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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양장) - 개정판 ㅣ 새움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강렬한 시작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쉼표 하나, 번역된 글자 하나하나에 원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전달되기도 하고 조금 의미가 변형되기도 한다. 영어를 우리 말로 번역했을 때 그 의미가 어색해져버리는 것처럼. 이 책은 그런 부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번역을 다시 했고, '오늘, 엄마가 돌아가셨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직역 위주의 번역이라 원작을 번역 없이 읽을 수 있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를 양로원에 맡긴 후 양로원에서 알려온 엄마의 죽음. 표면적으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연애를 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듯 하지만 주인공 뫼르소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주는 의미는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그가 이웃 레몽을 만나게 되고 그 우연이 우연한 살인으로 이어졌다기엔, 소설에서 주는 냉정하고 차가우며 스산한 느낌의 뫼르소와 배경들이 심상치 않았다. 레몽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만나 또 다른 우연을 만나게 되었어도 사고를 쳤을 것 같은 느낌. 그것이 엄마의 부재로부터 이어진 케케묵은 감정의 터뜨림이었는지 그에게 사이코패스의 기질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살인은 어쨌든 뫼르소를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가 어머니를 생각하고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부분, 삶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부분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죽음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소설은 아주 건조하게 이어진다. 그 건조함이 카뮈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찾아본 바에 의하면 <이방인>은 실존주의 문학으로 분류되며 해석하는 사람에 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삶의 실존에 대한 의미 부여, 혹은 반대로 그러한 실존 자체에 대한 허무주의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소설이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끔찍한 살인의 이면에는 분노로 점철된 인간의 모습, 혹은 또다른 인간의 부류로 분류되는 사이코패스적 인간 등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삶에 대한 분노를 넘어서 실존 자체의 허무주의에 빠진(사실 살인에 대해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는 것도 우습고 또 하나의 변명을 만들어주는 것에 불과하지만)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에서 비롯된 살인과 점점 그러한 사건들에 무감각해져가는 현대의 모습을 알베르 카뮈가 이미 예견하고 <이방인>의 뫼르소로 탄생시킨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소설의 모습은 현대의 일부와 닮아 있다.
마지막 단락은 죽음의 앞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듯한 뫼르소의 모습으로 끝을 맺으며 묘한 여운을 띄운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세상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자기 자신을 열고, 형제처럼 느꼈고, 행복했었으며, 여전히 행복함을 느낀다는 문구가 가슴을 저릿하게 한다. 그래서 자신의 사형 집행이 있는 그날 거기에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아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에서 한편으로는 고독과 무관심이 낳은 인간의 외로움, 그리고 감정의 부재가 한 인간을 파멸로 이끌었다고 생각되어 차분한 마지막 단락이 더 저릿하게 느껴졌다.
이 책은 역자노트 부분에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이방인 깊이 읽기 부록은 단순히 소설의 줄거리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원작자 알베르 카뮈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고 번역하려는 번역자의 노고가 느껴진다. 가끔 번역이 너무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원작자의 소설 자체가 어려운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은데 이번 책은 번역에 많은 신경을 쓴 것이 읽으면서 느껴졌다. 삶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으로 이 소설을 이해해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