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캄캄한 천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 쪽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거기 뭐가 있는 것 같았다.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인가. 자꾸 캄캄해져서 손을 넣어보게 되잖아. 거기서 뭐가 잡히나. 나는 어쩐지 슬픈 기분에 빠진 채 결론을 내렸다. 어둠은 뭐 그냥 어둠이지. 그래서 거기 뭐가 없지.
하나의 겨울이, 다르면서도 비슷한 또하나의 봄이, 그리고 그녀가 없는 나의 여름과, 내가 없는 그녀의 가을이, 무심히 우리 곁을 흘러갔다. 우리는 서로를 잊고, 그렇게 서로를 잊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잊고, 아마도 어느 낯선 계절에 도착해 있겠지. p.76
뭔가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조금씩 있는 마음속의 구멍과 비슷하다. 구멍으로 바람은 들게 마련이고, 그런 바람이라도 좀 들어야 숨을 쉴 수 있는 법이니까.p.119
영혼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짓눌리고 억압받는 정신을 촬영하고 인화할 수 있는 과학이 있다면, 렌즈를 들이대고 분명히 찍어두어야 할 여성의 깊은 상흔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찍어야 상처의 증거가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교묘하고 복합적이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일상적으로 이해되고, 그리하여 일상의 하나로 무심히 잊히는 사회는 진정 옳지 않다.
삶이란 신(神)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나는 오늘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텍스트 그 자체를 거부하였다. 나는 텍스트 다음에 있었고 모든 인간은 텍스트 이전에 있었다. 이건 오만이 아니다.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내가 이 땅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조건이라는 말에서 다소의 불순함이 풍긴다면 기꺼이 태도라는 말로 바꿀 용의가 있다. 나는 나를 건설한다. 이것이 운명론자들의 비굴한 굴복과 내 태도가 다른 점이다. 나는 운명을 거부한다. 절망의 텍스트는 그러므로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