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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ㅣ 책세상 세계문학 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정회성 옮김 / 책세상 / 2021년 11월
평점 :
실격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격식에 맞지 아니함', '기준 미달이나 기준 초과, 규칙 위반 따위로 자격을 잃음'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격식, 기준, 자격이란 무엇일까? 품격있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한 개인이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는지 아닌지를 타인이 판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는 책,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다.
어떤 남자(수기를 쓴 남자)의 사진 석 장을 본 사람의 머리말로 시작되는 이 책은 '나'라는 화자가 이끄는 세 편의 수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남자의 사진은 어릴 적, 고등학생쯤 된 사진, 그리고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되어 나이가 가늠이 안되는 사진 석 장이다. 누가봐도 기분 나쁘게 생겨서 사진 속 웃음이 섬뜩한 느낌을 주는 아이, 그 아이는 자라서 고등학생이 되어 묘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데 으스스하고 꾸민 느낌이며 살아있는 사람같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표정과 인상이 없이, 특징이 없이 불쾌한 모습이다. 이 남자에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이 남자(요조)의 어린 시절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는 집에서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이다. 아이는 열 명 안팎의 식구가 묵묵히 어두컴컴하게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소름이 돋는다. 즐거운 밥 시간이 아니라 엄숙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먹는 매일 세 번의 밥시간은 '밥을 먹지 않으면 죽으니까 일을 해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모호한 협박으로 들리게 했으며, 그렇기에 인간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고 고백한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시작된 불안과 공포는 아이에게 인간에 대한 마지막 구애 행위격이었던 '어릿광대짓'을 하게 했다. 그걸로 아이는 인간과 겨우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가졌다. 사소한 꾸지람도 천둥처럼 강하게 들렸던 이 예민한 아이를 가족들은 마음으로 보듬어주지 않았다. 아이는 우울을 숨기고 천진한 낙천가인척 어릿광대짓을 하는 괴짜로 인간들을 웃기며 타인을 위한 서비스를 선보였다. 아이는 싫은 것을 싫다고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할 줄 몰랐다. 회고 수기에서 그는 양자택일의 능력마저 없었던 것을 실격 인생의 결정적인 부분으로 생각한다.
게다가 집안의 하인들도 겉으로는 주인인 아버지, 어머니에게 살가우면서도 속은 다르다. 요조는 남녀 하인들에게 서글픈 짓을 배웠고, 욕을 당했으며 어린 아이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가운데서도 가장 추악하고 저속하며 잔인하다고 생각했지만 참았다고 한다. '그런 짓'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성추행이나 성적 학대로 생각된다. 내성적이고 순수했던 아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너무 일찍 실망을 하고 본성을 알아버린 것이다.
가면을 쓴 삶을 살던 요조는 학창시절 자신의 가면을 처음으로 알아본 다케이치에게 놀라 일부러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다케이치는 잘생긴 요조에게 많은 여자들이 너에게 홀릴거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로 요조의 삶은 여자들과의 관계로 인해서도 얼룩졌다. 다케이치는 고흐의 자화성을 요괴 그림이라고 표현했는데 요조는 화가들이 인간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오히려 무서운 요괴를 똑똑히 보고 싶어서 과감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하고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은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다. 완성된 그림은 음산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이 직업에 매력을 느껴 그림을 그리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공무원을 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가라는 학교에 갔다가 흥미를 잃고 어떤 화가의 화실에서 호리키라는 미술학도를 알게 되고 그를 따라 술, 담배, 매춘부, 전당포, 좌익 사상 등을 알게 된다. 다케이치의 예언처럼 여자들은 요조 특유의 분위기와 잘생김에 반해 요조를 좋아했고, 그 무렵 들었던 공산주의 모임은 음지의 인간들인 것 같아 동질감을 느껴 요조는 그들이 편안했다. 요조의 아버지는 의원 임기를 마치고 요조가 있던 집을 팔아 아들을 낡은 하숙집으로 이사시켰는데 그는 부잣집 아들로만 살다가 그때부터 돈에 쪼들리게 된다.
카페 종업원이었던 쓰네코와의 만남은 요조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녀 앞에서는 본성을 숨기지 않고 과묵하게 술을 마셨던 요조는 남편을 형무소에 두고 고립된 삶을 살던 쓰네코에게 동정과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에 매우 지친 나머지 같이 죽자고 제안했고 우유살 돈마저 없어 굴욕을 경험한 요조는 제안에 응하며 같이 물에 뛰어든다. 쓰네코는 죽고 요조만 살아남은 처참한 결과, 그의 가족들은 그와 연을 끊고 형제들이 보내주는 조금의 돈으로 요조 아버지에게 부탁받은 넙치라는 아저씨와 생활하게 된다.
넙치 씨네 집을 나와 호리키를 찾아간 요조는 거기서 잡지 기자 시즈코를 알게 되고 만화 기고를 제안받아 그 일을 하게 된다. 그녀의 딸 시게코는 요조를 아빠라 부르고 같이 모녀와 함께 동거한다. 하지만 불안감과 우울함은 더 심해진다. 그러나 그즈음 '세상이란 개인'이란 생각을 하면서 예전보다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술의 양은 더 늘었다. 그러나 외박을 하고 들어온 시즈코의 집에서 두 모녀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자신이 끼이면 둘의 인생은 엉망이 될 거라고 생각해 아파트를 나왔다.
교바시 근처의 스탠드바 마담에 빌붙어 빈둥거리다 바 건너편 담배 가게의 열일고여덟살 정도의 순수한 아가씨 요시코를 알게 되고 그녀는 요조에게 술을 끊으라 한다. 요조와 결혼을 하고 스탠드바 마담을 내연녀로 두며 살다가도 자신을 믿어주는 신뢰의 천재 요시코를 보며 인간답게 살아볼까 하는 마음을 품는다. 어느 날, 찾아온 호리키와의 반대말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요시코가 남자 둘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을 알게 되지지만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다. 그날 밤부터 흰머리가 나고 자신감을 잃어가고 다시 사람을 의심하게 된 요조는 요시코가 더렵혀졌다는 사실보다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 한다. 요시코는 그날 이후로 요조의 눈치를 살피며 두려움에 떤다. 순결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 알코올만 찾던 요조는 수면제로 자살 시도를 하다 다시 살아난다. 약국에서 처방받은 소량의 모르핀으로 인해 자꾸 그것을 찾아가 모르핀 중독까지 걸린 그는 약국 부인과도 관계를 하고 피폐한 삶을 살다가 호리키와 넙치 씨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거기서 들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 마음 속 두려운 존재가 없다고 생각하자, 모든 의욕도 흔적도 사라져버린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내가 지금껏 지옥 같은 삶을 살아온 이른바 '인간' 세계에서 다만 한 가지 진리처럼 여긴 것은 이 사실뿐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p.131
마지막 마담의 입을 통해 나온 말로 작가는 자신의 마음을 대신한다. 그들이 아는 요조는 아주 순수한데다 남 배려할 줄 알고 술을 마셔도 천사같이 착한 아이였다, 아버지가 나빴다는 말.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실격자는 정말 요조일까? 결국 자살로 생을 마무리한 다자이 오사무는 요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인간 실격자가 아니라고. 그냥 따뜻하게 자신을 믿어줄 고향같은 집과 가족을 원했다고.
인생이란 뭘까. 그냥 지금 내 옆에 있는 따뜻한 사람과 서로가 주고받는 진심어린 신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삶과 인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책, <인간 실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