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읽을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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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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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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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6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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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친구네 강아지가 죽었다. 강아지라고 하기에는 좀 크긴 했으나 놀아주지 않으면 밖에서 심통난 듯 문을 긁고, 내가 친구를 한 대 때릴라 치면 달려와 컹컹 짖는 그것은 분명 강아지였다. 나는 새벽 2시에 페이스북을 하다가 채팅창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친구는 동물 병원 응급실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글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밥은 꼭 챙겨 먹고, 잠은 좀 자라고" 나는 그렇게 썼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쉬울 지도 모른다. "안됐다." "불쌍하다." "힘내." "울지 마." 나는 그것이 충분히 울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단순히 안됐거나 불쌍한 일이 아니며 힘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 동생이 죽었어." 와 같은 일인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 이었다.

 영화 <컨텍트>의 이성적인 과학자였던 조디 포스터는 우주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한 외계인을 만난 후 재판장에서 신의 존재에 대해 말한다. 그녀는 이해 받지 못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 현실에서 대응물을 찾을 수 없기에 언어로는 도저히 형이상학을 말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것을 만난 이들은 도저히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다른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이 된다.

 그러니 시인이 정상일 수 없다. 이미 세계의 끝을 본 사람이 정상일 수 있으랴. 최승자는 인터뷰에서 "이미 우리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걸 알고 나니 허무해졌다. 그래서 신비주의에 탐닉했다. 그것은 적어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까." 하고 말한다. 작가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고, 어느 도사께서 말씀하셨다. 통찰력이 깊은 자는 세상의 끝을 볼 것이 분명하고, 그 사실은 사람을 파괴한다. 끝이 있는 것을 알면서 지금 사랑하고, 결투를 벌이고, 고뇌하며 살아나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벅찬 애정이 있기에 우리는 시인이 된다. 마치 진짜 재미있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들어버린 기분일 것이다. 도저히 열심히 볼 기분이 나지 않는다. 다 때려치고 죽어버리고 싶다.

 그래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 이상한 전개다. 왠 하루키?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집에서 간단한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맛있는 새우 튀김을 먹으러 나가고, 무엇보다 마라톤을 한다. 그가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가졌는지, 혹은 그가 세계의 끝을 보았는지 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소설가이며 마라톤을 뛴다. 그것은 삶을 향한 움직임이다."작가는 슬픔이 있어야 한다."고, 또 어느 도사께서 말씀하셨다. 그 슬픔이라는 것은 근원적인 슬픔이다. 존재에 대한 슬픔이다. 통찰력이 있는 자가 꿰뚫어 본 어쩔 수 없는 종말에 대한 슬픔이다. 그것을 안고 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는 드디어 만난 연쇄 살인마 박해일에게 물었다. "밥 먹었냐?" 그렇다. 밥을 잘 챙겨 먹는 것이다. 잠을 잘 자는 것이고, 아침에 일어나 한강 변을 뛰는 것이다. 가장 솔직하고 보편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최승자의 시에는 유독 "밥이 먹기 싫고", "절망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 "청계천 거리에는 밥집과 술집이 있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성교하는 일상의 언어가 딱히 꾸미지도 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존재의 근원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녀의 시에서 그것은 일상과 투쟁하는 여자로 나타난다. "밥을 먹기 싫다는" 것은 삶을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동시에 그토록 밥 타령을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처절한 갈망이다.

 그녀의 시에 대한 평론을 읽자면 그녀를 80년대의 상처 받은 영혼으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투쟁의 시인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쓰는 시에서 나타나는 근원적인 공포, 불안의 정서는 그 이상의 것, 형이상학의 영역, 인간 존재 근원에 대한 공포다. 그것은 너무나도 깊고 큰 상처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홀로 안고 쓰러지는 그녀를 두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녀가 처절하게 뱉어내는 시를 읽으며 각자의 상처를 핥는 것이 전부다.

 움베르트 에코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시인이 존재한다. 하나는 열여덟 살에 자기 시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좋은 시인이요, 다른 하나는 평생 시를 쓰는 나쁜 시인이다." 라고 했다. 최승자는 평생 시를 쓰며 우리에게 죽음과 불길한 삶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나쁜 시인이다. 덕분에 우리는 위로를 얻는다. 제 귀를 잘라야 했던, 평생을 고통에 시달리다 자살한 고흐의 그림에서 우리가 차마 "말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보듯, 우리는 최승자의 시에서 그것을 본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모든 자신의 존재를 걸고 삶 전체 속에서 싸워온, 어떤 숭고한 인간만이 써낼 수 있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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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32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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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황지우는 시인이 아니라 교수입니다. 어려울 수록 솔직하게 쓰는 맞다고, 적어도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글은 솔직하게 쓰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황지우 교수님이 아니라 황지우 시인에 대해 써야겠죠. 아니면 적어도 시에 대해. 하지만 그게 되지도 않을 뿐더러 저는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맞고 틀린 것은 없다고 하지만 언제나 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합니다. 좋은 쪽에 가까운 것도 있고 좋지 않은 쪽에 가까운 것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기준을 찾느라 힘들게 헤매는 중입니다. 그래서 시집은 솔직히 단순한 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찾는 데의 어떤 정보로써 많이 다가왔습니다. , 저는 객관성을 잃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객관성을 잃은 상태로 어떤 의견을 내놓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까요? 의미는 있지만 비판 받아야 일일까요?

 황지우의 시는 '질문' 던지고 있다는 평론을 적이 있습니다. 흔히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해체적 형식을 통해, "삶의 보고서" 통해. 저는 질문 깊은 곳에서 암암리에 잠식 중인 강렬한 시인의 자의식을 발견합니다. 그는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사실 어딘가 깊은 곳에는 그의 답이 쓰여 있습니다. 형식은 모두 그의 메시지를 향해 있고 그것은 서사적인 면모를 갖습니다. 그는 단순히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건축가처럼 하나 하나 구조를 쌓아 올립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새롭고 놀라운 형태를 띕니다. '반짝 반짝'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무척,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삶에 붙인 디테일하고 빛나는, 다양한 소재를 한데 버무리는 것도 좋고 다양한 형식도 좋습니다. 그의 질문은 명료하고 방식은 세련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여기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이유에서 입니다. 저는 황지우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 학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황지우 시인과 그의 시에 대해서 '' 이야기 수는 없습니다. 때로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교수님은 수업 언젠가 스스로를 '글쓰기 도사' 라고 칭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시는 도사 수준인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 도사일까요? 그가 글이 도사가 것과 같다면 그는 도사인 걸까요? 이쯤에서 철학자를 인용하면 좋겠지만 저는 아는 철학자가 없습니다. 아마 교수님은 들뢰즈나 라캉을 인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는 철학자조차 변변하지 못한 제가 그를 평가하는 것은 남들은 코웃음 칠만한 일이고 배를 잡고 웃을만한 일은 아닐까요? 저는 질문합니다. 그리고 사실 질문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쥐어짜도 나오지 않는 말을 내뱉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황지우의 시는 전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떤 해답을 주지 않기에 혹자는 낭만주의적 경향이라고 한다고 하죠. 반면 다른 이는 그것을 '새로운 삶을 희구하는 남성적 낭만주의' 라고 칭합니다. (남성적이라는 뭘까요? 그건 바른 용어인 걸까요?) 하지만 저는 그게 제대로 질문 같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는 새로운 삶을 확실하게 추구하고 있으며 스스로의 반짝이는 재능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보입니다. '내가 사랑한 자리마다 모두 폐허' 라고 외치는 시에서 마저 저는 그의 어떤 자학적 자기 확신을 봅니다. 제가 너무 꼬인 걸까요? 어린 아이의 치기일까요? 나이가 들면 그가 얼마나 엄청난 도사였는가, 그의 뜻이 무엇이었나, 그의 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었는가 있을까요?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솔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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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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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기숙사에 살고 있기 때문에, 친절하고 싼 세탁소나 미용실을 찾기 위해 학교 익명 게시판에 자주 들어가고는 한다. 거기 얼마 전에 올라 온 것이 학교 신문에 있던 기사, '김일성 만세' 에 대한 비난 글이었는데 주제가 주제인만큼 격렬한 토론이 벌어져 댓글이 수십 개나 달리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그러다 누군가 김수영의 시를 올렸고 거기에도 또 토론이 벌어졌다.

 나는 그 댓글을 다 읽지 않았다. 우리 아빠와 삼촌은 정치 얘기를 '한다'와 '안 한다' 로 나뉘어 싸우는 사람들이다. 정치 성향까지는 가지도 않고 선거 때면 감성적인 엄마의 의지에 따라 겨우 투표나 하고 오는 부도덕한 시민이다. 덕분에 내가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는 '글러 먹은 판' 정도고, 이런 소극적이고 무책임한 시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부끄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길디 긴 댓글들을 대강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나 훑는 데만 그쳤다.

 내가 이런 별 쓸모 없는 이야기를 굳이 적고 있는 것은 내가 이 책을 대하는 태도가 이 게시물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솔직해진 것 같아 (심지어 적나라한 것 같아) 좀 걱정이 되기 시작하지만, 실제로 그런 걸 난들 어떡하겠나. 나는 '기침을 하라' 던가 '풀이 눕는다' 던가 정도 밖에는 김수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알아 봤자 기침 : 저항, 눈은 동그라미 치고 순수, 이런 게 다였던 것이다. 읽다보니 그는 전체적으로 김일성 만세' 스러운 시를 줄곧 쓰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격렬한 저항의 정서에 매우 피곤해졌다. 나는 분명히 정호승이나 도종환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툭하면 여편네를 들먹이며 여성 비하의 시선을 내보이지를 않나 미국 놈 좆대강이나 빨라고 하질 않나, 그 들끓는 분노와 설움의 정서는 나를 너무 지치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녹다운 된 것은 그 절대 감기지 않을 것 같은 눈, 집요하게 따라 붙는 시인의 시선이었다. 나는 <인간의 굴레>를 1권, 딱 반 만 읽었는데 너무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무시무시하게 냉혹하고 세밀한 작가의 시선이 모두가 숨기고 싶은 (하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인!) 지저분한 인간과 인생사를 다 까발려 놓고 있으니 독자이자 인간인 나는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김수영은 어떤 의미에서는 더 하다. 그는 까발려 놓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라고, 우리를 잡고 뒤흔든다. 우리는 '왕궁 대신에 설렁탕집 주인년한테 옹졸하게 욕이나 하는' 그런 인간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향한, 인간을 향한 시선을 결코 편히, 아무렇게나 두는 법이 없다. '사물의 생리와 우매와 명석성을 바로 보려' 하는 그의 눈은 마치 잠을 자지 않는 파수병처럼 감기는 법이 없다. 그는 피로할 정도로 명확하게 세상을 보고 따지려 드는 종류의 사람이었고, 그런 시를 썼다. 심지어 토끼나 식모 같은 시에서도 그의 언어는 감상으로 빠지는 일이 없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다보면 사실 그는 딱히 '김일성 만세'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그가 꿈꾸던 것은 단순한 어떤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이상 세계가 아니라 어쩌면 <달나라의 장난> 같은, 그 팽이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사실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른다. 리뷰를 써야 하니까 급하게 읽은 네이버 사전은 그를 자유를 꿈꾸던 시인이었던가 현실 참여적인 저항 시인인가 대충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두었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나도 그를 '대충 그런 식으로' 읽었다. 그러다가 피로해진 나머지 내가 읽고 싶은 것만 더 읽었다. 자장가 같은 것, 잔인의 초 같은 것, 시인의 일기와도 같은 시.

 그러다보니 나는 그가 정말 그냥 '시인' 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분명히 엿 먹으라는 식으로 침을 탁탁 뱉어내는 식으로 난해하고 공격적으로 저항하는 시인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그런 태도에는 인생에 대한 고뇌 같은 것, 전혀 현실 참여적이지 않은, 술에 찌들어서 여편네나 패고는 이상을 생각하고 현실과 비교하며 앉아 우는 시인의 모습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결코 세상을 똑바로 보려는 노력 만큼은 멈추지 않는 사람. 괴로우면 무시해버리고 소시민적 망각에 빠져 살면 될 것을 도저히 눈을 감을 수 없었던 파수병. 파수병의 설움. 그래서 다들 '풀'을 좋아하는가 보다. 이제껏 그 속에서 괴로워하던 이가 약간 달관한 태도로, 더 이상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는 공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나는 그것보다는 '봄 밤'이 좋았다. 그는 아직 공자는 아니지만 조금은 스스로의 상처를 핥기도 했던 것이다. 가끔은 스스로를 귀여워하기도 했던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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