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이야기 ㅣ 역사인물도서관 5
강영준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4년 2월
평점 :
🔖
모든 일은 시에서 시작됐다. 시를 써야 하기에 타협할 수 없고, 시를 써야 하기에 새로운 영감을 찾아야 하고, 시를 써야 하기에 남이 아닌 나가 되어야 했다. (중략) 시를 쓰는 동안 납처럼 무거운 고독을 안고 사는 사람, 그가 시인이다. 운명이다. 시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의 운명.(P.181)
🔖
그런 죄라면, 그런 운명이라면 고독한 시인의 삶은 어쩌면 숭고하다. (중략) 석은 희미한 15촉 전등 불빛 아래 시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중략)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P.182~3)
2년 전, 이육사 시인의 삶을 펼쳐낸 책, 역사인물 도서관 시리즈 [칠월의 청포도 - 이육사 이야기]를 만났다. 일제 강점기의 그늘 속에서 시로서 희망을 노래했던 시인 이육사의 삶, 그의 작품들이 태어나게 된 육사의 삶을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감명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역사인물 도서관 시리즈가 오랜만에 출간되었다. 백석 시인의 삶을 다룬 책 [백석 이야기 - 흰 바람 벽이 있어], 다섯 번째 이야기이다. 백석 시인이라고 하면 잘생긴 월북 시인으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고, 평안도 방언과 고어를 사용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향토적인 시를 썼다는 것까지가 백석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영 어덜트를 위한 책이라서일까, 소설 한 편을 읽는 듯 편하게 술술 읽을 수 있었다. 마치 백석의 삶을 영화화한 것을 재미있게 본 느낌이랄까. 백석의 삶 속 장면들을 펼쳐내면서 그사이 사이 백석의 시가 제 자리에 콕콕 박혀있다. 아마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면 근사한 뮤지컬 영화가 탄생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책은 일본 유학을 마친 백석이 <조선일보>사 교정부에 출근하며 친구 신현중을 만나게 된 장면에서 시작된다.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훗날 자신이 흠모하던 여인 경련을 앗아가는 현중. 그리고 새롭게 그의 곁을 지켜주는 자야. 그는 진정한 로맨티스트였지만,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했고, 늘 그리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후 친일의 그림자가 퍼지는 경성을 떠나, 만주로 향한 백석은 그곳에서 문학활동을 한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북한에서 매우 제한적인 활동만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988년 재북 작가에 대한 출판 금지 조치가 해제되며 재북 문인들의 작품이 출판되며 그의 작품들이 다시금 국내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고3인 딸아이는 이른바 문학덕질을 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를 버텨낸 여러 국내 문학가들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들의 삶을 듣는 것을 너무 행복해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고 여러 문인들의 각자 다른 선택을 하게 된 배경을 알게 되는 것, 또 그들이 힘겹게 세상에 내민 작품들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것이 참 좋다고 한다. 그래서 [칠월의 청포도] 책도 참 좋아하던 큰딸이었다. 엄마인 나는 항상 "정말 신기한 별 덕질이 다 있네."라며 웃어넘기는 입장이었다. 문학력 부족해서일까?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한 사람의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고 삶의 장면들을 들여다보니 시대의 모습이 보인다. 한 사람의 고뇌와 번민, 그 안에서 힘겹게 써 내려간 작품들에 담긴 마음이 느껴진다. 사람을 이해하고 글을 이해하고 이유를 이해하고 시대를 이해하게 되는 이 과정이 무척 흥미롭고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이래서 문학을 향유하는 삶은 아름답고 풍요롭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청소년들에게 문학이 지닌 힘을, 그리고 의미를 일깨워주는 정말 좋은 책이다. 청소년들, 아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위 리뷰는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