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40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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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콜라이가 의대생인 그의 아들 아르카디와 오랜만에 만나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아르카디는 자연과학 전공인 그의 친구 바자로프를 집에 데려와 잠시 함께 지내게 되고, 니콜라이의 형이자 아르카디의 큰아버지인 파벨을 만나게 된다. 급진주의자인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 즉,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에 비판적이며 "시대가 내게 달린거지 내가 시대에 달린 게 아니"라는 진보적 정신을 갖고 있다. 아르카디 역시 마찬가지다. 구세대(아버지세대)인 니콜라이, 파벨은 신세대(아들세대)인 아르카디, 바자로프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말뿐인 관념을 경계하는 행동주의인 신세대들과 달리 현재의 관습과 규칙에 보수적으로 긍정하는 구세대들은 마치 현재에도 늘 반복되는 세대차이를 보는 듯하다.
아르카디의 친척집을 방문한 바자로프와 아르카디는 우연히 무도회에서 기품있는 과부인 오딘초바 부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우아함에 빠지게 된다. 오딘초바 부인의 초대에 응한 그들은 그집에서 얼마간 지냈는데 오딘초바 부인을 사랑하게 된 바자로프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낭만적 감정을 억누르다 이를 주체하지 못하는 시점에 그녀의 집을 떠났고, 허무주의적인 자신이 그런 낭만을 느꼈다는 것에 죄의식같은 걸 느꼈다.
바자로프의 부모님 집으로 간 아르카디와 바자로프는 미사여구를 쓴 아르가디를 바자로프가 비난하다 다투게 되고 다시 아르카디의 집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니콜라이가 좋아하는(파벨도 좋아할지도 모를) 페네치카와 갑작스레 키스하게 되고 그것이 파벨에게 발각되어 파벨과의 결투 끝에 파벨이 다리에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파벨은 자신의 고집스러움을 꺾고 바자로프를 인정했으며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의 집을 떠난다.
한편, 아르카디는 오딘초바 부인의 동생 카챠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변화함을 느끼고 사랑에 빠져 청혼하였으며, 바자로프는 오딘초바 부인을 사랑했으나 결국 말하지 못하고 떠났고 친구인 아르카디와도 작별했다. 바자로프는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왔지만 예전의 패기넘치던 부정적 진보주의자, 행동주의자의 모습은 사라졌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염병이 걸려 오딘초바 부인에게 마지막 사랑을 고백하며 잠들었다.

이 소설은 뒷부분에 제시된 바칼로레아 이외에도 중간중간 생각할 문제를 많이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보수와 진보, 구세대와 신세대, 어느 쪽도 편들어 주지않는 철저한 중립적 시선이 느껴지는데, 결국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앞두고는 미사여구 거부, 낭만 혐오와 같은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친구에게 지식적으로 억압받는 것 같았던 아르카디는 자신을 잘 이해해주고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카챠로 인해 현실은 직시하고 날선 칼날같은 불안함을 거둔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건 지금, 여기인지도 모른다. 농부들을 얕보던 바자로프가 역으로 농부들에게 헛소리하고 뜬구름잡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아이러니는 아무리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진보주의자라 할지라도 그 자신이 스스로 가장 경멸하던 탁상공론의 대표주자임을 깨닫게 해준다. 즉, 자신의 의견만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옳다고 타인을 경멸할 이유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 사회에도 늘 세대의 차이, 이념의 차이가 거센 파도처럼 일렁인다. 공감과 경청이 결여된 사회, 불안이 내재된 사회에서 지금 여기,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고 행복하며 그 기저에는 타인 존중, 공감, 경청, 배려 등의 기본적인 빛나는 가치가 존재함을 말해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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