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버 드림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조혜진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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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서평은 창비에서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 하였습니다*

 

1 책 소개

 

동시대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빛나는 별

사만타 슈웨블린의 대표작 국내 첫 출간!!

 

★2021 공개 예정 오리지널 무비 원작소설

★2017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 셜리잭슨상 중편 부분 수상

★2015 티그레후안상 수상

 

2 . 피버드림을 읽는 세 가지 키워드

 

[사만타 슈웨블린이라는 장르]

 

글을 쓰는 사람, 직업으로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은 한번 쯤 '나만의 글' 애 대해 고민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 글에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아도 내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나만의 느낌이 나는 그런 글들 말이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그 작가를 떠올리 수 있는 작품들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소소하지만 유쾌한 사건들과 함께 알파벳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윤성희 작가님과 단백하고 간결한 문체로 사회이 약자들의 모습을 그리는 황정은 작가님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글을 읽는 것만으로 작가를 떠올리 수 있는 것 또한 대단한데, 피버드림의 작가는 그 이름 자체가 하나의 장르라고 불리 정도로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소설을 진행시켰다고 하니 호기심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소설을 읽기 전 마음속으로 단단한 각오를 했다. 기존에 소설이 진행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은 탓인지, 피버드림을 먼저 읽은 다른 독자들의 반응이 어렵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소설의 첫 부분을 가볍게 소개해 보자면 이렇다.

-벌레 같은 거예요.

-무슨 벌레 인데?

-벌레 같은 거요. 어디에나 있는.

내 귀에대고 속삭이는 건 남자아이다. 질문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첫 장면부터 훅 들어오는 벌레. 이 소설에서 벌레가 상징하는 것들과 그리고 그 벌레가 전달하는 의미를 찾아내하 하는 숙제를 던져 주며 이야기는 시작했다. 그리고 소설을 진행하는 방식 또한 독특했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아만다와 영혼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소년 다비드의 대화로만 소설은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모호하다. 분명 아만다는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마치 전생체험을 하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체면술사가 뭐가 보이나요? 하면 말이 보여요. 이런식으로 말이다. 확실히 낯설고 새로운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대단하다. 다비드가 알고 싶은 '벌레(병읜원인)는 정확히 언제 생겨 났는가?와 아만다의 '딸 니나는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서로 알고 싶은 것을 대화로서 찾아가는 방식이 흥미롭니다.

그리고 각각의 인물과 '녹색집' 같은 사물들이 상징하는 의미를 찾아보는 재미와, 또 소설 곳곳에 깔려 있는 강렬한 이미지와 공포를 느끼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매력 또한 가지고 있다.

과연 그 동안 만나기 힘든 새로운 장르라는 말이 맞았다. 작가이름 작체가 새로운 장르라 불리는 이의 소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새로운 독서 재미를 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언급한다.

[내 안의 공포를 발견하는 순간]

 

이 소설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분위기는 '공포'이다.

다비드와 아만드의 대화 속에서 독자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포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작가는 환경재앙을 염두해 두고 소설을 진행했다고 했지만 작가의 의도를 모르고 읽었던 나는 조금 다른 해석을 했다. 내 해석을 옮겨보다면 이렇다.

나는 소설을 읽는 동안, 여러가지 형태의 폭력으로부터 노출된 아이들을 떠올렸다. 피버드림의 사건이 시작은 카를라가 감염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녹색집의 여인에게 데려가면서 시작한다. 녹색집의 여인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아이의 영혼을 다른 몸으로 이체 시켜야 한다는 처방을 내린다. 영혼이 이체되면서 병도 어느정도 넘어가게 되며, 한 몸에 한 영혼 밖에 존재 할 수 없으니 원래 아이의 몸에는 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오게 된다고 했다.

"우리가 제때 다비드의 정신을 다른 몸으로 옮기면 독성고 일부 같이 옮겨간 댔어요. 두 몸으로 나뉘면 중독을 이겨낼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확실한 방법은 아니지만 효과는 볼 수 있다고 했어요."

"여인은 자기가 가족을 선택할 순 없다고 했어요." 카틀라는 말을 이었어. "다비드가 어디를 갈지 알 수 없다고요. 그리고 이체에는 결과를 따르는 거라고 했어요" 하나의 몸에는 두 정신이 머물 자리가 없고, 정신이 없는 몸도 없으니까요. 이체가 이루어지면 다비드의 정신은 건강한 몸으로 옮겨가겠지만, 한편 낯선 정신이 아픈 몸으로 옮아오겠죠. 두 정신 모두 일부가 상대방에게 남아있을테고 다비드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죠. 그러니 나도 아이의 새로운 모습은 받아들여 할 테고요."

이 장면을 보고 나는 아이의 영혼을 그대로 키우기 보다는 사회적 시선과 조건에 맞추어 아이를 마음대로 바꾸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내 마음 속에는 이런 현상으로 어릴 때부터 영혼을 잃고 키워진 사람들에 대한 공포심을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건 나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을 읽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마음 속에 공포에 맞추어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네 눈은 남편의 시선을 간절히 좇아. 하지만 너희 아빠는 안전벨트를 풀고 네 팔을 잡아 끌지. 남편은 화가 난 채 차에 올라타. 두 사람의 형체가 점점 멀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여.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진 채 차례로 집에 들어가고, 안에서는 문이 잠기지. 그제야 남편은 시동을 걸고 내려가 시간을 허비했다고 느껴. 마을에서 차를 멈추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 않아. 콩밭도, 메마은 땅도 가로질러 흐르는 개천도 가축 한 마리 없이 몇킬로미터나 드넓게 펼쳐진 평원도, 별장도 쳐다 보지 않고 도시에 다다르지. 집에 가까워 질수록 점점 속도가 느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 하고. 수 많은 자동차가 갈수록 더 많은 차들이 아슬파트 위를 덮고 있다는것도, 교통이 정체되어 몇 시간 동안 오도가도 못 한채 뜨거운 배기가스를 내뿜고 있는 것도. 그이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해. 어딘가에서 불 붙은 도화선처럼 나침내 느슨해진 실을, 이제 곧 분출되기 일보 직전인 움직이지 않는 재앙을.

작가는 환경오염을 외면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통해 경고를 하고자 하는 의도였겠지만 (아마도 맞겠지?) 나는 폭력에 노출 되어 있는 아이의 눈빛을 외면한 채 평온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봤다.

이래저래 오해는 했지만 이건 내 독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읽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 들이는 것도 좋겠지만, 그 책을 읽는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투영시켜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도, 나름의 독서의 매력이 아닐까.(라고 변명을 해 본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독자가 자신 안의 공포를 발견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매력이 아닐까.

 

 

[그럼 다시 작가의 의도로 돌아가서]

 

*

작가는 아리엔티나의 무분멸한 농약 살포와 그로 인한 환경 오염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이 소설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농약에 내성이 있는 유전자 변형, 조작 콩을 생산하면서 농약 남용의 부작용과 점박이 소녀까지 인간에게 실질적인 공포로 다가온 사건이 있었다. 환경문제가 심각해졌구나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크게 와닿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작 내 발 밑에 떨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적절한 예시인지 모르겠지만 영화 속에서 우리는 수 천면 수 만명이 죽는 재앙을 보면 제법 담담하게 볼 수 있지만, 단 한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라도 실제로 나나 내 주변 가족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 상황에 더 공감하고 심각하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문제는 어떻게든 우리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당장 내 옆에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책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작가는 우리의 무관심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경고를 한다.

네 눈은 남편의 시선을 간절히 좇아. 하지만 너희 아빠는 안전벨트를 풀고 네 팔을 잡아 끌지. 남편은 화가 난 채 차에 올라타. 두 사람의 형체가 점점 멀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여.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진 채 차례로 집에 들어가고, 안에서는 문이 잠기지. 그제야 남편은 시동을 걸고 내려가 시간을 허비했다고 느껴. 마을에서 차를 멈추지 않고 뒤를 돌아보지 않아. 콩밭도, 메마은 땅도 가로질러 흐르는 개천도 가축 한 마리 없이 몇킬로미터나 드넓게 펼쳐진 평원도, 별장도 쳐다 보지 않고 도시에 다다르지. 집에 가까워 질수록 점점 속도가 느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 하고. 수 많은 자동차가 갈수록 더 많은 차들이 아슬파트 위를 덮고 있다는것도, 교통이 정체되어 몇 시간 동안 오도가도 못 한채 뜨거운 배기가스를 내뿜고 있는 것도. 그이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해. 어딘가에서 불 붙은 도화선처럼 나침내 느슨해진 실을, 이제 곧 분출되기 일보 직전인 움직이지 않는 재앙을.

*

소설에서 많이 언급되는 단어 중 구조거리라는 말이 나온다. 주인공 아만다는 딸 니나를 지키기 위해 구조거리를 유지하고자 한다.

카를라에게 일어난 일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을지 궁금해. 나는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거든. 지금 당장은 니나가 느닷없이 수영장으로 달려가 뒤어든다면 내가 차에서 뛰쳐나가 그 애한테 이르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계산 중이야. 나는 그걸 구조거리 라고 불러. 딸 아이와 나를 갈라놓는 그 가면적인 거기를 그렇게 부르는 거지.

니나가 위험에 노출되는 순간을 방지하기 위해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아이가 위험에 빠질 때 구해내고자 한다. 이건 지구와 우리의 거리를 뜻할 것이다. 코로나가 발생하고 그로인해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멸종했던 동식물들이 발견 되고, 자연경관이 다시 아름다움을 찾고 있다는 기사를 종종 본다.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인간이 재앙 또는 오염물질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지구를 지킬 구조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고, 소설 중간중간 다비드가 하는 반복적인 말처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요즘이다. 환경적 제앙이 실질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의식적이든, 제도적이든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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