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힘이 세다 - 김시습의 금오신화 1218 보물창고 23
강숙인 지음, 김시습 원작 / 보물창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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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소설이라고 생각되는 김시습의 금오신화. 어렸을 적 부모님이 사주신 고전소설 전집 중에 한 권이었다. 박씨전, 흥부전, 춘향전 등등 여러 고전소설들과 함께 재밌게 읽었던 책. 생각해보면 나는 어렸을 적 책을 많이 읽진 않았지만 재미있는 책을 여러 번 책이 닳도록 읽었던 것 같다. 이유는 뭔지 모르겠지만 박씨전이 내가 제일 많이 읽었던 책이었고, 금오신화는 재미있었다는 기억만 있었고 자주 읽진 않았던 것 같다. <이야기는 재미있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다시 읽게 되었는데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의 다섯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선행이 스님(김시습)을 만나 경주로 온 지 삼 년 만에, 금오산실에 둥지를 튼지 일곱 달만에 떠날 결심을 했으나 스님이 이야기공부를 하자는 제안을 하는 바람에 이 공부를 다 하면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전등신화와 비슷한 류라고 스님은 말하며, 기이하고 슬픈 이야기에다 시도 아주 많이 들어있다고 귀띔한다.
만복사에서 홀로 살던 양생이 부처님과 저포놀이 내기를 하고 이겨서 전쟁 중에 죽은 처녀, 즉 귀신과 맺어지는 이야기가 첫 번째 이야기, 만복사저포기다. 귀신이기에 결국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고 양생은 그녀를 그리워하다 산으로 들어갔는데 그 후로 소식을 알 수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단편적으로만 생각하면 사랑을 하고 싶은 총각이 죽은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죽은 규수는 사실 김시습이 억울하게 죽은 상왕을 생각하면서 쓴 이야기라는 거다. 선행은 노산군이 무능한 어린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스님은 나름의 근거를 들어 그것이 꾸며낸 이야기이며 음모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이 책의 핵심이 나온다. 왜 그렇다면 스님은 노산군을 직접 등장시켜 이야기를 쓰지 않고 억울하게 전쟁 중에 죽은 규수로 바꾸어 이야기를 쓴 것일까? 만들어낸 이야기에 푹 빠져서 감동하게 되면 지은이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지어냈는지, 어떤 인물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창작해 내었는지를 따지게 될 것이고 자연스레 상왕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며 지은이가 이렇게 절절하게 그리워하는 임금이라면 소문처럼 무능한 노산군이 아니라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재주 있는 인물이면서도 때를 만나지 못해 하루아침에 스러져버린 가엾은 사람일 수도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될 거라는 거다. 이게 바로 이야기의 힘이라는 것.
두 번째 이야기인 이생규장전은 시가 많이 등장한다.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며 자신의 마음을 넌지시 내비치는 방식이 상당히 재미있다. 물론 내용 자체는 이생이 우연히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나 부모 반대로 헤어지고 도적이 쳐들어와 여인이 죽었으나 여인의 혼을 달래 이승을 떠도는 여인을 저승으로 무사히 보내고 자신도 결국 여인을 따라 갔다는 슬픈 내용이다. 이 역시 생육신, 사육신, 계유정난을 비유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야기가 끝나면 스님이 선행에게 수업을 하는 방식으로 책이 전개되는데 이야기를 이야기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숨은 의미를 생각하며 읽게 하기 때문에 두 번째 이야기부터는 이야기가 단순한 구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취유부벽정기도 마찬가지다. 시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야기로 슬픔보다는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억울하게 죽은 노산군을 그리워하는 김시습의 마음을 대변하는 이야기다. 감정이라는 것이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이 감정이라는 것은 말그대로 감정이입, 공감을 의미한다.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도 마찬가지이며 이 책은 특별히 각 이야기를 읽고 난 후의 수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야기를 줄거리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그 의도가 있는지 이면을 살펴볼 것인지. 결국 후자에 초점을 두고 있다. 스님은 이야기를 짓는 동안 자신을 돌아보면서 초심을 되찾앗고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신념대로 살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살아야 행복한 것이며 그것이 가장 나다운 삶, 행복한 삶이라는 거다. 먼 훗날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가 이 시대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나서면 그 이야기가 힘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다.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힘이 있다. 내가 여전히 책을 찾아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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