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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
권성우 지음 / 소명출판 / 2019년 11월
평점 :
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 나는 이 제목에서 말하는 비정성시가 뭔지 몰랐다. 시의 한 종류인가? 찾아보니 1989년 제작된 대만 영화다. 꽤 작품성 있는 영화라 하니 한번 보고 싶어진다.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영화라고 하는데, 저자가 왜 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을 제목으로 정했을까 궁금해하며 책을 펼쳤다.
이 책은 숙명여대 권성우 교수의 에세이다. 11월에 만난 두번 째 산문집이다. 세번 째로 읽었던 오길영 교수의 <아름다운 단단함>과 비슷한 결의 산문집이고, 두 책에서 다루는 주제도 겹치는 게 있다. 신경숙 표절 논란이라든지 영화에 대한 얘기, 노포의 장사법, 그리고 김석범의 <화산도> 등이다. 굳이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성을 건드리는 소프트아이스크림 같은 에세이라기보다 진한에스프레스 커피같은 느낌이 강한 게 두 책들이다. <아름다운 단단함>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산문에는 비판과 지성의 사유가 들어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책도 그런 결을 같이 하고 있다. 또한 두 책 모두 작가의 뚜렷한 정치적 소신이 엿보인다.
이 책에서는 자이니치 문학의 성과로 일컬어지는 김석범 작가의 <화산도>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제주 4.3을 배경으로 한 12권의 장편소설이라 한다.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과 자이니치, 서경식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언급된다.
1부와 달리 2부는 작가의 습작이라할지, 어떤 것에 대해 떠오른 짤막한 단상 모음이 수록되어 있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이다. 정치, 책, 영화, 사람 등 그가 겪고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한 단상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작은 수첩이나 일기장에 혹은 블로그같은 곳에라도 꼭 매일은 아니더라도 단상을 적고싶어 진다. 이렇게 몇 년간 모인 단상은 내 사고의 흐름과 삶의 방향성을 말해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그런 단상이 그냥 내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라 지성의 사유장이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보고 느껴야한다. 아직 그러기에 많이 부족함을 책을 읽으면서 더더욱 느낀다. 이런 통찰력, 내공은 하루 아침에 쌓이진 않으리라.
3부와 4부는 문학/정치, 대학,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석영과 김학범같은 자이니치 작가들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고 화산도 배경지역 탐방 소회, 재일한인문학의 매력을 주로 얘기한다. <화산도>는 이 책에서 처음 알게된 작품인데 꼭 읽고 싶다. 읽어보고 다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더 감회가 남다르리라. 아직 내 독서력이 부족하여 언급된 책을 거의 대부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읽어보고 싶게끔 소개한 책들이 많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신경숙 표절 사건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고, 정치에 대한 얘기도 가감없다. 뚜렷한 정치적 소신을 내뱉을 수 있는 건 그만큼 지식적으로도 충만하며,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이 많다는 방증이라고 생각된다. 내 생각이 남들과 같다 혹은 다르다를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논박할 수 있는 그 정신적 여유가 부럽다.
책을 읽으며 첫 번째로, 나는 물론 문학 평론가나 관련업종 종사자는 아니지만 에세이스트가 되고 싶다고 몇번이고 생각했다. 소프트아이스크림같은 에세이가 아니라 진한 에스프레스같은 에세이말이다. 두 번째로, 재일 디아스포라 문학에 대해서 많이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일전에 <파친코 구슬>이라는 소설을 읽었음이 다행이었다. 아마 그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디아스포라 문학이 가지는 특별한 느낌을 지금보다 덜 느꼈을 것 같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이가 느끼는 감정을 어딘가에 붙박이처럼 소속된 누군가 완전히 공감하긴 힘들지만 공감의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세 번째로, 언급된 영화들이 보고 싶었다. <비정성시>를 비롯하여 영화 <김군>같은 것들은 그냥 보고 마는 영화가 아니라 더 무겁고 뜨겁게 느껴지는 영화다.
오길영교수의 <아름다운 단단함>과 결이 비슷한 산문집이라 찾아봤더니 두 분이 책을 같은 시기에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했다고 인터뷰도 했다. 이 두 책이 모두 나에게 와서 감사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