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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락 댄스
앤 타일러 지음, 장선하 옮김 / 미래지향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의 기억이 가끔씩 선명하게 기억날 때가 있다. 스토리의 흐름이 아니라 사진처럼 잔상으로 남아 문득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몽글몽글 솟아오르기도 한다. 아이에게는 최초 삼년이 제일 중요하다고 많이 들어왔지만, 나의 경우는 그 이후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아이가 말을 하고 듣고 이해하게 되고 소통하는 그 순간부터 만들어지는 모든 것들이 이후의 삶의 중간중간에 스며드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1967년, 주인공 윌라가 열한살이 1977년, 1997년, 2017년에 이르러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 그리고 그것이 주는 그녀 삶의 변화를 담담하게 써내려간 소설이다.
1. 1967년. 11살 윌라와 그녀의 여동생 6살 일레인의 엄마는 아빠와 싸운 후 집에 이틀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윌라 엄마는 매우 다혈질적이어서 윌라에게 화가 나 서빙수저로 뺨을 갈겨 눈에 멍이 들게 했다거나 일레인의 인형을 벽난로에 집어던진다든가, 그래놓고 다시 용서해달라고 울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모습 등이 윌라의 기억으로 묘사된다. 다정하고 따뜻하던 아빠가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순간,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내던 순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고 말했다면, 윌라의 삶은 바뀌었을까?
2. 1977년. 연인관계인 스물 한살 윌라와 스물 세살 데릭은 윌라의 부모님에게 인사드리러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는데, 옆자리에 앉은 낯선 남성이 윌라를 향해 겨눈 총구 사건으로 인해 윌라는 예민해져 있다. 게다가 자신의 학업을 이어나가고픈 욕구와 데릭의 청혼으로 인해 오는 갈등, 가족의 민낯(특히 엄마)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등을 느낀다. 데릭과 윌라 엄마의 언쟁으로 엄마의 가식이 드러나는 카타르시스에 윌라는 알듯모를듯한 황홀감을 느끼기도 한다. 만약 윌라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로 하면서 학업을 포기하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지켜냈다면 어땠을까? 삶이 달라졌을까?
3. 1997년. 데릭은 달리는 고속도로 안에서 윌라와 둘째 아들 이안의 학업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예민해져 보복운전을 하다 사고가 나 죽게 된다. 이때 장례식에 참석한 동생 일레인의 말은 윌라와 일레인이 어린 시절부터 느꼈을 엄마에 대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괴팍한 엄마 밑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제일 슬픈 게 뭔지 알아? 그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은 또 엄마에게 두 팔 벌리고 다가가 위안을 얻어야 한다는 거야. 정말 불쌍하지 않아?
p100
윌라는 10 여년전 먼저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리며 홀로 남은 아빠와 식사를 했다. 자신의 엄마를 떠올리며 그녀는 션과 이안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는 언제나 '예측 가능한' 엄마였다. 자식들이 엄마 기분이 어떤지 몰라서 노심초사하지 않게 하겠다고, 아침마다 방문을 살짝 열고 엄마 기분을 살피며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까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게 하겠다고 윌라는 굳게 다짐했었다.
p110
4. 2017년. 61살이 된 윌라는 피터라는 남자와 재혼해 애리조나로 거처를 옮겼다. 첫째 아들 션과 한때 사귀던 드니즈가 다리에 총상을 입었는데 그녀의 딸 셰릴을 봐줄 사람이 없다는 소식을 드니즈의 이웃 칼리에게 듣게 된다. 우연히 드니즈가 예전에 남긴 번호로 인해 윌라가 시어머니인줄 알고 칼리가 연락한 것인데, 이제는 아들과 사귀지도 않아 아무 관계도 없고, 셰릴 아버지는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이끌리듯 그곳으로 향한다.
션과 바람나 도망가버린 엘리사의 남편 할, 마을 한 켠에 작은 진료실을 둔 의사 벤, 도움주는 걸 좋아하는 이웃 소년 얼랜드와 옆집 밍튼 부인, 셰릴을 돌봐줬던 칼리 부인, 사설탐정 데이브, 게이커플인 배리와 리처드, 얼랜드의 이복 형제인 마초 느낌의 서 조 등은 다들 배우자와 사별, 이혼하거나 우리가 익히 아는 완벽한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진 않지만 무심한듯 서로 걱정하고 위해주는 이웃들이다. 임신과 동시에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엄마로서의 삶을 살았던 드니즈와의 공통점에 대해 공감하기도 하고, 드니즈를 도우며 자신을 많이 사랑했던 아버지를 떠올리기도 하며 윌라는 애리조나에서 아무 일 없는 무료한 삶을 살 때보다 감정적으로 풍요로움을 느낀다.
무뚝뚝한 아들들과 지나치게 예민하고 까다로운 이성적인 피터, 어린 시절의 상처때문인지 교류가 거의 없는 동생 일레인 등 진짜 가족들에게서 찾지 못한 가족적 정과 따스함을 드니즈의 이웃들이 있는 볼티모어에서 느끼며 점점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드는 모습은 풍족하지 않아도, 늘 행복하지는 않아도 괜찮게 살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제는 드니즈의 이웃같은 모습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철저히 방음하고 초인종 소리는 택배 이외에는 잘 울리지 않는다. 서로 마주치고 소통하며 낮은 문턱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시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한편, 드니즈의 총상사건 범인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생긴 마찰로 인해 다시 인생의 중요한 방향을 결정해야하는 순간 윌라가 내린 소설의 마지막 결론은 마치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처럼 아련하며 이 세상에 존재할 수많은 윌라들을 응원하고 싶어 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육아로 인해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아이키우는 일에 매달리며 평생을 살았을 우리의 부모님 세대의 엄마들이 생각났다. 남동생들의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를 포기하고 뒷바라지했거나, 자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던진 수많은 우리의 엄마들이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자신의 인생을 찾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날개를 펼쳤으면 좋겠다.
이웃의 정겨움, 부모의 역할, 유아ㆍ아동기의 중요성, 개인의 존재성과 행복의 의미, 일상의 소중함 등을 일깨워준 따뜻한 소설. 그런데, 클락 댄스, 즉 시계 바늘 댄스가 이 책의 제목인 이유는 뭘까? 이 소설에서 클락댄스가 등장하는 대목은 두 군데다. 셰릴의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추는 클락댄스를 몰래 윌라가 구경하며 웃음짓던 장면, 그리고 거의 마지막에 윌라가 마음을 다치며 생각했던 다음 대목이다. 아직 제목이 왜 클락댄스인지 이해하진 못했다. 한 번 더 읽으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만약 윌라가 클락댄스를 만든다면 세 소녀가 보여준 춤과는 다른 춤일 거라고 생각했다. 윌라의 춤에는 한 여자가 무대 왼쪽에서 등장해 무대 오른쪽 끝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회전하며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 눈에는 오로지 빠르게 도는 흐릿한 색깔만 보이다가 어느 순간 '펑!' 무대 끝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진다.
p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