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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책
폴 서루 지음, 이용현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0월
평점 :
한 달 동안 혼자 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쉴 때였다. 특별히 여행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여행 마니아인 선배가 옆에서 계속 펌프질을 해준 덕에, 간신히 비행기와 숙소 정도만 예약하고 가이드북 두 권을 들고 떠났다.
혼자 하는 여행은 자유라면 자유였고, 외로움이라면 외로움이었지만, 무서웠던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외국어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영어가 유창하지도 않지만, 때때로 상대방의 말을 못 알아듣기도 했지만,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내가 '이방'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건 혼자 국내를 여행할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이방인이 되고 싶은 욕망", "이국적인 풍경을 경험하며 미지의 것을 기꺼이 마주하고 싶은 욕망"이란 구절을 읽고, 그때의 여행이 떠올랐다. 지금도 나는 여행 준비가 귀찮아서 여행을 잘 못 가는 사람이지만, 그 여행에서 느꼈던 이방인의 감각은 종종 그립다.
책은 뭐랄까, 여행자를 위한 바이블 같은 느낌이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기차 여행의 즐거움', '완벽한 현실 도피를 위한 여행의 규칙', '여행기를 쓴다는 것', '얼마나 오래 여행하는가', '여행자의 가방 속', '여행의 동반자들', '시련으로서의 여행', '여행에서 얻은 다섯 가지 통찰' 등 저자인 폴 서루는 여행을 둘러싼 모든 것을 담고 싶었던 것 같다. 구성이나 형식이 독특한 만큼,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방법과 용도로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여행 안내서이자 실용서, 문집이자 편람, 독서 목록이자 회상록으로도 간주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도 말했듯이. 굉장히 문학적이면서 철학적이기도 하고, 어떤 장들은 실용적이기도 하다. 여행 문학의 정수들을 모은 책답게 좋은 문장들이 가득한데, 밑줄을 긋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다.
"익명으로 남는 것은, 그런 상태로 흥미로운 장소를 여행하는 것은 떨쳐버릴 수 없는 유혹이다. 그것은 중독이다."
_폴 서루, 『바다에 면한 왕국』
"모든 훌륭한 여행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옮겨져 공포와 경이의 한가운데에 놓이는 것이다."
_피코 아이어, 「우리는 왜 여행하는가」, 『살롱』
"외로움이라는 마법은 여행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외로움은 어떤 일이 일어나게 만든다."
_조너선 라반, 「왜 여행하는가?」, 『고향으로 차를 몰고 가다』
"관점은 여행을 떠나야 비로소 변화한다."
_제임스 볼드윈, 『산 위에 가서 말하라』
책을 읽다 보면 자꾸만 내가 했던 여행들을 떠올려보고 곱씹게 된다. 공감하고 비교하고 때론 반박하면서, 여행이란 무엇인지, 왜 여행하는지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또 하나, 여행 문학이라는 장르가 이토록 넓고 깊었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는데,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행은 곧 인생에 대한 은유이기에, 또 "여행에 대한 동경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어쩌면 다음 여행에서는 이 책에 실린 많은 작가들처럼 나만의 여행기를 써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