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님의 "딜레탕티슴에 대하여"

정말 의아한 일이네요. 독일어 원문이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도 아니고, 부르크하르트의 논지도 오해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데 말입니다. 인용하신 부분을 제가 가진 독어판에서 번역해보겠습니다. "딜레탕티즘이라는 말은 예술분야로부터 악명을 얻게 되었다. 물론 예술이란 본질적으로 완전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예술분야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대가이거나 둘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뿐이고, 삶을 통째로 작품에 쏟아 부어야 한다. 이와는 달리 이제 학문분야에서 우리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대가가, 다시 말해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학자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조망을 할 줄 아는 능력과 이러한 조망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영역이라 하더라도 가능한 한 많은 영역에서 딜레탕트가 되어야 한다. 자신의 지식을 늘려가고, 풍부한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 적어도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문분야가 아닌 모든 분야에서 무식한 자로, 때로는 아주 조야한 인간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딜레탕티즘 자체를 옹호하는 말은 아닙니다. 딜레탕티즘의 불가피함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요. 위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부르크하르트의 말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딜레탕트는 대상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으므로, 살아가면서 여러 분야에 실로 깊이 파고드는 일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부르크하르트는 딜레탕트를 단죄하는 것도, 딜레탕트와 전문가의 경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지요. 인간의 지식과 사고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학자는 자신의 전문분야를 갖고 깊이 파고들되, 다른 분야에서도 전문가 수준은 못되더라도 폭넓은 지식과 식견을 쌓아가야 한다는, 보기에 따라서는 매우 평범한 진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위의 인용문에서는 이런 딜레탕트 수준의 식견으로는 책을 쓴다거나 전문가행세를 한다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일정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번역이 저렇게 되었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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