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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사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평점 :
얼마 전에 친구네 강아지가 죽었다. 강아지라고 하기에는 좀 크긴 했으나 놀아주지 않으면 밖에서 심통난 듯 문을 긁고, 내가 친구를 한 대 때릴라 치면 달려와 컹컹 짖는 그것은 분명 강아지였다. 나는 새벽 2시에 페이스북을 하다가 채팅창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친구는 동물 병원 응급실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글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밥은 꼭 챙겨 먹고, 잠은 좀 자라고" 나는 그렇게 썼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쉬울 지도 모른다. "안됐다." "불쌍하다." "힘내." "울지 마." 나는 그것이 충분히 울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단순히 안됐거나 불쌍한 일이 아니며 힘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 동생이 죽었어." 와 같은 일인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 이었다.
영화 <컨텍트>의 이성적인 과학자였던 조디 포스터는 우주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한 외계인을 만난 후 재판장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그녀는 이해 받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 현실에서 대응물을 찾을 수 없기에 언어로는 도저히 형이상학을 말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것을 만난 이들은 도저히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다른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이 된다.
그러니 시인이 정상일 수 없다. 이미 세계의 끝을 본 사람이 정상일 수 있으랴. 최승자는 인터뷰에서 "이미 우리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걸 알고 나니 허무해졌다. 그래서 신비주의에 탐닉했다. 그것은 적어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까." 하고 말한다. 작가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고, 어느 도사께서 말씀하셨다. 통찰력이 깊은 자는 세상의 끝을 볼 것이 분명하고, 그 사실은 사람을 파괴한다. 끝이 있는 것을 알면서 지금 사랑하고, 결투를 벌이고, 고뇌하며 살아나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벅찬 애정이 있기에 우리는 시인이 된다. 마치 진짜 재미있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들어버린 기분일 것이다. 도저히 열심히 볼 기분이 나지 않는다. 다 때려치고 죽어버리고 싶다.
그래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 이상한 전개다. 왠 하루키?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집에서 간단한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맛있는 새우 튀김을 먹으러 나가고, 무엇보다 마라톤을 한다. 그가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가졌는지, 혹은 그가 세계의 끝을 보았는지 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소설가이며 마라톤을 뛴다. 그것은 삶을 향한 움직임이다."작가는 슬픔이 있어야 한다."고, 또 어느 도사께서 말씀하셨다. 그 슬픔이라는 것은 근원적인 슬픔이다. 존재에 대한 슬픔이다. 통찰력이 있는 자가 꿰뚫어 본 어쩔 수 없는 종말에 대한 슬픔이다. 그것을 안고 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는 드디어 만난 연쇄 살인마 박해일에게 물었다. "밥 먹었냐?" 그렇다. 밥을 잘 챙겨 먹는 것이다. 잠을 잘 자는 것이고, 아침에 일어나 한강 변을 뛰는 것이다. 가장 솔직하고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최승자의 시에는 유독 "밥이 먹기 싫고", "절망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 "청계천 거리에는 밥집과 술집이 있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성교하는 일상의 언어가 딱히 꾸미지도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존재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녀의 시에서 그것은 일상과 투쟁하는 여자로 나타난다. "밥을 먹기 싫다는" 것은 삶을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동시에 그토록 밥 타령을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처절한 갈망이다.
그녀의 시에 대한 평론을 읽자면 그녀를 80년대의 상처 받은 영혼으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의 시인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쓰는 시에서 나타나는 근원적인 공포, 불안의 정서는 그 이상의 것, 형이상학의 영역, 인간 존재 근원에 대한 공포다. 그것은 너무나도 깊고 큰 상처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홀로 안고 쓰러지는 그녀를 두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녀가 처절하게 뱉어내는 시를 읽으며 각자의 상처를 핥는 것이 전부다.
움베르트 에코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시인이 존재한다. 하나는 열여덟 살에 자기 시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좋은 시인이요, 다른 하나는 평생 시를 쓰는 나쁜 시인이다." 라고 했다. 최승자는 평생 시를 쓰며 우리에게 죽음과 불길한 삶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나쁜 시인이다. 덕분에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제 귀를 잘라야 했던, 평생을 고통에 시달리다 자살한 고흐의 그림에서 우리가 차마 "말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보듯, 우리는 최승자의 시에서 그것을 본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모든 자신의 존재를 걸고 삶 전체 속에서 싸워온, 어떤 숭고한 인간만이 써낼 수 있는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