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 32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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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황지우는 시인이 아니라 교수입니다. 어려울 수록 솔직하게 쓰는 맞다고, 적어도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글은 솔직하게 쓰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황지우 교수님이 아니라 황지우 시인에 대해 써야겠죠. 아니면 적어도 시에 대해. 하지만 그게 되지도 않을 뿐더러 저는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맞고 틀린 것은 없다고 하지만 언제나 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합니다. 좋은 쪽에 가까운 것도 있고 좋지 않은 쪽에 가까운 것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기준을 찾느라 힘들게 헤매는 중입니다. 그래서 시집은 솔직히 단순한 시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찾는 데의 어떤 정보로써 많이 다가왔습니다. , 저는 객관성을 잃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객관성을 잃은 상태로 어떤 의견을 내놓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까요? 의미는 있지만 비판 받아야 일일까요?

 황지우의 시는 '질문' 던지고 있다는 평론을 적이 있습니다. 흔히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해체적 형식을 통해, "삶의 보고서" 통해. 저는 질문 깊은 곳에서 암암리에 잠식 중인 강렬한 시인의 자의식을 발견합니다. 그는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사실 어딘가 깊은 곳에는 그의 답이 쓰여 있습니다. 형식은 모두 그의 메시지를 향해 있고 그것은 서사적인 면모를 갖습니다. 그는 단순히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건축가처럼 하나 하나 구조를 쌓아 올립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새롭고 놀라운 형태를 띕니다. '반짝 반짝'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무척,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삶에 붙인 디테일하고 빛나는, 다양한 소재를 한데 버무리는 것도 좋고 다양한 형식도 좋습니다. 그의 질문은 명료하고 방식은 세련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여기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이유에서 입니다. 저는 황지우 교수님의 수업을 듣는 학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황지우 시인과 그의 시에 대해서 '' 이야기 수는 없습니다. 때로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교수님은 수업 언젠가 스스로를 '글쓰기 도사' 라고 칭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시는 도사 수준인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 도사일까요? 그가 글이 도사가 것과 같다면 그는 도사인 걸까요? 이쯤에서 철학자를 인용하면 좋겠지만 저는 아는 철학자가 없습니다. 아마 교수님은 들뢰즈나 라캉을 인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는 철학자조차 변변하지 못한 제가 그를 평가하는 것은 남들은 코웃음 칠만한 일이고 배를 잡고 웃을만한 일은 아닐까요? 저는 질문합니다. 그리고 사실 질문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쥐어짜도 나오지 않는 말을 내뱉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황지우의 시는 전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떤 해답을 주지 않기에 혹자는 낭만주의적 경향이라고 한다고 하죠. 반면 다른 이는 그것을 '새로운 삶을 희구하는 남성적 낭만주의' 라고 칭합니다. (남성적이라는 뭘까요? 그건 바른 용어인 걸까요?) 하지만 저는 그게 제대로 질문 같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는 새로운 삶을 확실하게 추구하고 있으며 스스로의 반짝이는 재능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보입니다. '내가 사랑한 자리마다 모두 폐허' 라고 외치는 시에서 마저 저는 그의 어떤 자학적 자기 확신을 봅니다. 제가 너무 꼬인 걸까요? 어린 아이의 치기일까요? 나이가 들면 그가 얼마나 엄청난 도사였는가, 그의 뜻이 무엇이었나, 그의 시가 얼마나 아름답고 깊었는가 있을까요? 저는 모릅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솔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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