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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길 위의 철학자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현대 사회는 ‘보여주기 강박’에 빠져있다. 실속 없는 박사학위, 오로지 한줄 스펙을 위한 자격증, 뒷산에 올라가도 에베레스트 등정에 필요한 비싼 등산복 사서 입기. 내가 하고 싶은 것과는 관련이 없이 남들보다 우월하게 보이려고 에너지를 쏟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고 피곤하겠는가. 하지만 이정도의 노력은 너무나 흔한 것이어서 자신의 우월성을 보장받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 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높은 곳에만 눈을 두며 자신의 위치에 한탄하고, 분노하게 된다. 이러한 잘못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몇몇 개인이 아닌 우리 사회 전체라고 가히 말할 수 있다.
나 스스로도 우리 사회의 강박증과 조급증에 시달리고 있다. 여유로운 시간에 따뜻한 햇살에 맛있는 음식 앞에서 조급한 마음이나 필요 없는 걱정을 떠올리는 나를 볼 때는 바보가 나오는 코미디를 한 편 보는 기분도 든다. 이런 정신이 마주한 에릭 호퍼의 ‘길 위의 철학자’는 잊고 살았던 나의 자유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에릭 호퍼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유명한 사회철학자이다. 그의 약력은 매우 특이하다. 다섯 살 때 스스로 책을 보며 영어와 독일어를 배웠다. 일곱 살 때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가, 열다섯 살 때 완전히 회복하였다. 열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갖은 일을 하며 여러 지역을 전전하는 길거리 막노동자로 몇 십 년을 살았다. 떠돌이 생활을 하며 그는 놀라운 호기심과 관찰력으로 여러 분야의 책을 섭렵하고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하였다. 이 책은 그의 특이한 삶과 정신을 담은 자서전이다. 저자의 약력만 봐도 참으로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그는 그의 지적능력을 통해 얼마든지 사회의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웨이터를 하다가 만난 학자의 연구를 도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줘서 연구소에서 일할 수도 있었고, 그를 사랑한 여대생이 그의 지적능력을 알아보고 대학과 연결시켜주려고도 했다. 일반적인 사람은 이러한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많은 돈을 벌고, 아름다운 부인과 결혼하여 정착하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도망을 쳤다. 이것에 대한 구구절절한 변명은 없다. 단지 그가 원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지적인 탐구와 사색, 관찰이었다. 부와 명예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돈은 많이 쓰지도 않았고,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되었기에 막노동으로 살 수 있었다. 막노동을 하며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며, 관찰했다. 막노동외의 시간은 독서와 사색으로 보냈다. 그가 노동자에서 사상가로 다시 태어난 곳도 떠돌이 임시 수용소였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더러운 노무자, 평범한 사람들도 그의 정신 속에서는 철학이 되고 이야기가 되었다. 그의 철학은 ‘머리를 아래로, 엉덩이를 위로 한 채’ 태어나는 철학이라고 했다. 이것이 그가 타고난 삶인 듯 싶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이 걸어야 하는 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돈, 지속적인 공동체와 같이 일반사람들이 생명줄과 같이 부여잡으며 자신의 공허한 정신을 가리우는 세속적인 가치가 필요없었다.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 가질 수 없는 것을 왜 가지려하는 지도 모르는 채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삶은 그와는 동떨어진 삶이었다. 그렇게 그는 지적인 내공을 쌓으며 한 걸음 떨어져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며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한 그의 삶에서 담담한 여유와 행복이 느껴졌다.
그의 여유와 행복은 또한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필요없는 외적 추구를 마음에서 내려놓는다면 말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나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것, 나의 행복, 나의 인생이다. 표면적으로 어떠한가에 관계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삶의 기저에는 행복이 단단하게 깔려 있다. 목적을 추구하며 열심히 사는 것은 조급증에 시달리는 삶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에릭 호퍼의 책을 통해 성공 강박을 벗어난 삶의 여유를 느꼈다. 에릭 호퍼의 다른 책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