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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평점 :
천명관 작가의 10년 만의 귀환. 그것도 아직 출간되지 않은 따끈한 신작을 미리 읽을 기회라니. 이 행운을 잡은 나는 올해 상반기 운을 다 써버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 '간귀'라는 별명을 가진 요리사가 등장한 적이 있다. 간(味)의 귀신이라는 뜻일 텐데,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천명관 작가를 감히 '서사의 귀신'이라 부르고 싶어졌다.
『고래』를 읽으며 경험했던 압도적인 서사의 흡인력이 『아코디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병렬 독서를 즐기며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편인데, 이 작품은 이틀 만에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만큼 이야기가 가진 힘이 강력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전쟁 직후의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다소 낡고 익숙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앵벌이와 거지 왕초 역시 새로운 소재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편리하고 풍족해진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시대의 결핍은 오히려 지금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처럼 다가온다.
부산에서 어머니에게 버려졌는지, 혹은 잃어버려졌는지조차 알 수 없는 소년 동이. 그는 사지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오히려 더 가치 없는 앵벌이 취급을 받는다. 하루 종일 고개를 숙인 채 깡통 속 동전 소리에 의지해 살아가는 아이. 그런데도 작가는 동이를 영웅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쓰이고 응원하게 된다.
동이는 의협심 넘치는 영웅도, 세상을 구할 특별한 인물도 아니다. 무리 속에 있어도 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고아 소년에 가깝다. 하지만 그런 동이가 아코디언을 만나고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자신보다 더 약한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소중한 사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과정 속에서 그는 서서히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변해 간다.
가장 밑바닥에서 출발한 동이의 모습은 앵벌이 조직의 우두머리인 윤목사와 자연스럽게 대비된다. 허름한 움막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동이는 권력이나 힘이 아닌, 위로와 희망을 건네는 존재로 자리한다. 그래서 그의 성장은 단순한 개인의 성공담을 넘어선다.
이 소설은 어쩌면 나약해 보이는 한 소년이 아코디언이라는 악기를 통해 세상과 대화하고, 음악을 통해 자신만의 용기를 발견해 가는 성장 서사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목차의 제목들이다. 「럭키 서울」, 「목포의 눈물」, 「홍콩 아가씨」, 「타향살이」, 「베사메 무초」 등 당시 유행했던 노래 제목들이 장마다 배치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길 위를 떠도는 아이들은 모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슬픈 현실을 밝은 멜로디에 실어 노래했던 그 시대의 유행가처럼, 이 작품 역시 비참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노래들이 품고 있는 그리움과 상실, 떠남과 기다림, 그리고 구원의 정서는 『아코디언』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선율이 된다.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이쯤에서 멈추려 한다.
풍요와 욕망이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코디언』은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기억,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그리고 끝내 살아내려는 의지. 천명관은 이번에도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인간을 놓치지 않는다. 천명관은 이번에도 거대한 시대를 이야기하지만, 끝내 독자의 마음에 남는 것은 한 소년의 얼굴이다.
도서 협찬을 받고 솔직한 감상을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