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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평점 :
추워지는 가을, 겨울에 딱인 따뜻한 로맨스소설을 오래간만에 읽었다. 영국 런던이 배경인 영국소설이자, 진짜 연애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연애소설 .
셰어하우스 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두 남녀의 동거 를 주제로 한 로맨틱코미디 장르이지만 마냥 가벼운 소설은 절대 아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이 넘쳐나는 소설이다. 가제본으로 읽게 되어 영광이었다.

"그 없는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았다."
"철조망 사이로 보일까 말까 하는 하늘은 이곳을 비웃듯이 푸르렀다."
DIY 관련 책 출판사의 편집자인 티피는 동거하던 남자친구 저스틴이 바람을 피우고 딴 여자랑 약혼하는 바람에 같이 살던 집을 나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형편에 맞는 집을 구하지 못한 티피는 우연히 한 집을 두 사람이 같이 공유해 쓰는 셰어하우스 광고를 보게 된다. 시간대는 다르게, 그러나 침대는 같이 쓸 수 밖에 없는 셰어하우스에 들어가기로 티피는 맘을 먹는다. 집 주인은 호스피스 병동 남자간호사인 리언. 야간 근무를 하는 리언은 동생 리치의 억울한 수감생활을 구제해 줄 변호사 비용 마련을 위해 셰어하우스를 광고를 냈던 것이었다. 각자 나름의 상처를 안고 있는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티피는 일 때문에 승선하게 된 유람선에서 전 남친 저스틴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의 눈빛, 그리고 뒤이어 온 문자에 마음이 흔들린다. 티피는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케이크를 잔뜩 만들어 먹고 룸메이트인 리언에게 줄 양도 남겨놓는다. 리언과 티피는 셰어하우스 생활을 하는 4개월동안 만난 적 한번 없지만 서로 음식을 만들어 남겨놓기도 하고, 각자의 연애사에 대해서도 간단한 얘기를 나누는 등 티피의 수다스런 성격으로 인해 시작된 메모를 주고 받으며 점점 가까워진다.

한편, 티피는 우연히 리언 동생 리치의 전화를 받게 된다. 리치의 사연을 들은 티피는 리치가 주장하는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지 절친인 변호사 거티에게 의뢰한다. 티피에겐 자신의 모든 일을 의논하는 절친이 둘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솔직하고 거침없는 변호사 거티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차분하고 사려깊은 심리상담사 모이다.
"그놈은 너에게 독이었어. 어디로 어떻게 갈지 시키고, 그렇게 하고 나서도 너를 거기까지 데려다줬지. 왜냐하면 너 혼자서는 길을 찾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너에게 주입시키려고"(p239)
티피는 목공 관련 책 홍보 파티에서 책 저자인 켄이라는 남자와 술을 먹다 엉겁결에 키스를 하게 되는데 그순간 전 남친 저스틴이 생각나면서 모든게 엉켜있는 기분을 느낀다. 그 순간 우연처럼 저스틴이 나타나 그가 약혼녀와 헤어졌고, 다시 티피와 시작하고 싶다고 말한다.
저스틴은 티피와 사귀는 아주 오랜 시간, 서서히 티피의 감정을 지배해왔다. 늘 자신의 방식으로 티피를 대하고 상대의 감정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으며, 끝내주게 사랑하다 또 이별을 선언하고 다시 맘대로 돌아오는 걸 반복하며 티피를 곤란하게 했다.

티피는 저스틴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의 감정이 최고조로 달했을 때도 저스틴이 불현듯 생각나며 두렵고 몸과 생각이 굳어버리는 증상을 겪는다. 타인의 심리적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 사람의 감정을 지배하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종속적 관계의 성립, 가스라이팅 이라 불리는 감정적 데이트 폭력으로 인해 티피의 자존감과 독립심은 땅에 떨어졌다.

소설의 중심적 인물은 아니지만 호스피스 병동의 꼬마 홀리와 죽음을 앞둔 노신사 프라이어는 티피와 리언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말이 없고 늘 조용한 리언이 실은 좋은 사람들을 위해 말을 아껴놓는 거라고 말하는 꼬마 홀리의 시선이 기특하다. 또한 프라이어 씨의 동성 애인이었던 조니 화이트를 찾기 위해 리어이 고군분투하는 과정은 웃음을 선사하기도 하고 티피와의 애정 전선이 급물살을 타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왜 작가가 티피의 직업을 DIY 책 관련 출판사 편집자로, 리언의 직업을 호스피스 병동 간호사로 설정했는지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가스라이팅의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변화하지 않으면 주위에서 아무리 다그쳐도 소용없다. Do It Yourself는 그런 깊은 뜻이 왠지 있을 것 같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리언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환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그들이 삶을 살아내는 과정을 함께 해준다. 그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건 공감과 배려, 존중이었을 거다.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리언처럼.
이 소설은 티피와 리언의 시각이 번갈아 교차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리언의 셰어하우스에서 그들은 단지 침대만 셰어(share)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주고받는 메모로 인해 그들은 서로를 급하지 않게, 천천히 서로를 셰어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메모를 썼다 지웠다 하기도 하고, 내 메모에 대한 답장을 기다리며 서로의 감정을 배려하고 인내하는 과정이 메모에 담겨 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집(house), 그 따스한 공간의 의미에 대해서도 되새겨보게 한다. 우리 모두에게 집은 친밀한 누군가와 세밀한 감정을 나누며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공간 아니던가.
겉으론 너무도 다를 것 같은 티피와 리언의 감정이 무르익는 과정, 그리고 그 달달한 연애. 그 이면에 숨겨진, 내 애인은 내꺼라는 소유욕으로 인해 시작된 가스라이팅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주는 상처, 그 와중에 끈끈한 청춘들의 진실된 우정, 조니 화이트 찾기의 결말, 리치의 억울한 수감생활의 끝, 그리고 중간중간 깨알같은 여러 매력적인 등장인물들까지.
실타래같이 촘촘하게 엮어진 이 가을의 따뜻한 연애소설. 베스올리리의 셰어하우스(The flatshare)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