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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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찌조직 안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아이히만의 마지막 유언이다.  뭐랄까..  뭔가 한없는 상투성밖에 느껴지지 않는 저 유언에 아이히만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아렌트도 어이가 없었는지 이 유언을 두고 '기괴한 어리석음'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아렌트는 어이없는 마음으로만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냉철하게도 그녀는 아이히만의 정신상태에 대해 '그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으며, 완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대체 '기괴한 어리석음'과 '완전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통제함'은 어떻게 연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인가?


  아이히만의 재판이 알려지던 당시의 사람들은 아이히만의 모습을 악에 가득차거나 어떤 형태로든지의 신념으로 가득찬 인물로 상상하였던 듯 하다.  그에게서 잔인한 악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황당한 기분이 섞인 실망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는 단지, 진술에서 어떤 신념이나 논리도 없이 가끔은 횡설수설도 하는 보통의 사람들이나 다름없는 한 보편적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념보다는 나찌장교로서 역할에 충실하며 진급과 인간관계에 신경쓰며 기계적으로 일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유태인 이송과 학살이라는 관점에서 아이히만에게 그것은 단지 '업무'였으며, 그는 그의 주어진 위치에서 어떻게하면 '업무'가 효율적으로 진행될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이 '그가 저지른 범죄'의 전부였다.  따라서 그는 '업무의 효율을 고민'한 것이 '반인륜적인 범죄'로 치환되는 것에 상당한 불만과 저항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아이히만의 재판은 몇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법은 종전 15년 후의 전범들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는데,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 도피한 상태에서 종전 15년이 지난 시점에 이스라엘 비밀경찰들이 납치를 해서 이스라엘로 압송했다는 데 첫번째 문제가 있었고, 두번째는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라는 의미에서 볼 때, 아이히만은 예루살렘 법정이 아닌 국제사법재판소에 섰어야 한다는 논쟁이 두번째 문제였다.  그리고 아이히만을 국제적인 관심사로 끌어올리고 처형을 함으로서 국제사회에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독일과 독일청년들에 대해 일말의 면죄부를 부여했다는 논쟁이 존재했다.  그에게서 보이지 않았던 반인간적인 신념이 보통의 사람들에게 주었던 가치판단의 혼란과 더불어 보았을 때, 아이히만과 관련된 수많은 움직임은 그 당시 관심만큼이나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시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의 역할로 인하여 수많은 인간이 이유없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는 것이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무념을 바탕으로 행하는 나의 일들이 타인에게는 심각하고 잔인한 해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지금의 세상에선 이젠 받아들이는 데 있어 어렵지 않은 개념이 되었지만, 사실 이는 인간사회의 역사속에서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존재했던 개념이 아니었던가.  사소한 악이 평범하게 존재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치명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개념이 명확해졌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구조의 복잡함속에서 합리화라는 과정을 통해 이를 어쩔 수 없음으로 받아들인다.  평범성의 대상에 악 대신 무지를 대입시켜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음으로 처하게 되는 상태, 무지 말이다.  무지의 평범성은 힘을 가진 누군가에 의해 조정되고, 그것은 선거를 포함한 '민주주의적 요건이라 일컬어지는 수많은 정치적 장치'에 의해 헤게모니를 거머쥔 특정집단을 위해 활용된다면 이 역시 누군가에겐 상당한 해악으로 작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만일 무지의 평범함을 이루는 대다수의 인민이라면, 즉 인민에 의해 인민 스스로의 발목을 부여잡는 형국이 된다면 '무지는 악'이라는 등식도 가능하지 않은가.


  아이히만을 평가하는 데 있어 '기괴한 어리석음'과 '완전한 자기자신의 모습으로 통제함'을 연관짓는 하나의 단어는 '평범성'에 있다.  그는 정말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직접적으로 유태인을 죽인 일은 없지만 그의 판단과 행동으로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는 결과를 낳았다.  평범성에 악 대신 무지를 대입시킨 결과가 '무지는 악'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면, 그 사회는 작은 아이히만으로 가득한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한번쯤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나 스스로 '완전한 자기자신의 모습으로 통제'한 모습에는 혹시 '기괴한 어리석음'이 스며들어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아야 한다.  없다거나 발견하여 스스로 고쳐나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온전할 수 없을 것이다.  혹시 지금의 우리사회가 그런 형국이지는 않은가 잠시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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