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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평점 :
어렸을 때 나는 책을 싫어하는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제목과 대강의 줄거리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저 걸리버가 자기보다 훨씬 더 작은 사람들만 사는 소인국에 표류하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한 기행문 정도로 기억 속에 남아 있고 실제로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성인이 된 지금, 새삼 어릴 때 무수히 많이 들어봤던 '걸리버 여행기'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어릴 때 내가 이 책을 아동문학으로 접했다면 나는 아마 성인이 되고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어린 시절 내가 책을 무진장 싫어해 걸리버의 여행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성인이 되어 이 책을 읽고픈 마음이 생겼고, 나는 읽으면서 이 책의 실체(?)를 알고 나서는 더욱 호기심이 커졌다. 그리하여 책읽는 중간중간 부가정보들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첫째, 이 책이 출간된 연도는 1726년이다. 이토록 오래된 소설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사랑을 받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로 내려오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나서 그 이유를 명확히 깨달았다.
둘째, 이 책은 소인국 여행기만 수록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아동문학이 아니다!! 실제로 이 소설은 풍자소설로 유명한 성인 소설이며 총 4부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소인국 릴리펏 여행기는 그중 1부에만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2부는 거인국인 브롭딩낵 여행기, 3부는 라퓨타, 발니바비, 럭낵, 글럽덥그립, 일본 여행기, 4부는 후이늠국 여행기가 수록되어 있다.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을 이 방대하고 해학 가득한 풍자소설이 아동문학으로만 읽혔는지 호기심이 생겼다.
1부는 릴리펏(소인국) 여행기다. 어쩌다 가게된 이 나라는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계획적이고 질서가 정연한 국가다. 이 나라는 징벌보다 포상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이방인인 걸리버를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최대한 존중한다. 예를 들면, 걸리버를 석방할 때, 석방 조건을 받아들이겠다는 맹세를 할 때도 걸리버의 조국의 방식대로 먼저 맹세하고 이후에 소인국나라의 방식대로 맹세하라고 명한다. 신민 1728명분에 해당하는 고기와 음료를 날마다 제공하고 이에 대해 백성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낯선 이방인에 대한 예의다.
걸리버는 상대적인 크기의 우위에 의해 소인국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듯한 시선을 던진다. 그러나 이 작은 나라에도 어떤 그들만의 법률과 상식이 존재하고 걸리버는 어쨌들 그 나라의 규칙을 최대한 존중한다. 공직을 뽑을때 도덕성을 높이 보는 부분이나 공공육아학교에 대한 내용은 우리 현대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어이는 낯선 곳에서 상실된다. 달걀을 갸름한 부분부터 깨느냐 넓적한 부분부터 깨느냐로 또 다른 소인국인 블레푸스코와 전쟁 중인데, 꼭 우리의 국회 일부분과 닮은 곳이 느껴져 씁쓸한 웃음이 지어지는 대목이다. 결국 걸리버는 누역죄 누명을 씌우려는 자들에 의해 도망치듯 그 나라를 빠져나오게 된다.
2부는 거인국인 브롭딩낵 여행기다. 모든 것은 역지사지,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기 힘든 법이다. 졸지에 소인이 된 걸리버는 거인국에서 장난감 취급 당하며 하루 종일 공연하는 신세에 처하고, 그를 하찮게 여기는 거인국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거인이 되어 릴리펏에 있었을 때를 떠올리게 된다.
거인국의 왕은 걸리버와 이야기하길 즐겨하며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는데 이 질문들은 그 당시 영국 사회를 꼬집는 것으로 생각된다. 왕이 입법자 자격을 얻기 위한 필수 요소가 무지, 나태, 악덕이라고 생각한다든가 걸리버가 설명한 영국에 대해 '자네 나라의 국민 대부분은 가장 해로운 벌레같은 족속'이라고 묘사한 부분은 직설적으로 영국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걸리버가 화약을 제조해주겠다 해도 거인국 왕은 이를 거절하며 옥수수 이삭이나 풀잎을 더 자라게 하는 사람이 어떤 정치인보다도 더 귀중한 봉사를 하는 것이라 말하는데 저자가 무엇을 인간의 덕목으로 여기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3부는 라퓨타를 포함한 여러 나라의 여행기가 서술된다.
날아다니는 섬인 라퓨타의 사람인들은 수학, 음악을 제외한 모든 주제에는 서툴며 지나치게 추상과 사색을 즐기는 사람들 때문에 여자들은 외지인과 바람도 쉽게 핀다.
라퓨타가 왜 떠다니는지 설명하기 위한 내용은 상당히 과학적이다. 심지어 케플러의 법칙까지 등장하는데 나는 이 법칙까지 등장하는 걸보고 저자인 #조너선 #스위프트 의 학문적 깊이를 실감했다. 어쨌든 이건 그만큼 이 나라가 천문학에 발전했다는 증거로 제시된다.
아이러니하게 이 나라의 수도 라가도는 사람들이 학문에 정진하고 학술원이 발달했지만 정사를 돌보지는 않는다. 8년 동안 오이에서 햇빛추출계획에 매진하다든가 똥을 음식으로 다시 되돌린다든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계획과 실험만 가득하여 도시가 추상적, 사변적인 사람들로만 가득하고 실현가능한 것은 없다.
라가도를 떠나 도착한 글럽덥드립은 과거 죽은 사람들을 소환할 수 있는 마법의 나라이고, 이어 도착한 럭낵은 죽지 않는 사람인 스트럴드브럭이 존재하는 나라다. 영원한 삶이 주는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끝이 있는 삶이 주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4부는 후이늠국 이야기다. 야후와 후이늠 두 종족으로 이루어진 이 나라는 걸리버와 비슷한 인간의 모습을 한 야후가 타락하고 이성이 거의 없는 피지배층이고 이들을 지배하는 말과 비슷한 후이늠들이 지배층이다. 걸리버같은 야후가 어떻게 이성적일 수 있는지 놀란 후이늠들에게 걸리버는 조국인 영국에 대해 설명하는데 후이늠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부분은 당시 영국 사회를 꼬집으면서 현재 우리 사회도 되돌아보게 된다.
"모든 이를 지키고자 만들었다는 법이 왜 누군가를 몰락하게 만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걸리버 여행기, p.304, 현대지성
말의 입장에서 본 야후들, 즉 인간은 빛나는 돌(돈), 먹을 것, 각자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싸워대는 어리석한 존재며 이성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결점이 말의 시선을 빌려 드러나는 순간은 걸리버도 독자도 모두 일명 '웃픈'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지점이다. 왜 하필 후이늠은 말이었던걸까? 어쨌든 우정과 박애가 미덕인 후이늠을 존경하며 급기야 영국으로 돌아가서도 야후들(인간)과 함께 지내는 걸 고통스러워 하며 고결한 후이늠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끝맺는 부분은 인간이 인간답기 위한 조건과 그 시대의 사회적 병폐 및 현 시대까지 이어져 오는 인간 사회의 부조리함을 곱씹어보게 한다. 왜 이 책이 처음 세상에 나온지 3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저 책을 읽고 웃지만은 못할까. 웃음 뒤에 오는 쓴 맛, 그 쓴 맛이 인간의 양심을 조금이라도 건드렸다면 이 소설은 그 의미를 다했다고 본다.
덧1. 어릴 적 열심히 하던 대항해시대 라는 게임이 순간순간 생각나던 걸리버의 항해 여정도 재미를 선사한다. 해적을 만나거나 표류하는 과정에 이입하다보면 내가 처음 신대륙을 발견했다면 느낄 수 있을 것같은 나름의 박진감도 느낄 수 있다.
덧2. 책은 각 장에 들어가기 전에 그 장의 줄거리가 간단히 몇 줄로 요약되어 있어 내용을 읽고 다시 정리하고 좋게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각주가 달려있어 저자인 조너선 스위프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이 내용을 썼는지 알 수 있었으며, 생소한 지명이나 간단한 설명을 요하는 곳에도 각주로 인해 이해가 쉬웠다.
덧3. 아직 작품 해설은 읽지 않았다. 한 번 더 읽고 난 후 해설을 보고 싶어서.
덧4. 첫 장에서 걸리버가 아버지가 준 돈을 모아 항해술과 그와 관련된 수학 지식을 배우는 데 사용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말이 왜 이렇게 좋을까. 수학은 항해에도 쓰인다!! 게다가 걸리버에게 매일 제공될 식량을 계산할 때에도 신장이 소인들의 12배이므로 부피는 12×12×12=1728배라는 결론을 얻었고 이는 소인국 수학자들의 계산이며 이것만 보더라도 릴리펏 소인국의 수학 수준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는 라가도에서를 제외하고는 수학을 실용적 학문으로 여긴다. 라가도가 그 많은 학술원을 가지고도 실패한 나라였던 이유는 학문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해보게 한다.