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름다운 단단함 - 세상.영화.책
오길영 지음 / 소명출판 / 2019년 10월
평점 :
내가 11월 늦가을을 보내며 선택한 세 번째 에세이다. 충남대 오길영 교수의 에세이 <아름다운 단단함>.
이 책의 머리글이 참 좋았다. 에세이는 어원 자체가 '시도하다'에서 왔다. 그래서 저자는 "에세이는 글쓴이가 자유롭게 선정한 주제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은 견해를 '시도'하는 글이며, 사유를 실험하는 글쓰기"라고 말한다. 에세이는 단순한 감상적 체험의 글이 아니며 지성과 개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현란한 글재주가 아니라 지성적 사유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성찰과 자기 응시가 빠진 에세이는 감상주의에 물든 글이며, 이 책은 철저히 저자가 "감상적 체험, 직접적 현실, 그리고 자연발생적인 현존재 원칙으로서의 지성과 개념"을 재료로 하여 쓴 글의 모음집이다.
세상, 영화, 책을 주제로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저자의 지성적 사유가 표현되는데,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혹은 나와 다르거나 같은 생각들을 만나 즐겁고 뜨겁게 사유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내가 보지 않고 읽지 않은 영화와 책이 많아 볼 거리, 읽을 거리를 많이 제공해 주었다.
나는 특별히 1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책과 영화는 아직 문화적 소양이 부족한 내게 숙제와도 같았지만 꼭 보고 싶고 읽고 싶게 했다.
저자가 다룬 주제는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한 에세이 평론, 문학 표절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들, 철밥통 문제, 권력, 세월호를 통해 바라본 용서와 화해의 조건, 신영복, 권력과 욕망 등이다. 저자의 글은 잘 읽히며 크게 군더더기 없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고 명확하여 신뢰감이 든다. 기억에 나는 문구를 몇 가지 적어 보았다.
좋은 에세이는 한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내면에 스며있는 역사와 사회의 풍경을 포착한다. (중략) 좋은 에세이는 몇 가지 요건을 필요로 한다. 첫째, 경직된 형식이나 체계로는 표현되기 어려우면서도 표현되기를 갈망한 독특한 체험, 둘째, 그 체험을 갈무리하는 지성과 사유의 깊이, 셋째, 이런 물음을 그만의 고유한 형식과 스타일로 표현하는 능력, 정리하면 체험의 사유와 표현의 완미한 결합이 좋은 에세이의 요건이다.
p92
저자의 에세이에 대한 지론이다. 말랑말랑 감성을 쏟아내는 글도 좋지만 지성과 사유의 깊이가 드러나는 글. 나는 언제 그런 글을 써볼 수 있을까.
교수 철밥통 관련 기사에 대한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인상적이었고, 내 생각과 같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사회 전반에 걸쳐, 특히 자본과 국가에게 밥그릇의 철밥통을 당당하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남의 철밥통까지 빼앗아야만 철밥통이 흔들리는 '나'의 마음도 편해진다는 속좁은 이기주의는 결국 모두를 공멸하게 만든다.
p121
철밥통 끼고 산다는 소리 깨나 들어본 내가 공감한 부분이다. 교사나 공무원, 교수, 공기업 등 철밥통 직업은 가진 사람들을 겨냥하는 기사와 그 기사에 달린 수많은 댓글공격을 보면서 사회 분열과 이기주의의 단상을 보았기에 공감했던 대목이다.
신영복 교수가 저자에게 결혼 덕담으로 건넨 말도 인상깊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희망이 아니라 오늘도 절망을 가르치고 집에 온 것 같아서 읽으면서도 뜨끔하고 고민되는 문장이었다.
영화 <기생충>, <옥자>, <곡성> 등의 한국 영화 평론뿐만 아니라 <그린북>,<셰이프 오브 워터>, <첨밀밀> 등 다양한 외국 영화 평론을 읽으며, 일단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었던 저자의 여유(?)가 부러웠다. 아이 낳고 직장 다니며 사는 어미의 삶이란 참으로 고달파 아이가 좀 크면 봐야지 하는 게 영화다. 시간적 여유도 그렇지만, 뭔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영화가 싫었던 것도 사실이다. 팍팍한 삶에 시간 겨우 낸 틈마저 머리 싸매고 싶지 않아 그냥 웃고 마는 영화만 극장서 골라봤던 것인데, 이 책에 언급된 영화들은 모두 지성적 사유가 필요한 일명 '머리 아픈' 영화일 수 있다. 첨밀밀 정도 빼고. 그런데 이제 여유가 좀 생겨 영화를 볼 틈이 생기면 메시지를 깊게 던지는 영화를 보고 싶다. 그런 영화의 예들이 이 책에 있다.
책을 내가 읽기 시작한 지는 얼마되지 않아 역시 내공 부족이다. 물론 이 책에서 언급하는 책들은 수준이 상당하다. <하이데거와 나치즘>이라든지 <카프카의 프라하>, <안나 카레리나> 등 상당한 깊이와 내공이 필요할 것 같은 책들과 그 평론들이 서술된다. 이렇게 책을 읽어야하는 거구나 많이 배우고 느낀다. 비평하고 성찰하는 작업을 꾸준히 거치며 글쓰기가 정렬되고 좋은 에세이가 탄생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나의 단어 실력 및 지식의 수준에 다시 좌절했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글에 등장하는 랑시에르의 신화적 사고, 알튀세르의 '유물론자는 자기 변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견지에서 카프카의 '세계와 당신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세계의 편에 서라'는 문장과 라캉의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부분은 깊게 새겨야 할 문장들이자, 더 공부해야 할 부분이다.
아름다운 단단함. 아름답고 단단한 삶은 그냥 오지 않는다. 저자처럼 끊임없는 성찰과 자기 반성, 지성과 사유를 통해서만 아름답게 단단해질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도 지성적 사유의 글쓰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충만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