떤 변화와 응용으로 이 시대의 문제에 대입시킬 수 있는 것일까? 


  에릭 홉스봄은 90이 넘는 인생 자체가 맑스주의 역사의 증언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바라볼 수 있는 시야와 통찰은 무척 넓고 깊고 광활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사상의 역사적 이해가 풍부하지 않으면 읽기가 어렵다.  최소한의 기본지식을 갖추고 수준을 만들어놓아야만 그나마 쉽게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부족하기만 한 사상과 개념적 이해수준을 가지고 이런 수준의 독후감이나 끄적거리고 있다니, 난 대체 뭘 얼마나 이해하고 이렇게 써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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