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평점 :
품절


박완서의 에세이를 읽고 있으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할머니 품 같기도 하고 시골 냄새 같기도 한 것이 이상하게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게 한다. 사람 냄새나는 글이라고 하는게 적당한 표현같다. 박완서의 글은 그래서 따뜻하고 위로가 된다.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을 스치게 내버려두지 않고 의미를 두어 글로 써내려간다는 것 자체가 자기 삶에 대한 애정이다. 따숩고 뜨겁게 살다간 작가의 삶이 부럽다.

<보통사람>은 보통의 존재로서의 사람은 어떤 건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보통적으로다가 평범하게 사는게 이렇게 어렵다는 걸 사십이 다되서가는 지금에서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마다 다른 보통의 잣대 속에 나의 보통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되돌아보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공감갔던 또다른 글은 <꿈>인데, 꿈이란 단어만큼 희망차면서도 허무할 수 없다. 예기치 않은 일에 대한 서프라이즈와 기대감을 꿈이라 한다면 너무 앞만 보고 계획적으로 살아온 건 아닌지 뒤돌아보게 된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근거리며 살기에 이미 현실에 찌든 불혹의 직장인의 삶은 퍽퍽해서 더 그리운 청춘같은 단어다.

아들을 먼저 보낸 후 쓴 글들이 많다. 죽음에 대한 단상, 왜 당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되느냐 묻는 수녀님의 질문에 깃든 겸손함도 좋다. 가정을 가진 여자가 일을 갖기 위해 딴 여자를 하나 희생시켜야 한다는 글, 그당시에 딸을 신여성이 되게 하기 위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그리워하는 고향과 서울에 대한 모순된 감정들이 가감 없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는데 그 솔직함이 너무 좋았다. 뻔한 클리셰를 깨는 느낌이었다.

<할머니와 베보자기>는 약간 울 뻔 했다. 어린 마음에 할머니가 부끄러워 초등학교 때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면서도 멀찍이, 아니면 할머니와 붙어서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누가 아는 체 하는 사람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길을 가던 기억이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할머니의 병약함과 촌스러움이 싫었던 것 같은데 박완서 역시 "할머니하고 같이 땅속으로 꺼질 수 있는 거라면 당장 꺼져버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손녀딸을 위해 밤잠 못 주무시고 송편 빚어 새벽에 쪄서 정갈한 베보자기에 싸서 이고 아침나절 20리를 걸었을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 그 정결하고 시원하고 성깔 있고 소박한 섬유, 베보자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나이가 된 박완서가 회고하는 할머니.

내게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참 많다. 할머니가 돌아가실까봐 밤마다 엉엉 울던 초등학생 시절. 할머니가 해준 감자튀김, 자주 사주시던 육개장 컵라면, 할머니가 몰래 드시던 박카스, 사춘기가 오고 할머니보다 내가 더 중요했던 시절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고 서운해하던,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직설적인 사랑표현, 내가 제일 좋고 내가 제일이라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우리 할머니가 보고싶어지는 글이었다.

남편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바닥에 엎드려 글을 쓰는 것. 규칙적인 코고는 소리가 있고, 알맞은 촉광의 전기 스탠드가 있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풀릴 때 행복하다는 박완서의 글에서 따스함이 느껴진다. 특히 남편의 코고는 소리로 그의 낙천성과 건강을 알 수 있어서 싫지 않다는 그녀의 말이 좋다. 내 남편의 코고는 소리는 아직도 적응이 잘 안되는데 새삼 미안해진다.

가을이 와서 황량하게 떨어지는 낙엽을 보다가 살구나무 가장귀를 보고 봉숭아 꽃물 든 손가락 같다고 표현하는 딸과 그 말에 인생의 맛을 느끼는 엄마. 나와 딸들도 같이 나이들어가며 그런 촉수를 소소히 지니고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녀의 글은 읽기 쉽고 겸손하면서도 솔직하다. 책 제목처럼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그것이 진실이고 진심이면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건 감동이다. 글에 진실을 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안다. 일기장에 몰래 적어야 할 감정과 진실들을 그대로 수면 위로 드러내는 용기가 글쓰기의 시작임을 박완서의 글들은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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