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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바
노순택 지음 / 류가헌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아이를 키운지 7년이 되어간다. 이제 해가 바뀌면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할 나이.. 무거워지고 훌쩍 키가 커지고 말을 또박또박하는 모습을 보면 언제 저렇게 커버렸나 싶을 때가 자주 있다. 어릴적의 귀엽던 모습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건 조금 아쉽다. 이제는 내가 아무리 힘을 키우고 몸을 열심히 관리한다 하더라도 아이 어릴적에 태워주던 무등이나 두부사려 놀이나 안고 휙휙 돌리며 몸으로 놀아주는 일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키가 더 커지고 자기생각이 강해지면 아이는 말이나 힘으로 통제하기는 더욱 힘들어지리라. 아이는 성장중이다.
아이는 성장했을까? 아이는 성장중이지만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직 까마득하다. 고등학교 또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니면 그 이후의 취업까지 뒷바라지할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를 지겹게 만들고 때로는 비루하게 만드는 지금의 일을 과감하게 때려치울 수도 없다. 이제부터 아이를 키우는 일은 가족이라는 혈연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감성이나 정감을 제외한다면 돈과의 싸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힘과 생각은 부모를 능가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부모는 여전히 아이에게 미래를 알 수 없는 투자를 해야만 한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아이는 부모에게서 독립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하지만, 인간의 세상에서 아이의 독립은 여전히 섵부르고 위험해보인다. 자신의 후손을 생산해낼 수 있는 나이인 10대 중반을 대략 생물학적 독립시기로 설정해놓고 생각해보면, 20년 이상을 부모에게 의존하는 지금의 인간의 '퇴화된 능력'은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를 고민해 볼 필요도 있어보인다.
부모의 보호와 물질적 지원을 받아가며 성장하는 아이는 행복할까? 힘과 생각이 부모를 넘어선 아이가 부모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순간 부담과 죄송으로 바뀐다. 사회에 대한 적응과정을 충실하게 따르고 배워왔건만, 자신이 인간의 세상에서 독립된 주체로 온전히 서기에는 여전히 어렵고 힘들다. 설령 간신히 서더라도, 세상의 불안감은 다시 부모에게 시선을 향하게 만든다. 이미 등골이 빠지도록 일하느라 늙어버린 부모의 모습은 자신에게 그닥 도움이 될 것같지 않지만, 바라볼 곳은 부모말고는 마땅한 곳이 없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자식을 낳으면 잘 키워낼 수 있을까.. 내 자식은 내가 사는 세상에서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생각이 깊어지다보면 자식을 낳는 일에 대해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식은 많이 낳을수록 좋고 형제는 많을수록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간다지만, 당장에 내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잘 키워지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두려움으로 가슴에 박힌다.
스스로 무언가를 준비해놓지 않는다면 힘들어질 것이 분명한 노후가 걱정이 되는 나라, 워커홀릭이라는 단어가 남한이라는 국가를 표현하는 세계적 인식으로 자리잡은 나라, 청소년 대학생 중고등학생 전반에서 자살률이 세계 최고를 구가하는 나라, 출산률은 세계 최저의 수준을 유지하는 나라.. 이것이 위에서 말한 부모와 자식간의 피하지 못할 고민과 갈등의 결과물이자 역으로 분명하게 설명해주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온통 아이를 업고 있는 사진으로 가득채워진 이 화보집을 넘기고 있자면, 업혀있는 아이가 마냥 귀엽지만 않고, 아이를 업은 부모의 팔과 어깨는 그닥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업힌 아이의 엉덩이는 왠지 피로해보이고, 피로해보이는 엉덩이를 들춘 부모의 팔에선 버티는 힘이 느껴진다. 업힌 아이는 그대로 점점 자라는 듯 하고, 자라는 아이를 업은 부모는 점점 상체가 앞으로 기우는 듯 하다. 사진이 포착한 그 순간은 업힌 아이의 졸림과 업은 부모의 돌봄사이에 교감의 행복이 존재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연속에서, 작가가 서문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조금은 어둡고 무겁게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고 느끼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