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성
고형권 지음 / 구름바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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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항상 커다란 인물과 커다란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커다란 역사의 한 순간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건, 계급성을 지닌 인물들의 활동 뿐이었다.  그것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간에, 마치 역사는 그들에 의해서만 굴러가는 것 같이 보였다.  그것은 그대로 역사 교과서가 되었고, 우리는 편견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좁은 시야로 그것을 외워야만 했다.  과거를 서술하는 역사를 현재에 대입해보면, 그런 역사는 자기부정일 수 밖에 없다.  거대하게 구르는 역사의 위에 도드라지는 몇몇이 있다면, 역사를 굴리는 수많은 대다수는 현재의 우리와 같은 이름없는 인민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굴러가는 역사 안에서, 우리 인민들은 어쩔 수 없이 순박하고 성실하게 굴리고 지탱했다.  계급이라는 나면서부터의 굴레를 안고 삶을 꾸려나가는 일은, 그것 그대로 닥쳐오는 것들을 온 몸으로 받아내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세세한 시선을 가지고 그 삶의 흔적들을 들추어내는 일은, 막연하게 외어야만 했던 역사를 배우는 일보다 훨씬 재밌고 친근하다.  그것은 자기부정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고증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뼈대로 세우고, 아래로부터의 세세한 시선으로 이름없던 인물들을 되살려내 허구의 살을 붙여 이야기 하나가 탄생했다.  정유재란 당시 교룡산성과 남원성에서 있었던 일본 침략군과 조선군과 명군의 대치, 그리고 함락의 과정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펼쳐진다.  남원성을 지켜야만 한다는 순박하면서도 막연한 사명이 이름없는 대다수의 상놈들 마음에 자리잡았다.  싸움을 이끌어야 하는 권력자들은 각자의 이익과 기회를 가늠하며 싸움의 결말을 이끌어내려 한다.  싸움의 대의만을 간직한 자는 결국 죽임을 피할 수 없었고, 이익과 기회를 가늠한 자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살아남는다.  그것들을 아우른 넓은 시선은 침략과 저항 속에서 국가권력과 계급권력의 기울기를 긴장 안에서 주시한다.  역사는 그렇게 기회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해석되었고, 죽은자는 말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것을 되살리는 일은 그래서 버겁고, 조심스럽다.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왜곡없이 되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김 훈의 남한산성이 지배계급의 견지를 가지고 병자호란의 고립을 관망했다면, 이 책 남원성은 정유재란 당시의 처절함을 피지배계급의 시선으로 철저하게 아래로 파고들며 치열하게 서술한다.  남한산성이 권력의 위태로움을 걱정했다면, 남원성은 목숨을 바쳐가며 터전을 지키려던 인민들의 덧없고 무모한 무엇을 드러내었다.  그러면서도 과거 전쟁의 대치와 충돌이라는 단순함에서 벗어나, 일본군과 남원성내 진영간의 드러나지 않는 복잡한 관계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했다.  삶을 잃고 목숨을 위협받는 평범한 사람들의 복잡한 심경과 전쟁전략의 입체적인 구성과 관계가 잘 어울린다.  남한산성의 문체는 차분하지만 한 발 떨어진 시선으로 관조의 안전한 위치를 강요한다.  그러나, 남원성은 시선을 적극적으로 전장 안에 두어 처절함과 치열함 안으로 마음을 끌어들여 들끓게 한다.  이것은 독자를 적극적으로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작가의 저력이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민들이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의 솔직한 결이다.

  개인적으로는 한물의 칼을 다루는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검도를 해서 그런지, 그의 얼굴이나 몸이 상상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가 칼을 다루는 모습, 일대 일로 검 대결을 하는 묘사는 칼의 움직임이 상상되면서 검의 움직임과 그의 승리가 납득되었다.  작가는 검을 다루어 본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독서를 멈추고 잠시 해 보았다.  어쨌든, 고증과 구성과 긴장과 묘사 모두 적당하고 탄탄한 재밌는 소설을 만났다.  뜨겁게 타오르지 않지만 단단하고 나직하며 뜨끈한 불덩어리 하나 가슴에 안은 느낌으로 독서를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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