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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이방인 - 1944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최헵시바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너무나 유명한 소설이다. 많은 글에서 이 소설의 내용을 인용한다. 식민지 알제리에서 프랑스인이 현지인을 덥다는 이유로 총으로 쏘아버린 사건. 입장을 바꾸면 일본인이 식민지 조선인을 덥다고 쏴 죽인거나 마찬가지라고 주로 인용을 했던 것 같다. 이 책의 띠지를 보면 ‘관습과 부조리를 실존주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성별이나 인종 차별로 시끄러운 요즘에 발간이 되었다면, 실존주의 대표작, 노벨상 수상작 타이틀과 함께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한다.
이 책은 주인공 뫼르소의 전지적 1인칭 시점으로 진행이 된다. 뫼르소는 특이한 사람이다. 그는 현재의 기분에만 충실한 것 같다. 과거의 감상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집착 등은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눈 앞에 벌어진 상황, 지금의 날씨, 축축한 수건,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모를 여자 친구와의 스킨십 등이다. 그런 그에게 한 아랍인이 걸려들었다. 그의 일행은 주인공 뫼르소 일행과 시비가 붙었다. 양쪽은 다른 나라 사람이니 만큼 언어나 사고 방식에 있어 잘 통하지 않는 느낌이다. 시비가 끝나고 뫼르소는 남의 총을 지닌 채 더운 해변에서 아랍인을 다시 만난다. 우연히 그도 혼자고, 뫼르소도 혼자다. 땀이 흘러내리고, 머리가 아플 정도의 폭염이 쏟아진다. 뫼르소는 충동적으로 아랍인을 쏴 죽인다.
이 책에 앞서 미국 최초의 실존주의 소설이라는 ‘그들은 말을 쏘았다’를 읽어보았다. 우연인지 아닌지, 이 책에서도 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머리를 쏘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심지어 이 쪽은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람에게 잘 해줬으며, 공감과 선의로 총을 쏴 준 것이다. 독자로서 주인공이 인생을 망친 것만 아니라면 공감이 갈 정도였다. 그래서 ‘실존주의’가 무슨 뜻인지 찾아보았다. 설명이 어려웠다. (이 두 소설을 읽고 나서, 문학작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철학 관련 독서를 시작할 예정이다.) 전체주의 반대말이라고 한다. 집단적, 사회적, 공통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추구하는 각자의 가치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에 따라 실존주의에 속하는 사조나 이론은 매우 다양하다고 한다. 두 소설에서 주인공은 표면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다. 그 결과도 표면적으로 매우 절망적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의 주인공은 피해자를 위한 순수한 선의에서 한 행동이었으며, 뫼르소는 현재에만 사는 사람이기에 그 당시에는 나름의 이유(너무 더워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란 다양성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부담감 없이 자신의 개성을 따라가는데 도움을 줄 것 같다. 또한 사회적 성공과 부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세태에서 외부의 강요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찾고 행복을 추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동시에 적절한 선이 존재하지 않으면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아닐까 한다. 전체주의에 반대해서 나왔지만, 전체주의와 함께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두 소설에서 보듯이 살인까지 갈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아랍인을 계획적으로 죽이지 않았다. 어머니를 무시해서 양로원으로 옮긴 것도 아니고, 상을 당해서 울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이 두 가지는 검사의 손에서 연결되어 배심원들에게 그를 인간성이 결여된 냉혈한으로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다. 변호사가 예상한 형량과 달리, 그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뫼르소는 마침내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서 사형날짜를 기다린다. 이때도 그는 자신이 죽인 사람에 대한 죄책감이나 후회는 전혀 없다. 단지 좋아하는 날씨에 좋아하는 길거리를 거닐지 못해 슬프고, 여자친구를 만지지 못해 답답할 뿐이다. 사형을 앞둔 어느 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는 엄마를 생각한다. 뫼르소는 죽음 앞에서 맞이하는 해방감, 여기서 피어나는 진정한 삶에 대해 깨닫는다. 세상이 주는 진리를 깨닫게 되자, 그는 행복해진다. 표면적으로 살인자, 사형수, 사제님 멱살을 잡은 사람이지만, 내면으로는 삶의 진리를 깨달은 현자가 되어 죽어간다.
두 가지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지루한 삶을 끝내고, 죽음 앞에서 삶의 진면목을 얻는 과정에서 사람을 죽인 것은 여전히 불편하다. 모든 것에 무심하고 현재 처한 상황에만 반응하는 뫼르소도 이해하기 어렵다(나의 이런 생각도 관습과 부조리??). 하지만 과거, 미래 어느 쪽에도 매달리지 않는 주인공이 현자같이 느껴지긴했다. 죽음을 앞두고 세계가 자신의 친구와 같고, 행복하다고 느낀 것도 현자 같다. 권태로 살아왔지만 인생을 포기한 기쁨을 누리는 것도 소설 말미에 지워지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