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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파도 ㅣ 트리플 35
이서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3월
평점 :
아이가 요즘 태양계에 푹 빠져 있다. 우주 다큐멘터리나 관련 영상을 보다 보면 나 역시 곁에서 함께 화면을 바라보게 된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한없이 작은 먼지 같은 존재다. 그 작은 티끌 안에서 더 작은 나라와 마을,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은 겉으로 보기엔 보잘것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각자가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는 삶의 무게만큼은 그 거대한 우주에도 쉽게 비길 수 없을 것이다. 멀리 외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며 신의 존재를 생각하던 요즘, 우연히 읽게 된 『방랑 파도』는 그런 질문들을 다시 조용히 끌어올리는 소설이었다.
『방랑 파도』는 트리플이라는 구성에 맞게 세 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방랑 파도」의 주인공인 소녀 ‘나’, 「빗금의 논리」 속 자애와 지환, 그리고 「향자의 단짝 친구 미자와 그녀의 손녀 혜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한 조용한 어촌 마을이라는 공간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각 단편은 독립적으로 읽히면서도 서로의 정서를 은은하게 반사하며, 하나의 긴 파도처럼 이어진다.
단편을 한 편씩 읽을 때마다 나는 자꾸 소설 속 주인공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슬픈 서사 속에서 인물들과 함께 걷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들에게 바다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에 번진 얼룩 같은 슬픔을 잠시 벗어나기 위해 떠나는 여행 같은 공간이며, 혼란한 세상 속에서 완전히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드는 고요의 장소다. 동시에 그 고요는 단순한 위로나 치유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고요의 긍정적인 얼굴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스며 있는 공허, 적막, 삶과 죽음의 그림자를 함께 끌어안는다.
그래서인지 『방랑 파도』를 읽고 남는 감정은 격렬한 슬픔이라기보다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정서에 가깝다. 바다의 고요함과 적막한 바람, 반복되는 파도의 소리는 슬픔을 끌어내지만 동시에 그 감정을 아주 천천히 가라앉힌다. 우리 역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소설 속 인물들의 고통과 상실은 낯선 이야기로 머무르지 않고 묘한 체념과 이해의 감정으로 스며든다.
작가는 인간의 취약함을 분명히 바라본다. 인간은 쉽게 부서지고, 사랑하기 위해서조차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 속 바다는 슬픔의 공간이면서도 치유의 공간이 된다. 삶의 궤적이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원형적 상태를 반복하는 것처럼, 슬픔 역시 슬픔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삶이라는 치열한 시간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요란한 결심이나 영웅적인 의지가 아니더라도, 그저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 『방랑 파도』는 바로 그 조용한 지속의 힘을 말하는 소설처럼 느껴졌다.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소설 곳곳에 장치처럼 배치된 신의 시선이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해석이다. 그러나 작품 속 신은 인간의 고통에 즉각 개입하여 구원하는 존재라기보다, 고통의 시간을 오래 지켜보는 시선처럼 읽혔다. 그리고 그 고통이 끝에 다다를 무렵에야 비로소 구원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단순히 상실과 슬픔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고통 앞에서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신은 왜 침묵하는가, 그리고 구원은 왜 늘 늦게 도착하는가를 묻는 작품처럼도 다가왔다.
이서아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어보았는데, 문체는 간결하고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추상적이다. 선명하게 설명하기보다 감정과 의미가 어느 정도 흔들리도록 내버려두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에세이에서 말했듯, 이 작품은 독자에게 모든 해석을 친절하게 정리해 건네기보다 어느 정도 방랑하도록 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혼란이라기보다 감상의 선택지가 많다는 뜻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 누군가는 상실의 이야기로, 누군가는 여성들의 삶의 계보로, 또 누군가는 신과 구원에 대한 질문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세 작품 뒤에 실린 작가의 에세이 역시 무척 인상적이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다가왔던 부분들을 작가가 허심탄회하게 풀어내는 글을 읽고 나니, 작품의 결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동시에 그것이 모든 것을 명쾌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았다는 점도 좋았다. 오히려 이해의 끝을 열어둔 채 더 오래 생각하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작품을 재미있게 읽고 난 뒤 밀려오는 여운 때문에 서평단 신청을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시간에 쫓겨 서둘러 감상을 정리하기에는 이 책이 품고 있는 질문과 정서가 생각보다 훨씬 깊었기 때문이다. 『방랑 파도』는 금세 읽히지만 오래 남는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뒤에도 독자를 한동안 그 바닷가 어딘가에, 고요와 공허와 파도 소리 사이에 머물게 한다.
도서를 제공 받아 솔직하게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